2024년 4월 28일 (일)
(백) 부활 제5주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전례ㅣ미사

[축일] 전례력 돋보기: 낯설었던 2011년 1월 6일의 주님 공현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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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1-19 ㅣ No.2276

[전례력 돋보기] 낯설었던 2011년 1월 6일의 주님 공현 대축일

 

 

이탈리아에 유학을 가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성탄 방학이었다. 커피 한 잔 주문하는 것도 속으로 몇 번을 되뇌이고 용기를 내어 겨우 말하던 시절, 한없이 움츠러들던 일상을 뒤로하고 독일 뮌헨의 한인 본당에서 교구 선배 신부님들과 함께 오랜만에 흥겨운 시간을 보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다시 로마 공항에 내린 날은 방학의 마지막날인 2011년 1월 6일 이른 아침이 었다. 공항에서 다시 어학 공부를 하던 빼루지아(Perugia)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타야 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생겼다.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는 것이었다. 더구나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도 없었다. 무언가 잘못된 것 같긴 한데 그걸 알 길이 없어 애꿎은 버스 시간표만 몇 번이고 들여다봤다. 그렇게 1시간여를 기다린 끝에 지나가던 아주머니의 친절 덕분에 의문이 풀렸다. “오늘은 1월 6일, 에피파니아(주님 공현 대축일)야. 공휴일 버스 시간표를 봐야지!” 이탈리아의 대중교통은 주일과 공휴일에는 평일보다 기차나 버스의 배차 간격이 늘어난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1월 6일이 공휴일이었다니. 처음 공휴일로 보내는 주님 공현 대축일이 참 낯설었다.

 

주님 공현 대축일이 왜 공휴일일까? 공휴일로 지낼 만큼 그날이 중요한가?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에서도 이 축일을 1월 2일 과 8일 사이의 주일로 옮겨 지내며 신자들이 많이 참례할 수 있도록 한다. 하지만 늘 옮겨 지내다 보니 1월 6일이라는 본래의 날짜를 잊어버리고 지내왔던 것이다.

 

‘에피파니아(Epiphania)’란 말은 ‘밝게 드러남, 나타남’을 뜻한다. 그래서 우리말로는 이 축제를 하느님의 아드님의 탄생이 동방 박사들로 대표되는 모든 인류에게 공적으로 드러나셨다는 뜻의 공현(公現))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든다. 이미 성탄 대축일을 지내면서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했는데 왜 주님 공현 축제를 따로 지내는 것일까? 성탄만으로는 부족한 것이었을까?

 

12월 25일 성탄절이 350년경 로마에서 먼저 확립된 축제였다면, 1월 6일 주님 공현 대축일은 그보다 앞서 동방의 여러 도시에서 예수님의 신성이 이 세상에 나타나심을 알리는 다양한 주제들, 즉 예수님의 탄생과 동방 박사의 경배, 예수님의 세례, 카나의 첫 기적 등을 함께 기념하는 날이었다. 이후 로마의 성탄 축일이 동방 지역으로 전파되고, 동방의 공현 축일이 로마에 전해지면서 두 축일을 함께 지내게 된 것이다. 이렇게 두 성탄 축제가 함께 존재하는 모습은 동서방 교회가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해 온 전례의 역사를 잘 나타낸다고 하겠다.

 

한편 로마에서는 성 대 레오 교황(재위 440-461)의 강론을 통해 동방에서 기념하던 1월 6일의 다양한 주제 중 동방 박사의 경배를 통해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 모든 민족에게 널리 알려진 사건을 중점적으로 기념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시기 전례는 주님의 공현을 알리는 다른 사건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는다. 특별히 주님 공현 대축일과 그 이후 평일의 시간전례에서는 예수님의 세례와 카나에서 첫 기적을 이루신 사건을 자주 언급한다. 대표적으로 주님 공현 대축일 제2 저녁기도의 성모의 노래 후렴은 이날을 이렇게 소개한다.: “오늘 세 가지 기적으로 이날을 기념하였도다. 별이 박사들을 구유에로 인도하였고, 혼인 잔치에서 물이 술로 변하였으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도다.” 또한 이 사건들은 주님 공현 대축일 이후 바로 이어서 오는 주일, 곧 주님 세례 축일과 연중 제2주일(다해)의 복음 내용으로 읽도록 배치되면서 전례력 안에서 주님 공현의 신비를 순차적으로 기념하고 있다.

 

동방 박사의 경배 뿐 아니라 다양한 하느님의 아드님을 드러내는 ‘에피파니아’의 표징들이 우리에게 주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베드로 크리솔로고 주교는 다음과 같은 답을 준다. “우리를 위해 탄생하시기를 원하셨던 그분은 우리가 당신에 대해 모르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공현 후 월요일 독서 기도 제2독서)

 

여전히 유럽의 1월 6일이 공휴일임이 낯설게 느껴지지만 우리가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연약한 아기의 모습을 택하시고, 이방인들에게 나타내 보여주시고, 세례의 물에 먼저 잠기시고, 그리고 장차 흘리실 피의 상징인 포도주를 내어 주신 분의 따뜻한 사랑을 이제는 낯설게 느끼지 않고 늘 기억하기를 다짐해 본다.

 

* 이번 호부터 새로 연재되는 소형섭(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전례력 돋보기’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소형섭 신부님은 교황청립 성안셀모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전례 관련 과목과 가톨릭 사상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월간빛, 2023년 1월호, 소형섭 아우구스티노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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