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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광복 70년 분단 70년14: 북녘 기아사태와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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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12-14 ㅣ No.733

[사진 속 역사의 현장 광복 70년 분단 70년] (14) 북녘 기아사태와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이념 장벽 넘어 북녘 형제 손을 잡다



1998년 4월 북한 신의주와 잇닿아 있는 중국 단둥역에서 당시 서울대교구 한마음한몸운동본부장 오태순 신부가 굶주리는 북녘 형제들을 돕고자 기차에 옥수수를 실어보내며 축복식을 하고 있다. 평화신문 자료사진


1995년 7월 31일. 북한에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8월 18일까지, 19일간에 걸친 최악의 대홍수였다. 폭우로 북녘 전역의 3분의 1이 물에 잠겼다. 수확을 눈앞에 뒀던 벼와 곡물이 모두 침수돼 못 쓰게 됐고, 수많은 가축이 물에 떠내려갔다. 이재민만도 520만 명이나 됐고, 수백 명이 물에 휩쓸려 목숨을 잃었다. 겨우 살아남은 이들도 굶어 죽기 직전의 참상이 벌어졌다. 수인성 질환과 전염병도 문제였다. 사회간접자본도 대거 파괴됐다. 북한 땅의 4분의 1이 피해를 봤다는 보고도 나왔다. 피해액은 당시 북한 당국 추산 미화 150억 달러에 이르렀다. 당장 필요한 식량만도 150만t이나 된다는 보고가 잇따르자 세계식량계획(WFP)은 곧바로 평양에 들어가 미화 850만 달러 상당의 쌀과 식용유를 제공하기로 협정을 맺고 지원에 나섰다.

이에 앞서 서울대교구는 광복 50주년을 맞아 1995년 3월 1일 ‘교구 민족화해위원회’를 출범한다. 분단 50돌 3ㆍ1절을 제2의 3ㆍ1절로 삼아 제2의 광복을 앞당기겠다는 것이 당시 교구장 김수환 추기경의 의지였다. 이를 위해 교구 민족화해위원회는 3월 7일 명동성당에서 김 추기경 주례로 제1차 민족 화해 미사를 봉헌한 것을 시작으로 이 미사를 정례화했으며, 남북 간 일치와 화해를 위한 단식기도, 민족화해학교 개설, 민족화해 헌금 모금, 남북한 공동 기도문 작성 등을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기도와 교육, 나눔이라는 민족화해 사목의 골자는 이때 만들어졌다.


수해 소식에 북녘 형제 돕기 나서

- 1999년 당시 북한 보육원의 보모와 원아들. 북녘의 기근은 특히 어린이들의 영양실조와 발육부진을 불러왔다. 이 사진은 당시 북한을 방문한 홍콩 카리타스의 대북지원 실무책임자 캐시 젤버거가 촬영한 것이다. 평화신문 자료사진


북한 수해 소식을 접한 서울 민족화해위원회는 곧바로 북녘 형제들을 돕기 위한 캠페인에 나섰다. ‘북한 동포 돕기 100만인 서명운동’을 벌여 대한적십자사와 중국 천주교회를 통해 북한의 ‘큰물 피해 대책위원회’에 2억 4000만 원 상당 밀가루를 보냈다.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 한국 카리타스도 국제 카리타스를 통해 7609만 원 상당 식량을 지원했다. 두 단체의 선구적 대북 지원을 시작으로 한국 천주교회는 물론 국내 종교계와 민간단체들도 대북 지원에 나섰고, 정부도 인도적 지원을 외면하지 못했다.

서울 민화위는 대북지원과 함께 1995년 10월 미국 뉴저지에서 ‘민족 화해와 일치’라는 대주제로 남북 천주교인 간 첫 만남을 가졌으며, 이듬해 6월과 1998년 3월엔 중국 베이징에서 2, 3차 만남의 자리를 가졌다. 이 만남을 통해 쌓인 신뢰를 토대로 해방 이후 첫 사목적 평양 방문이 이뤄진다. 1998년 5월 당시 서울대교구 사회사목 담당 교구장 대리 최창무 주교와 사제단, 평신도들이 방북, 대북 긴급지원과 농업개발 협력 지원, 남북 천주교인 간 교류를 논의했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식량 부족

대북 지원은 이뤄졌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는 사실이 훗날 드러났다. 1995년 8월 대홍수 이후 2년 6개월간 수해와 가뭄, 기상이변에 따른 재해로 북녘에선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북한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세 번이나 지낸 황장엽은 2010년에 펴낸 회고록에서 “1995년에 당원 5만 명을 포함해 50만 명이 굶어 죽었고, 1996년 11월 중순까지 또 100만 명이 죽었으며, 1997년에도 100만 명이 죽었을 것”이라고 술회해 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했다.

