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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문화 순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대구 수녀원 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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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9-27 ㅣ No.323

[박물관 문화 순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대구 수녀원 역사관 (상)

 

초기 대구지역 수도자들 삶의 모습 한눈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대구관구 구 성당(현재 역사관) 내부 모습.


우리는 가끔 현실의 삶에서 영적인 힘을 잃을 때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원한다. 그래서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한적한 곳을 찾아 나서기도 한다. 이런 분들을 위해 좋은 장소를 소개하고 싶다.

대구광역시 도심 문화 탐방 코스 가운데 골목투어 5코스에 들어있는 샬트르 성 바오로 대구 수녀원 역사관이다. 모원을 프랑스에 두고 있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한국에도 서울과 대구에 관구를 두고 있다. 특히, 초기 영·호남 수도회의 산 역사인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대구관구(이하 ‘대구 수녀원’) 역사관을 탐방함으로써 순례의 기쁨이 더 충만하게 될 것임을 확신한다.

올해는 대구에 수녀원이 설립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로서 대구 수녀원은 건물 자체가 문화재이며 역사와 유물을 통해 초기 대구교구 수도자들의 활동을 살펴보는 데 도움이 된다. 손때 묻은 유물들을 바라보며 하느님의 크신 섭리를 깨닫고, 그분과 함께 걸었던 작지만 큰 의미를 지닌 100년의 시간 여행이 되겠다. 이 여행을 시작하면서 먼저 언급할 대목은 대구교구 신설과 대구 수녀원 본원 설립 과정이다.

 

샬트르 성 바오로 대구 수녀원 역사관 내부 전시공간.

 

 

1911년 6월 11일 로마 교황청에서는 조선대목구(단일교구) 제8대 교구장 뮈텔 주교의 관할로부터 경상도와 전라도를 분리해 대구교구를 신설하고 제1대 교구장으로 드망즈 주교를 임명했다. 그리하여 조선의 단일교구가 서울교구와 대구교구로 분리됐다. 이에 드망즈 주교는 교구의 제반 시설을 완비하며 복음의 터전을 마련하고 이곳에서 봉사할 수녀들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드망즈 주교는 이미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을 이곳에도 오게 함이 좋겠다 하여 프랑스 샬트르의 총장 수녀에게 대구 수녀원 설립을 요청했다. 한편 대구교구 출범 후 드망즈 주교와 로마 교황청의 고위 성직자인 베이 드 베이야 주교 사이에 대구교구 내 수녀원 설립과 후원에 관한 구체적 협약이 체결돼 드망즈 주교는 1914년 6월 16일 프랑스 샬트르의 총장 수녀에게 수녀원 설립 허락을 공적으로 요청하면서 그 필요성과 연유, 건축 자금, 기타 계획에 관한 협약서의 사본을 동봉해 발송했다. 협약서 내용은 대구 수녀원과 대구교구 초기 역사에서 매우 중요하기에 다소 길더라도 인용하고자 한다.

 

<존경하올 총장 수녀님, 전교지에 알맞은 수녀원을 설립하여 수녀들을 일하게 하지 않고서는 저는 마치 발동기 없는 기계와도 같아서 자신에게 속한 여러 가지의 일을 잘 해낼 수 없을 것입니다. 15년 전에 부산에서 새둥우리를 마련할 테니 새들을 보내달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이에 다른 수녀회에서 오고 싶어 했습니다만 이 나라에 이미 오랫동안 갖은 고통을 감수하며 일해오고 있는 귀 수녀회에 미쁨(믿음직하게 여기는 마음)을 두기 때문에 이렇게 청합니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대구수녀원 첫 수녀들의 모습.

