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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공소2: 의정부교구 적성본당 장파리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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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1-08 ㅣ No.909

[공소 公所] (2) 의정부교구 적성본당 장파리공소


전사자 추모의 뜻 간직한 공소, 마을 쇠락에도 신앙의 맥 이어가

 

 

의정부교구 적성본당 장파리공소는 6·25 전쟁 당시 리비교를 설치하다 목숨을 잃은 2명의 병사와 전우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리비 중사를 추모하기 위해 지어진 성당이다. 사진은 장파리공소 전경.

 

 

치열한 공방전 이어졌던 장파리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장파리는 임진강의 유명한 포구였다. 파주(坡州)는 언덕과 평지가 골고루 섞인 지형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파주 지역에는 마루(언덕)를 뜻하는 ‘고개 파(坡)’가 붙은 지명이 적잖이 있다. 장파리는 장마루, 금파리는 금마루 또는 쇠마루, 동파리는 해마루라 불렀다.

 

파평면 장파리는 마을 서쪽에 임진강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있고, 동쪽은 낮은 구릉이 길게 늘어져 있는 평온한 마을이다. 긴 동쪽 마루 때문에 마을 이름이 장마루 곧 장파리로 불렸다.

 

장파리는 일제 강점기에 의주까지 가는 도로가 건설되면서 번성했다. 사람과 자동차가 문산을 거쳐 파평 장파리, 장단 고랑포에서 임진강을 건너 개성으로 끊임없이 왕래했다. 장파리는 6ㆍ25 전쟁 후 더욱 유명해졌다. 6ㆍ25 전쟁 이후 전선이 38도선 부근에서 고착되면서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 이어졌다. 1951년 7월 개성 개봉장에서 정전 협상이 시작되면서 회담 대표단이 이용할 다리가 임진강에 설치되기 시작했다. 미군은 이때부터 1953년까지 파주와 연천 지역에 11개의 다리를 설치했는데 장파리에 지은 ‘리비교(Libby, X-Ray)’만 유일하게 남아있다.

 

리비교는 파평면 장파리에서 진동면 용산리를 잇는 총연장 328m, 폭 12m의 콘크리트 다리이다. 1952년 10월에 시작해 1953년 7월 4일 미국 독립 기념일에 준공했다.

 

‘리비(Libby)’라고 다리 이름을 짓는 데까지 여러 이름이 후보에 올랐다. 1953년 1월 다리 건설 도중 7번 교각 지점에서 폭발 사고로 사망한 카투사 김호덕 대위도 후보로 선정됐다. 같은 해 4월 임진강에서 배가 뒤집혀 물에 빠진 한국인 노동자를 구하다가 익사한 미 일병 제임스 오그라디도의 이름도 올랐다. 하지만 미 8군 맥스웰 테일러 사령관은 고민 끝에 ‘리비’ 중사의 이름으로 결정했다.

 

미 제24사단 전투공병대대 소속 조지 리비(George D. Libby) 중사는 1950년 7월 20일 대전 전투 당시 자신을 희생해 사단 병력을 옥천으로 철수시키는 데 공헌했다. 그는 부상병들을 후송하던 중 인민군의 매복 공격을 받았다. 리비 중사는 포차에 부상병들을 옮겨 싣고 자기 몸으로 운전병을 보호하면서 길가의 부상병들까지 태워 철수하던 중 수발의 총상을 입고 전사했다. 이 공로로 리비 중사는 6ㆍ25 전쟁 최초로 미국의 최고 무공 훈장인 ‘Medal Honor’를 받았다. 맥스웰 테일러 사령관은 정전 협정 대표단이 이 다리를 오가면서 전우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조지 리비 중사의 숭고한 정신을 되새기게 하고자 리비 중사의 이름으로 명명한 것이다.

 

리비교는 민통선을 잇는 유일한 다리였다. 리비교로부터 비무장지대(DMZ)까지는 약 4~5㎞ 거리이다. 장파리는 1960년대부터 1973년 미 제2사단 23연대가 민통선 지역에서 철수하기 전까지 하루 유동 인구가 2~3만 명이 될 정도로 번화했다. 장파리 중앙통에는 미군을 상대로 한 클럽과 술집, 옷가게, 세탁소, 미장원, 당구장, 사진관이 난립했다. “동네 개들도 달러를 물고 다녔다”고 할 만큼 향락의 도시였다. 당시 무명 가수였던 조용필, 패티킴, 윤복희 등이 무대에서 노래했던 ‘라스트 찬스(Last chance)’ 클럽이 지금도 남아 있다.

