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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마산교구에 이바지한 인물: 대목구장 주교가 된 제르만 무세, 애잔한 신부 모리스 카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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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4-02-12 ㅣ No.1648

[마산교구에 이바지한 인물] 대목구장 주교가 된 제르만 무세, 애잔한 신부 모리스 카넬

 

 

제르만 무세 주교

 

 

제르만 무세(Germain Mousset / 문제만 1876~1957)

 

무세는 1876년 9월 프랑스에서 태어나, 1900년 6월 24일 파리외방전교회 사제로 서품되었다. 한 달 남짓 지난 뒤 1900년 8월 1일 조선에 입국하여, 이듬해 1901년 4월 제주에 부임했다. 제주에는 라크루 신부가 먼저 사목하고 있었고, 무세 신부가 사목을 분담했다. 그는 5월에 제주에서 일어난 신축교안을 통해 교우들이 무참히 살해되는 장면을 생생히 목격했다. 뮈텔 주교에게 제주에 더 있고 싶지 않다는 뜻을 전했다. 1902년 4월 서울에서 피정을 마친 무세 신부에 대해 뮈텔 주교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오늘 나는 다케 신부를 무세 신부의 후임으로 제주도에 임명했다. 무세 신부가 제주도에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표명했기 때문이다. 그는 타케 신부를 대신해서 마산포로 가게 될 것이다.”

 

 

제주의 참혹한 학살을 뒤로하고

 

초기 제주에는 활발한 선교활동을 하여 1901년 초에 영세자 240여 명, 예비신자 700여 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렇게 신앙의 불길이 번져가고 있을 때 신축교안이 발생하였다. 중앙 정부에서 파견한 관리가 세금을 부당하게 걷고, 세금징수원으로 고용된 천주교인들이 연루되어 반감을 일으켰다. 외국 선교사들이 방관했다는 점도 있었고, 토착 신앙과 민간 풍습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한 점도 반감을 증폭시켰다. 이로 인하여 신자는 물론 양민까지 포함하여 700여 명이 관덕정 광장에서 학살당하는 참극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때 순교한 신자들의 시신이 화북천 주변에 마구 묻혀 있었는데 1903년 조정에서는 아라동 부근 황무지를 매장지로 결정하여 옮겨 묻도록 하였다. 이곳이 현재의 황사평성지이다.

 

견딜 수 없는 고통에 놓여 있던 무세 신부는 제주 사목 일 년을 뒤로하고, 1902년 4월 20일 마산포본당에 부임했다. 당시 교인은 26명이었다. 그가 부임하여 열심히 사목했다. 그해 8월 뮈텔 주교는 마산포본당을 처음으로 방문했다. 인근 지방에서 온 40명가량의 교우들에게 성사를 주었다. 성모몽소승천첨례에 성당으로 쓰이는 신부의 조그만 방에서 영성체자가 40명이나 되었으니 보통 일이 아니라고 뮈텔 주교는 일기에 적었다. 다음해에도 뮈텔 주교가 방문하여 견진성사를 집전하게 되었다. 조선대목구장인 뮈텔 주교가 교우가 많지도 않은 신생 본당에 정성을 기울였다. 제주에서 큰 상처를 입었던 무세 신부에게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무세 신부는 제주에서 겪은 트라우마를 극복하며 마산포를 개항지에 적합한 본당으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제르만 무세 주교 묘

 

 

사목지의 확장에 몰두

 

타케 신부의 초가집 성당은 교우들이 미사 참례하기에 매우 협소하여, 무세 신부가 사제관을 따로 지어 나가며 넓히게 되었고, 지금 성지여고 내에 있는 요셉성당이 지어질 때까지 수리를 반복하며 그 자리에서 사용되었다.