 

 

도쿄의 관구장 수녀와 서울의 원장 수녀에게 언약한 대로 대구수녀원 설립에 필요한 수녀를 주시면 그 수녀들이 도착하는 즉시 수도생활을 할 수 있도록 시설이 갖추어진 집과 땅을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이 땅은 대구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이고 주교관 바로 옆이라 수녀원 지도신부가 주교관에 유숙할 수도 있고, 또 큰 길이 옆에 없어서 조용하며 조건이 좋습니다. 수녀원 설계는 위의 두 수녀들의 의견을 따랐지만 수정할 것이 있으면 고쳐서 보내주십시오. 건축은 편리하고 견고하며 건강에 도움이 되도록 유의하였고, 앞으로의 사업 확장을 예견하여 터는 넓게 잡았으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교황청의 허락이 있으면 같은 나라에서도 두 수련원을 둘 수 있다고 했으니 대구 수녀원에 수련원 설립도 간청합니다.>

드망즈 주교는 초기 대구교구를 위해 수녀원 설립이 얼마나 중요하고 절실했으면 수녀들 없이 사목해야 하는 자신을 ‘발동기 없는 기계’와 같다고 표현했을까!

드망즈 주교 주도로 현재의 대구 수녀원 본원 건물(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4호)이 1915년 10월에 완공됐고 프랑스 수녀 1명과 한국인 수녀 3명이 이곳에 머물며 30명의 고아들과 함께 첫 사도직을 시작했다. 그리고 드망즈 주교는 10년 후에 지금의 역사관 건물인 성당(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3호)을 신축했다. 사실 두 건물은 어떤 유물보다 대구 수녀원의 귀중한 자산이다.

본원 건물의 양식은 유럽 중세 시대에 유행한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양식을 혼용한 것이다. 처음 지을 때의 모습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교회 건축사적으로도 높은 가치를 인정 받는다. 특히 옛 성당인 현재 역사관 건물의 평면구성은 남북이 긴 장방형이며 출입구는 남쪽의 아케이드를 향해 있다. 규칙적인 비례에 충실한 르네상스식 외관과 궁륭형 천정으로 마감한 고딕식 내부공간은 이 건물의 독창적인 양식으로서 대구지역의 천주교 역사와 함께 서구식 종교건축의 변천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역사관 관람시간은 매주 화요일~주일 오전 9시~11시30분, 오후 1시30분~4시까지며 월요일과 공휴일, 성삼일, 부활대축일 등에는 휴관한다.

※ 문의 010-2924-2646 샬트르 성 바오로 대구 수녀원 역사관 담당 [가톨릭신문, 2015년 9월 27일, 전종희 수녀(샬트르 성 바오로 대구 수녀원 역사관), 사진 샬트르 성 바오로 대구 수녀원 역사관 제공]

 

 

[박물관 문화 순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대구 수녀원 역사관 (중)

교육 · 의료 활동 자료에 담긴 수녀들의 선교 열정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대구 수녀원에서 수업을 담당했던 1939년 효성여자보통학교 국어시간 모습.

 

 

프랑스 샬트르의 작은 지방 러베빌에서 1696년 소수의 처녀들로부터 출발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여자 수도회로서는 처음으로 1888년 당시 조선의 제물포항에 첫발을 내딛고 서울에 둥지를 틀었다. 가난하고 피폐한 조선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 시작한 것이다. 27년 후 1915년에는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초대 대구교구장 드망즈 주교에 의해 초대돼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대구 수녀원(이하 대구 수녀원)이 설립됐다. 대구 수녀원의 설립과 더불어 시작된 수도자들의 생활 역시 희로애락이 함께하는 가운데 성장해 나갔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 안에서 수녀들은 닥쳐오는 여러 형태의 시련을 극복해 나가면서 대구교구(당시는 영·호남, 제주까지 관할)의 복음화를 위해 매일의 사도직 활동을 착실히 전개했다.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대구 수녀원 수녀들의 지난 100년간의 활동은 옛 사진과 수녀들이 사용하던 일상 용품, 성물, 유해 등 유물을 통해 대구 수녀원 역사관 안에서 살펴볼 수 있다. 역사관 소장품 중에서도 대구 수녀원이 전개한 교육과 의료 사업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들이 방문자들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백백합보육원 원아들과 그들을 돌봤던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대구 수녀원 수녀들의 모습. 연대는 확실치 않다.