 

- 장파리는 1970년대 초까지 미군을 상대로 번성한 마을이었다. 사진은 가왕 조용필과 윤복희, 패티 킴 등이 무명 시절 무대에 올라 노래했던 장파리 라스트 찬스 클럽.

 

 

미 군종 신부가 설립한 공소

 

장파리공소는 리비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갖고 있다. 장파리공소는 리비교를 설치하다 목숨을 잃은 2명의 병사와 전우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리비 중사를 추모하기 위해 지어진 성당이기 때문이다. 장파리공소는 1962년 미 고문단 볼리베이커 군종 신부에 의해 설립됐다. 미 군종 신부는 미국에서 온 구호물자로 장파리 주민들에게 도움을 줘 많은 이들이 세례를 받았다.

 

1965년 6월 18일 미 군종 신부의 요청에 따라 당시 경기도 소사에 본원을 두었던 인보성체수도회 이영순 루치아ㆍ김영순 가타리나ㆍ박정자 데레사 수녀가 처음으로 파견됐다. 수도자들은 소돔과 같이 향락에 젖어있던 주민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헌신적으로 선포했다. 1966년 성모유치원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쳤고, 기지촌 여성들을 성모님의 마음으로 치유해줬다.

 

장파리는 미군 철수와 함께 쇠락했다. 즐비한 가게들이 하나둘 문을 닫고, 기지촌 여성들도 모두 빠져나갔다. 농사를 짓는 주민들만 빼고 마을이 텅 벼갔다. 1971년 인보성체수도회가 전북 전주로 모원을 이전하면서 수도자들도 철수했다. 성모유치원도 5회 졸업생을 끝으로 문을 닫았다.

 

장파리는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슬럼화가 계속되고 있다. 새로운 유입 인구가 없어 노인들만 마을을 지키고 있다. 군사보호구역과 상수원보호구역 등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 남아있는 대다수 주민들은 북방 민통선 출입 영농 지역에서 벼와 콩, 인삼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인보성체수도회, 수도자 파견

 

인보성체수도회는 다시 2003년 장파리 인근 식현리에 김주희 체칠리아ㆍ변 데레사 수녀를 파견해 마을 주민 속에서 사도직 활동을 하도록 했다. 그리고 2005년에는 아예 장파리공소 안에 수녀원을 지어 이전했다.

 

장파리공소에 수도자들이 상주하면서 신자들은 물론 마을 주민들이 조금씩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수도자들은 마을 홀몸 노인들과 노부부, 조손 가정 등을 방문하면서 그들을 돌보고 있다. 치료가 필요한 노인들을 문산과 일산 등지 병원으로 모셔다 드리고, 시설에 입소해야 할 분들은 수소문해서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또 매월 첫째 주일 오전 7시 30분에 주일 미사를 봉헌하고 미사 후 신자들이 돌아가며 떡과 차를 준비해 친교의 시간도 가진다. 또 매주 수요일 저녁 7시에는 공소 예절을 하고, 레지오 마리애 회합도 가지고 있다. 수도자들은 또 겨울과 같은 농한기에는 신자 가정 방문을 하면서 교우들과 함께 묵주기도를 하고, 점심을 함께하면서 부족한 교리를 교육한다.

 

 

활기 찾기 위한 노력들

 

인보성체수도회 수도자들은 2010년부터 공소 안에 아이들 공부방을 설치해 운영하고 있다. 저소득층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다. 수도자들의 헌신으로 장파리에 조금씩 그리스도교의 문화가 안착하고 있다.

 

이 마리아 막달레나 수녀는 “처음에는 대남방송 소리와 포 쏘는 소리, 탱크들이 도로 한쪽을 점령해 지나가는 모습에 간담이 서늘해지기도 했지만 여러 해 살다 보니 그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면서 “남북 관계가 좋아져 마을이 다시 활기를 띠었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장파리공소 신자는 현재 10명 미만이다. 이 수녀는 “코로나 팬데믹 이후 공소에 나오는 신자들이 줄어 안타깝다”면서도 “공소를 보존하고 신앙을 유지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문의: 070-8815-9142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1월 8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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