1997년 당시 수해 복구 작업에 참여한 북녘 형제들. 일일이 삽으로 흙을 퍼 나르고 있다. 평화신문 자료사진


북한의 대기근은 1990년대 중반의 일로만 끝나지 않았다. 이후로도 산림 황폐화에 따른 연이은 수해와 가뭄, 계획경제 붕괴에 따른 경제난으로 북한은 해마다 식량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탈북 행렬 또한 줄을 이어 중국 동북 3성과 제3국으로 탈출한 난민만 수십만 명을 헤아렸고, 국내에 들어온 북한이탈주민도 지난 6월 말 현재 2만 8133명에 이르렀다. 이에 한국 천주교회는 1995년 이후 사랑의 국수 나누기 운동(1996년), 북한 동포를 위한 국제 단식 모금 운동(1997년), 북녘 형제 돕기 국수 나누기 운동(1998∼2000년), 겨울옷 보내기 운동(1998년) 등을 전개, 굶주리는 북녘 형제들과 연대했다. 2000년대 들어서도 황해도 신천의 농기계 시설 개선사업, 조선적십자병원 의료기계공장 건립, 북강원도에서의 슈퍼옥수수ㆍ씨감자 개발사업, 평양과 평안남ㆍ북도 일원에서의 의료용 백신ㆍ어린이 영양제 지원 등 개발협력과 의료지원 사업으로 확대해 나갔다.


인도적 차원의 대북지원 계속돼야

대북 지원이 10여 년간 이어지면서 ‘피로 현상’과 함께 사회 일각에선 ‘퍼주기’ 논란까지 벌어졌고, 급기야는 2010년 5ㆍ24조치와 함께 사실상 대북 지원이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다만 천주교회에선 한국 카리타스가 대북 지원 실무 책임 기구를 맡은 국제 카리타스를 통한 지원만은 해마다 꾸준히 실천해 왔다.

그러나 북의 식량난은 여전히 개선되지 않고 있다. 이는 유엔 식량농업기구(FAO)가 3일 발표한 ‘작황 전망과 식량 상황’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북한을 포함한 33개국을 ‘식량 부족 국가’로 지정한 데서 잘 드러난다. 보고서를 보면, 올해 북한의 식량 부족분을 42만 1000t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래서 교회 내에선 지금까지도 대북지원은 남북이 서로를 이해하고 교류의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되고 민족 복음화의 밑거름이 될 것이기에 굶주리는 북녘 형제들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계속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

 

 

“대북 지원은 화해와 일치의 원동력”

서울 민화위 설립 밑그림 그린 조광 교수


 

-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는 북녘 형제들을 돕는 것은 시혜가 아니라 우리의 의무”라고 강조하는 조광 고려대 명예교수. 오세택 기자


“남북이 어깨동무하려면, 대북 지원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진심이 통합니다.”

1995년 3월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를 설립하는 데 밑그림을 그린 주역 중 한 사람인 조광(이냐시오, 70) 고려대 명예교수는 “당시 교회가 제시한 ‘화해’라는 개념과 굶주리는 북녘 형제들에 대한 대북 지원은 1945년 분단 이후 처음으로 천주교회가 정부 대북 정책의 변화를 이끌어낸 첫 사례였다”고 평가했다.

특히 조 교수는 “분단 50돌을 맞아 제2의 광복을 이끌어내자는 취지로 김수환 추기경께서 서울 민화위를 설립한 그해에 발생한 수해로 대북 지원 캠페인이 대대적으로, 전국적으로 이뤄졌는데, 당시 식량난을 겪던 북한에 2년간 대한적십자사와 국제 카리타스를 통해 지원한 식량의 3분의 2가 천주교회에서 모금해 보낸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조 교수는 이어 “당시 3년간 대북지원을 하며 쌓은 신뢰 덕에 1998년 5월에 이뤄진 서울대교구 사회사목 담당 최창무 주교님의 역사적인 첫 사목 방북 직후 북측에 민족화해협의회가 만들어지고 남쪽에도 민족화해협의회가 만들어져 화해의 첨병 역할을 해냈다”며 “지금까지도 남측과 북측 민화협은 수시로 남북 대화의 창구가 되고 있다”고 상기시켰다.

“동ㆍ서독의 통일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지원은 화해와 일치를 이끌어낸 동력이 됐습니다. 보수진영에서 ‘퍼주기’라는 말을 흔히 쓰는데, 이 퍼주기를 통일 전 서독 정부와 서독 천주교회에서 얼마나 한 줄 아십니까? 통독 즈음에는 환율이 두세 배나 차이가 나는 양국 화폐를 1:1로 교환해 줄 정도였지요. 통독 전 서독의 지원액은 296억 마르크나 됐고, 이중 서독 교회(개신교 포함) 지원액도 56억 마르크나 됐지요. 서독 천주교회는 동독 성직자, 수도자들의 생활비를 다 댔어요. 대북 지원이 대단히 시혜적인 것으로 비치게 된 것은 일부 정치인들의 정치적 수사일 뿐입니다. 굶어 죽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은 우리의 의무입니다.”

조 교수는 따라서 “1990년대 중반 이후 계속된 경제난에 만성적 식량난을 겪는 북녘 형제들, 특히 영ㆍ유아나 노인, 병자, 장애인, 임산부 등 북녘의 취약계층에 대한 지원은 당분간 계속돼야 할 것으로 본다”면서 “북한 경제가 지금은 다소 나아지고 있지만, 자연재해로 북녘 형제들이 식량 위기에 처한다면 다시 도와줘야 한다”고 일깨웠다. 끝으로 “대북 지원은 굶주리는 북녘 형제들을 돕고 영적으로 연대함으로써 남북 간 화해와 일치, 형제애를 일깨운 계기였다”고 그 의미를 설명했다.

[평화신문, 2015년 12월 13일,
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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