 

 

특히 당시 수녀들이 봉사하던 학교는 주교와 신부만이 아니라 학부모들과 지역 사회인들의 호평을 받았다. 수녀들은 기도 시간과 수녀원 생활 외의 나머지 시간을 모두 아이들 교육에 정성을 쏟았기 때문이다. 다음의 인용 구절들은 이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대구교구 내에서 가장 잘 되어 가는 것은 확실히 여학교입니다. 이 학교를 이끌어 가고 있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한국인 수녀 4명은 놀라우리만큼 그들의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고 있습니다. 수녀들은 마치 학생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며, 학생들은 선생을 부모보다 더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수녀들의 학교가 이처럼 성공한 원인은 한국인들의 가정으로부터 수녀들만이 이런 교육을 하고 있고 또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받은 데에 있음이 분명합니다.”(1921년 대구교구 연보)

1915년 10월 대구 수녀원 설립과 더불어 고아원이 운영되면서 원아들을 위한 약국(요셉무료시약소)이 개설됐고 이로 인해 대구 수녀원 초창기부터 수녀들의 기본적인 의료 활동이 시작됐다. 이후 의료 사도직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수녀들이 가정방문을 통한 의료 활동을 시작한 것은 기록상으로 1928년부터다.

 

성요셉 진료소에서 사용한 주사바늘.

 

 

대구교구 드망즈 주교는 성직자들이 잇따라 사망하자 교구 내 성직자들을 위한 병원을 짓기로 결심하고 1931년 성직자들을 위한 의무실과 휴식처로 사용할 2동의 건물을 완성했다. 이 요셉무료진료소는 본래 성직자들을 위한 것이었지만 부수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약간의 치료와 약품을 제공하면서 많은 환자들이 몰려와 1년이 못돼 증축이 불가피해졌다. 이에 드망즈 주교는 일반 진료소에 적합한 새 건물을 짓기로 했다. 새 무료 진료소는 95평 건물로 1934년 7월 16일 축성됐다. 이와 같이 대구교구에서의 활발한 의료 활동은 실질적으로 수녀들에 의해 이뤄졌으며 많은 개종자와 영세자를 얻어 교회 내 선교활동에도 크게 공헌하게 됐다. 이 사실은 1929년 대구교구 연보에서도 증명된다.

“프랑스인 수녀 한 명과 조선인 수녀 한 명이 매일 읍과 촌락으로 환자들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이 활동은 아주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 같습니다. 작년 10월 중순부터 금년 6월 초순까지 1,893명의 환자들을 방문하였고 4명의 성인과 53명의 외교인 자녀가 대세를 받고 죽음을 맞도록 하였습니다.”

본 기고에서 잠시 대구 수녀원이 고아원을 운영한 사실을 언급했는데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915년 대구 수녀원 설립과 동시에 드망즈 주교는 그 당시 계산동본당 김보록 신부가 교우 가정에 위탁해 양육 중이던 고아 30여 명을 수녀들에게 다시 위탁했다. 아이들의 방이 마련되지 않아 수녀원 내의 작은 방에서 양육하기 시작한 것이 보육원 설립의 시초다. 수녀들은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1925년 백백합보육원 건물을 지어 아이들을 계속 돌봤다.

아이들의 수가 점점 증가해 1947년에는 250명이 됐고, 6·25 후에는 400명의 아이들을 수용했다. 수녀들의 헌신적인 돌봄에도 불구하고 많은 아이들에게 심리적인 보살핌이 필요함을 느껴 영아만 양육하기로 하고 6세 이전의 아이들은 홀트 아동복지회를 통해 외국으로 입양 보냈다. 그리고 남은 일부 아이들은 고등학교 교육과 기술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배려했다. 그 후 보육원 고아들의 수가 점점 줄어들어 1988년부터 1991년 2월까지 ‘일시 보호소’로 운영하다가 1991년 3월부터 이 지역의 영세민 자녀들, 맞벌이 부부의 자녀들, 다문화 자녀들을 대상으로 하는 현재의 ‘백합어린이집’으로 역사가 이어지고 있다.

