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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대구대교구 여성복자(복녀)들이 개척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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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9-11 ㅣ No.636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대구대교구 여성복자(복녀)들이 개척한 삶

 

 

대구대교구가 모시게 된 복자 20위 중 복녀가 3위 있다.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 구성열 바르바라와 이시임 안나이다. 그들의 이름이 길이 기록됨을 보면서 그들이 개척한 신고의 세월을 그려보게 된다. 그리고 그들 덕분에 우리가 싸우지 않고 누리고 있는 자유와 혜택을 감사한다. 1925년 시복식을 맞으며 당시 서울, 대구, 원산의 세 주교는 우리의 매일을 신앙으로 사는 일이 우리 시대의 치명이라는 공동발표를 했다. 이 말은 곧 복자들이 매일을 주님을 선택하며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그들이 당시 무엇을 선택했는지는 그들의 생활을 알고, 오늘날 그 삶의 변화를 알아야만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그들이 남겨놓은 신앙의 모범을 추적하는 길이다.



조선시대 천주교 신자란 누구인가?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시기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는 없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죽는 날이 같으면 대부분은 사고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복자들은 죽는 날을 함께 한 사람들이다. 죽음을 의지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대구대교구 복녀들은 모두 을해박해 순교자들이다. 김윤덕은 경상감영에서 마음이 약해져 신앙을 배반하고 나가다 다행히 김종한을 만나 마음을 다시 다잡고 되돌아와 그날로 옥사했다. 구성열은 식구들과 함께 잡혀와 신앙을 증거하며 17개월 옥살이를 한 뒤 대구 관덕당 형터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이시임은 동정녀로 살려고 했으나 길안내하던 뱃사공과 강제로 살게 되었다. 그는 구성열과 함께 옥살이를 하고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참수당했다.

김윤덕과 구성열은 청송 노래산, 이시임은 진보(영양) 머루산에 살고 있었다. 김윤덕은 상주가 고향이고, 구성열과 이시임은 현재 충남 예산군 고덕면 대천리와 몽곡리 출신이다. 문경새재를 넘던 시절이었으므로 태백산맥 줄기를 타고 이동하여 산속에 교우촌을 형성한 것이다. 이들은 산지를 개간하고 머루 다래를 따먹으며 신앙생활을 했다. 그러니까 이들은 자신들 당대에 신앙 때문에 고향과 자신들이 속한 사회를 떠난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이 부르시자 배를 물가에 놓고 따라 나선 베드로처럼 신앙을 알자 스스로 모든 환경을 바꾼 사람들이다. 물론 그들은 고향만 떠나온 것이 아니라 부모형제, 친척이 풍비박산난 가족들이다. 이시임의 경우 아버지는 교우촌에서 선종했고, 동생 이성삼은 1827년 정해박해 때 전주에서 옥사했다. 오빠 이성지도 8년 옥살이 뒤 전주에서 옥사했다. 또 그는 아들 박종악을 옥에서 잃었다. 구성열도 남편과 사위를 옥중에서 잃었다. 그러나 이들은 신자공동체를 이루며 가족처럼 살았다. 서로 협조했기 때문에 당시 교우촌은 극심한 궁핍 속에서도 그나마 먹을 것이나 잠잘 곳을 나눌 여유가 있었다.

한편 사회에서는 1801년 순조가 열한 살의 나이로 즉위하고 나서 바로 신유박해가 일어났다. 이후 홍경래 난 등 크고 작은 민란들이 이어지고 도적과 거지떼가 들끓었다. 게다가 1814년 전국에 기근이 들었다. 그러자 이전부터 교우촌을 드나들면서 구걸하던 전지수가 그 어줍지 않은 교우들 재산을 탐해 포졸들을 인도하여 1815년 부활축일에 교우촌으로 들이닥쳤다. 청송 노래산과 진보 머루산을 시작으로 안동 곧은정, 영양 우련전 등 행정명은 다소 다르지만 산으로 연결된 한 지역 교우촌이 습격당한 것이다. 진보에는 주로 충청도 출신이 많았는데, 그 중 원주사람 김강이가 있어 강원도 일부에도 박해가 미쳤다. 노래산에서는 40명이 체포되어 그 중 14명이, 머루산에서 체포된 23명 중 13명이, 영양에서 8명 중 6명이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즉 체포된 교우 71명 가운데 반 이상이 배교로 석방되고 남은 이는 33명뿐이었다. 그러나 그들도 대구에서 다시 12명이 배교하고 다른 이들은 옥사했으며 이시임 등 7명만이 목에 칼을 받았다. 순교에 이르는 숫자는 정말로 드문 숫자였다.