 

타케 신부가 그랬듯이 무세 신부도 인근 논밭을 차례로 매입했다. 1907년 무세 신부의 편지를 보면 성지여고가 있는 터는 무세 신부가 맨 마지막에 샀다. “주교님께 말씀드렸던 논들은 아직 팔리지 않았습니다. 논은 두 필지인데 하나는 1,000원이고 또 하나는 800원입니다. 이 땅들은 한 덩어리이고 교구 논들 옆에 있습니다. 주교님께서 당장 전액을 주시기 어렵다면 위쪽 필지만이라도 살 수 있도록 800원만이라도 마련해 주실 수 없을까요?” 뮈텔 주교가 1,800원을 지원했다.

 

마산포에 개신교가 들어와 확산되고 종교 간의 갈등을 겪으면서도 무세 신부는 사목지의 확장에 몰두했다. 무세 신부는 교우들의 헌금으로 1910년 학교를 세워 ‘천주교 성지학교’로 이름을 붙였다. 이듬해에 총독부 인가를 얻어 50여 명의 학생들이 초등교육을 받게 되었다. 

 

 

제2대 대구대목구장 주교로 착좌

 

1911년 4월 8일 대구대목구가 서울로부터 분할되어 설정되었다. 이때 무세 신부는 교구청 당가 신부로 소임을 맡으며 마산을 떠났다. 이후 샬트르성바오로수녀원 초대 지도 신부, 효성여자보통학교 초대 교장, 효성유치원 초대 원장 등을 거쳤다.

 

드망즈(안세화) 주교 선종 후, 1939년 5월 제2대 대구대목구장으로 주교로 서품되고 착좌했다. 그러나 일제는 모든 외국인 교구장에게 1940년까지 사표를 쓰도록 강요했다. 이에 1942년 7월 무세 주교는 교구장직에서 사임하게 되고, 일본인 주교가 교구장으로 착좌했다. 제르만 무세는 1949년 4월 잠시 프랑스에 귀국했다가 다시 돌아와, 1951년 포항 성모자애원을 경영하였고, 그 후 파리외방전교회 한국관구장을 맡아 일했다. 24세에 조선에 입국하여 사목하였고 무엇보다도 교육에 힘을 쏟은 무세 제르만 사제는 1957년 6월 8일 선종하여 대구대교구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모리스 카넬 신부

 

 

모리스 카넬(Maurititus Canelle / 간홍모 1884~1918)

 

모리스 카넬은 1884년 출생하여 1910년 9월 파리외방전교회에서 사제로 서품되어 1911년 1월 4일 27세 나이에 선교사로 조선에 오게 되었다.

 

1911년 4월부터 무세 신부의 뒤를 이어 마산포본당에서 사목하였다. 카넬 신부는 어려운 여건을 견디며, 성당 곁에 성모 발현지 루르드의 동굴을 본떠서 만드는 등 교우들의 신심을 위해 힘썼다. 1912년 1월에 대구대목구 새 교구장 드망즈 주교가 마산포본당에 첫 사목방문을 왔다. 교우들의 일상적인 일 외에도 관할구역의 학교문제 등을 논의하며 관심을 기울였다. 드망즈 주교는 간홍모 신부와 함께 소촌본당(현 문산본당)도 방문했으며, 그 후에도 여러 차례 마산포본당을 방문하여 사목을 도왔다.

 

1914년 5월 3일 간홍모 신부는 전남 목포본당(현 산정동본당)으로 이동하였다. 그곳에서 불과 5개월이 지난 10월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에 동원되어 프랑스로 귀국하였고, 1918년 베르덩 전투에서 전사하여 짧은 삶을 마감했다.

 

▶ 참고 : <천주교마산교구40년사> <삼천포본당50년사> <완월동성당120년사> <뮈텔 주교 일기> 천주교대구대교구 자료, 천주교제주교구 자료, 천주교광주대교구 자료

 

[2024년 2월 11일(나해) 연중 제6주일(세계 병자의 날) 가톨릭마산 4-5면, 황광지 가타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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