수녀들의 모든 활동 안에 함께 해 주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

※ 문의 010-2924-2646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대구 수녀원 역사관 담당 [가톨릭신문, 2015년 10월 11일, 전종희 수녀(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대구 수녀원 역사관), 사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대구 수녀원 역사관 제공]

 

 

[박물관 문화 순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대구 수녀원 역사관 (하)

구리줄 수작업 묵주에 깃든 ‘섬김 · 기도의 삶’

 

 

종신서원자가 수도복 허리 끈에 걸고 다니던 두 개의 5단짜리 묵주. 첫 서원, 종신서원 때 받았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대구 수녀원 설립 100주년을 맞는 올해에 대구 남산동에 위치한 대구관구 수녀들은 초창기의 힘들었지만 열정으로 가득했던 날들을, 소박하지만 위대한 유산인 유물들을 통해 다시 한 번 느껴본다.


대구 수녀원 역사관의 유물은 지금은 지나간 역사에 불과하지만 옛것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그 속에 담겨진 정신들을 이어가게 하고 역사의 흐름 속에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게 한다. 특히 역사관 유물 중에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의 수도복은 아직도 그 수도복을 기억하는 연로한 어르신들에게 당시에는 신기한 복장인 검은 수도복 수녀들을 떠올리게 한다.

두꺼운 흰 광목천에 풀을 먹여 빳빳한 모자처럼 생긴 코르넷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시선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버스를 탈 때 머리에 높게 올려진 코르넷은 옛날 낮은 버스 천정에 닿을 듯했고 붐비는 사람들 틈에선 상당한 불편을 주위에 주었다. 비 오는 날이면 풀 먹인 코르넷이 비를 맞아 축 처지기도 해 수녀들은 검은 우산을 늘 지니고 다녀야 했다. 그러나 전례 때에는 코르넷이 머리 정수리 위로 모아진 형태에서 아래로 내려졌다. 주변을 향한 시선을 하느님께 집중시키고 내외적으로 침묵하기 위함이다. 일하거나 길을 갈 때는 위로 올려 보행하는 데 불편하지 않게 사용했다.

옛 수도복에서 볼 수 있는 것이 또 하나 있다. 수녀들은 수도복 허리에 검은 묵주 10단을 걸고 다녔다. 첫 서원자는 구리 십자가가 달린 5단 묵주를 허리에 걸고 다녔고 종신 서원자는 묵주알 십자가가 달린 묵주 5단을 더 첨가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무게와 어찌 비교할 수 있을까! 검고 굵은 묵주 알이 수녀들이 걸을 때 사각사각 소리를 내어 지나가는 행인들이 듣고 수녀들의 존재를 의식하곤 했다. 당시에 이 묵주는 수녀들이 손수 만들었는데 만들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굵은 구리줄을 비틀어 고리를 만들고 묵주 알을 연결하느라 손끝이 부르트고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모든 것을 수작업으로 해야 했던 시절이지만 한 알 한 알 엮으며 수녀들은 기도 속에 수많은 영혼들을 하느님께 의탁한 유물이기도 하다.

생계 유지를 위해 보리베기 하는 수녀들.


유물들은 단순히 지나간 세월들을 보는 것으로 끝나게 하지 않는다. 늘 기도하며 일했던 수녀들에게 힘겨운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노동 또한 필수였음을 한 장의 옛 사진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수녀원 농장에서 보리를 수확하는 수녀들의 사진이다. 일제 강점기, 해방, 한국전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수많은 고아들과 함께 어려운 시절을 넘겨야 했던 수녀들에게 노동은 생활의 한 부분일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을 회상하는 구순의 노 수녀는 어려웠던 수녀원 살림을 옛 사진 한 장에서 떠올렸다. 우물이 수녀원에 하나밖에 없어 수많은 아이들과 함께 우물 하나에 의지해야 했다. 보리타작으로 몸속에 들어간 보리 검불을 씻어내지 못할 만큼 물이 부족해 참고 밤을 지내던 추억을 이야기하며 미소 짓는 모습이 가난함이 곧 불행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포기할 수 없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느끼게 한다.