복녀들이 던진 충격

초기교회 신자들은 자신의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것만도 큰일이었다. 그들은 오로지 신앙을 위해 격리되어 살았는데도 그들의 삶은 전통사회 속에 변화의 씨앗을 뿌려나갔다. 더욱이 전통시대와 오늘날 여성의 생활을 비교하면 그 씨앗은 분명 ‘불 밝히는 심지’였다. 그 극소수의 신자들이 전통사회를 향한 충격파의 원점이 되었다. 신유박해 때 교회가 와해되고 나서 을해박해까지는 신자수가 몇 천 명 되지 않았다. 게다가 여성의 비율은 매우 적었다. 대구대교구 복녀의 비율은 15%이다. 이는 전체 124위 복자 중 여성이 19.3%(24명)에 이르는데 비하면 다소 낮은 편이다. 물론 현재 한국성인 103위 중 성녀의 비율이 45.63%(47명)인데 비하면 훨씬 낮다. 한편 대구의 복녀는 연령적으로 이시임 30대, 구성열 40대, 김윤덕 50대 가량으로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변혁의 불씨가 아주 작지만 골고루 뿌려진 것이다.

복녀들은 ‘본명’으로 살은 여인들이었다. 우리나라 문화에서 여성이나 양인이하 신분 등은 제대로 된 성명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또 여성은 이름이 있어도 아무개 부인, 아무개 엄마이지 자신의 이름으로 행세하지 못해 왔다. 그런데 신자들은 세례명을 받음으로써 자신이 살고 있던 사회에서 의미있는 존재로 새롭게 태어났다. 그들은 세례명을 본명이라 불렀고, 법적으로 정해진 사회이름을 속명이라 하며 생의 가치를 뒤집는 계기로 삼았다. 세례명을 받는 것은 신앙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일이며, 세속적 신분의 차이를 떠나 신앙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일이었다. 또한 자신들은 훌륭한 주보성인과 함께 한다는 데서 위로를 얻었고, 주보성인의 모범을 따르고자 노력했다. 이리하여 그들은 자존감을 인식해 나갔다.

대구 복녀들이 보여 주었던 신앙에 대한 고백과 순교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한없는 긍정이었다. 그들은 무지하더라도 천주의 가르침을 남과 똑같이 실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김윤덕은 체포되어 경상감영으로 이송될 때까지 수차례 질문받았다. “무식하기도 하다. 대관절 무엇 때문에 죽으려 하느냐?” 이 말에 그는 분명하게 대답했다. “아무리 비천하고 무식하다 하더라도, 조물주 천주의 은혜를 몰라보고 그 분을 배반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의 이 말은 천주의 자녀로서 태어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인정이었다. 자존에 대한 깨달음은 앞으로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에너지의 원천이 되었다.

복녀들의 자존감은 일상생활 안에서 자연스럽게 실천되었다. 이시임은 동정생활을 실천코자 했다. 천주교인들 사이에서 존중되었던 동정생활도 사회에는 낯선 충격이었다. 천주교에서 말하는 동정생활은 그리스도를 온전히 닮으려는 생활에 자신의 모든 시간과 육체를 바친다는 결심의 표현방법이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삶의 형태를 당시 사람들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물론 당시 동정생활은 여성에게 국한된 것만은 아니었고, 남성 중에도 동정생활을 한 이들이 있다. 하지만 여성은 동정생활을 통해서 남성으로부터의 독자적인 삶과 자립에 대한 자신감을 배웠다. 또한 남성과 대등한 인격체로서 남성과 조화를 이루는 방법도 배워갔다.

그리고 구성열은 재혼한 여성이다. 천주교 신앙공동체 안에서는 배우자가 죽은 뒤 재혼할 수 있었다. 조선왕조는 성립 때부터 과부재가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는 태종, 세종 때 논의를 거쳐 결국 성종 때 법으로 제정되었다. 과부재가금지는 재가한 여성의 자녀는 관리등용에서 제한한다는 규정으로 주로 양반 사족에게 적용되는 법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 제도는 모든 여성에게로 확대되어 갔다. 조선후기 실학자들 사이에서도 여성의 열녀관, 재가금지에 대한 반성이 일어났다. 이익, 정약용 등이 열녀제도를 비판했고 이긍익은 개가금지법의 개정을 주장했다. 1894년 동학도들이 과부의 재가금지에 대한 폐지를 공개적으로 주창했고, 이듬해 갑오개혁으로 이를 폐지했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는 이러한 윤리가 1950년대까지도 깊이 뿌리박혀 있었다. 그 와중에 천주교인들은 이미 1800년대 초엽부터 조용한 실천을 통해 재가금지의 부당성을 사회를 향해 외쳐주었다.


자신이 받을 처벌을 자발적으로 청하고…


대구 복녀들의 투철한 책임의식은 또다른 계기를 만들었다. 을해박해 순교자들은 약 1년 반 옥살이를 했다. 그들은 옥살이 중에도 심문을 당할 때면 배교를 유도받았다. 드디어 1816년 7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관덕당 형터에서 처형되던 순간이었다. 사형죄인 7명 중에서 마지막으로 여성신자 이시임과 구성열만 남았다. 관장이 다시, “너희들 여자야 무엇 때문에 죽으려 하느냐. 아직 늦지 않았으니 한마디만 하면 놓아주마.”라고 회유했다. 이 말을 두 사람은 단호히 물리쳤다. 그들은 “이 잠시 지나가는 목숨을 보존하려고 참된 생명과 영원한 행복을 잃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그들도 강인한 여인들만은 아니었다. 구성열은 삼모능장으로 맞아 거의 죽게 되었을 때 이를 벗어나고 싶어 했다. 다행히 그는 같이 잡혀 왔던 사위의 격려로 그 위기를 모면했었다. 그런 여인이 자신에게 배교하면 살려주겠다는 마지막 제의를 물리치고 형벌을 청해서 감당해 내었다.

조선사회에서는 신분제적 사고에 따라 “형벌은 윗신분에 미치지 않으며, 예는 아래신분에 미치지 않는다.(刑不及於上 禮不及於下)"라는 관행이 적용되고 있었고, 형벌이나 예법의 시행에 있어서 신분 및 남녀에 대한 차별이 존재했다. 그리고 조선의 법률제도에서는 여성들에게 처벌을 경감시켜 주기도 했다. 이는 여성이 법적행동의 주체로서 결격사유가 있다는 당시의 판단과 연관된 사실이었다. 이러한 때 천주교 여성들은 남성과 동등하게 법률행사와 적용의 주체로 떠오르고 있었다. 여성신자들은 자신이 체포되었을 때 처벌을 당당하게 수용함으로써 여성도 독립적 존재임을 드러냈다. 이러한 생활을 해 나오면서 여성은 남성과 동등하게 책임지는 방법을 배워갔다. 이 자의식과 책임감을 기반으로 하여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을 찾아갔다.

대구 복녀들은 그저 조용히 자신의 일상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살았다. 그런데 그 신선한 충격은 근대사상의 씨앗이 되었다. 조선후기는 서구문명과 서구세력에 본격적으로 노출되기 이전의 단계였다. 천주교에서 제시했던 여러 주장들은 당시의 기성관념을 깨뜨리는 참신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복자들이 넘어야 하는 어려움들이었고,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혜택이다. 한국사회에서는 근대화 시점을 서구문명이 이입된 시기로부터 잡는데 이는 분명 수정되어야 한다. 근대사상의 씨앗은 천주교 신자들이 전통사회와 부딪치면서부터 이미 배태되었다. 그리고 여성생활의 변화는 그때 벌써 예고되고 있었다.

[월간빛, 2014년 9월호,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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