 

용기를 잃지 말고 선한 일을 하도록 재촉하시는 하느님의 사랑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역사관 맞은편에 자리한 양수탑이다. 1950년 무렵에 지어진 외부 유물이라 할 수 있는 양수탑은 지금도 튼튼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탑 형식의 구조물이다. 당시 수녀원 내에는 우물이 하나뿐이었기에 물 부족이 심각했음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지대가 높아 수도가 들어오지 못하는 상황인데다 매일 나오는 수많은 보육원 아이들의 빨랫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수녀들은 매일 빨래거리를 싣고 10리나 떨어진 시냇가에 가서 빨래를 해서 그곳에서 일부 말려 저녁에 가져와 아이들에게 입히고 아침에 다시 그곳으로 가서 빨래를 하는 일을 되풀이해야 했다. 이 사정을 안 당시 미국인 군종 신부가 수녀들의 선한 일에 자신의 선한 마음을 보태줬다. 우물을 파서 그 위에 높은 탑처럼 만들어 펌프를 이용해 물을 끌어올려 탑에 물을 저장한 후에 필요시에 쓸 수 있도록 높은 저수조를 만들어 수녀들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었다. 오늘날에는 그 양수탑이 꼭 필요하진 않지만 허물지 않고 잘 보존해 둔 것은 타인의 어려움에 그냥 지나치지 않았던 한 사마리아인의 행적을 남겨 둠으로써 무관심으로 지나치기 쉬운 우리들에게 멈추어 생각하고 묵상하게 하려는 것이다.

수도자들의 힘겹지만 보람된 일상을 간직한 양수탑. 우물을 파서 물을 저장하는 장치였다. 멀리 보이는 건물이 역사관이다.

 

 

유물은 결코 과거의 가치만을 지니는 것이 아님을 확신한다. 이것 외에도 서원 때 수녀들이 머리에 쓴 화관, 서원기도문 등을 역사관 전시대에서 볼 수 있다. 라틴어 서원문답을 한글로 번역해 와 강의해 주었던 최덕홍 주교님(전 대구대교구장), 한글 서원문답으로 수녀들의 서원 준비를 도왔던 그분의 사랑을 서책을 통해서 오늘날에도 전달받는다.

그리고 또 하나 마음의 보물이 있다. 한국전쟁 중 북한에 납치돼 ‘죽음의 행진’을 하다 순교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첫 한국관구장 베아트릭스 수녀의 친필 편지다. 프랑스인으로 어렵게 한글을 배운 베아트릭스 수녀가 1944년 첫 서원을 준비하고 서원을 청하는 어린 수녀에게 보낸 한글 편지 진본이 있다. 서툴고 문장 연결이 안 돼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지만 한글로 또박또박 적은 답서다.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사랑하올 베로니카 수녀에게 답서. 허원 달라는 편지를 잘 받아 보았소 <중략> 순명, 겸손, 인내 그리고 많이 사랑하시오 <중략> 강복 신공도 받으시오.>

역사관의 유물은 단순히 눈으로 볼 수 있는 옛것이 아니다. 그 유물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그 주인들과 교감하고 이야기하고 그 시대와 호흡을 같이 하게 만든다. 유물의 숨은 이야기를 가슴으로 느껴 역사의 장으로 들어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 문의 010-2924-2646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대구 수녀원 역사관 담당 [가톨릭신문, 2015년 10월 18일, 전종희 수녀(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대구 수녀원 역사관), 사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대구 수녀원 역사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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