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8일 (토)
(백)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한국ㅣ세계 교회사

[세계] 편협과 관용의 차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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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10-09 ㅣ No.639

[세상 속의 교회읽기] 편협과 관용의 차이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은 오래된 영화 ‘천 일의 앤’을 기억할 것이다. 혹은 이 영화를 보지 못했다 하더라도, 음악 애호가로서 영화 주제곡의 애잔한 선율에 귀 기울인 이들이 아마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큰 축을 이루는 인물은 16세기 영국의 왕 헨리 8세와 왕비 앤 볼린이다. 실제로 이 두 인물은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도 어마어마한 파문을 일으켰다.


유럽 대륙에서 1517년에 마르틴 루터가 교회의 개혁을 부르짖으며 가톨릭교회의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리고 유럽 대륙에 인접한 섬나라 영국에서는 교회가 로마의 교황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그 200년 전부터 있었다(위클리프). 그러한 움직임은 헨리 8세 때에 이르러 겉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 계기는 헨리 8세의 이혼 문제였다.

그런데 헨리 8세는 진심에서였든 아니면 정치적인 의도에서였든 간에, 개인적인 일로 가톨릭교회와 등지기 전까지는 교회에 충실한 편이었다. 교회에서 갈라져 나온 루터를 비난하고 그의 주장을 반박하는 글을 써서 레오 10세 교황으로부터 ‘신앙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을 정도였다(1521년).

헨리 8세는 애초에 과부가 된 형수 캐서린과 결혼하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궁정 시녀인 앤 볼린을 좋아하게 되었다. 끝내는 앤과 결혼하기 위하여 당시 교황이던 클레멘스 7세에게 캐서린과의 혼인을 풀어 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교황은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1534년에 헨리 8세는 자신의 영토에서는 국왕인 자신이 교회의 유일한 수장이라고 선언하며 로마 교회와 결별하였다. 그러고는 자신이 영국의 주교들을 임명하고 모든 성직자들을 국법 아래 종속시켰다. 전에는 교황의 수위권에 대한 비판을 이단으로 규정하던 사람이 이제는 이러한 도전을 이단이라고 규탄하지 않았다.

이러한 헨리 8세의 행보를 두고 일부 고위 관리들과 성직자들은 교회법상 문제가 있다며 반대하였다. 로마의 바오로 3세 교황은 이듬해인 1535년에 헨리 8세를 파문하였다. 이에 맞서 헨리 8세는 독일의 일부 세력과 연대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독일에서도 헨리 8세의 재혼을 승인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시도는 성사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헨리 8세는 고집스럽게 자신의 주장을 밀어붙였고, 마침내 가톨릭교회로부터 완전히 이탈하여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되었다. 이후 영국의 교회는 우여곡절을 겪다가 엘리자베스 1세 여왕 때 국운이 융성해지면서 일단 안정을 찾아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중간쯤 되는 중도적 방향을 걷게 되었다. 그리하여 영국에는 독특한 개신교인 영국 국교회(성공회)가 자리 잡게 되었다. 또한 그런 흐름 속에서 스코틀랜드에는 칼뱅주의가 널리 퍼졌고, 아일랜드에서는 가톨릭교회가 그대로 유지되었다.


‘영국과 웨일즈의 순교자’ 40명 시성

이 과정에서 헨리 8세의 행보에 동조하지 않은 가톨릭 신자들 다수가 희생당하였다. 대표적인 인물이 토마스 모어 성인이다. 뛰어난 정치가요 법률가이자 인문주의자요 신앙인이던 그는 탁월한 수완과 식견으로 헨리 8세의 신임을 얻었고, 여러 요직을 거쳐서 대법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왕의 이혼에 끝내 동의할 수 없어서 관직에서 물러났다. 결국 왕의 분노와 노여움을 산 그는 1534년에 반역죄로 투옥되었다가 1535년에 단두대에서 처형당하고 말았다.

이때부터 영국에서는 가톨릭 사제로서 봉직하는 것이 일종의 범죄였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의회를 시켜서 미사를 드리는 행위 자체가 사형을 받을 수 있는 반역행위라고 선포하게 했다. 이 무렵에는 토마스 모어의 경우처럼 단칼에 죽이지 않고 고문을 가하면서 천천히 죽였다. 대개는 목숨이 붙어 있는 동안에, 군중이 지켜보며 비웃는 가운데 배를 갈라서 내장을 끄집어내어서는 토막 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반역자’들의 후손이나 친척은 유산 상속권을 박탈당했다. 가톨릭 신자 집안의 토지는 왕실 재정에 귀속되었다.

역사 기록을 보면, 헨리 8세의 강제 시행으로 영국이 새로운 프로테스탄트 국가가 되었으나 영국의 국민들 대부분은 적어도 한 세대 동안은 가톨릭 신앙을 고수했다. 그들은 그동안 교육과 진료를 무상으로 제공해 온 수도원들이 탐욕스러운 귀족들의 손에 강탈당하고, 교회의 전례와 성사가 훼손되고, 소위 ‘사제 사냥꾼들’과 정부의 관리들이 새 종교를 강요하는 데에 분개했다. 반란에서부터 국외 이주에 이르기까지 대중적 저항이 다양한 형태로 일어났다.

그러나 국민의 주된 저항은 주일에 새로운 프로테스탄트 예배에 참석하지 않고 집에 머무는 것이었다. 이에 왕은 관리들에게 예배 참석을 독려하도록 지시했고, 매주일 국교회 예배에 충실하게 모습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세금을 점진적으로 무겁게 부과했다. 결국 국교회의 예배에 참석하지 않은 ‘국교회 거부자’들은 과중한 세금 때문에 가난해졌다. 그럼에도 가톨릭 신자들 중에는 자기 집에 비밀스런 방을 정교하게 만들어 남몰래 활동하는 사제들을 숨겨 주기를 서슴지 않았다.

이렇듯 적극적으로 또는 소극적으로 가톨릭 신앙에 충실하다가 종교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살해된 수백 명의 순교자들 중에서 40명이 순교한 지 400여 년이 지난 1970년 10월25일에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영국과 웨일즈의 순교자’라는 이름으로 시성되었다. 


와 같지 않은 이들과 공감하고 존중하며 대화하라

한편, 온건한 칼뱅주의를 표방한 영국 왕실의 개혁이 철저하지 못하다며 불만을 품은 청교도들은 국교회 내에 존재하는 가톨릭적인 제도와 전례 일체를 배척하며, 칼뱅주의에 입각한 투철한 개혁을 주장하였다. 이 움직임의 세력이 점점 커지면서 1649년에는 국왕과 맞서는 청교도 혁명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 혁명을 계기로 해서 많은 프로테스탄트파가 생겼고, 이때 생긴 여러 분파들을 근간으로 해서 오늘날 미국의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이어 온다.

종교개혁자들이 표방한 명분 중 하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 삶의 실천이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 후예들은 ‘진실한 삶’을 객관적이기보다는 다분히 주관적인 잣대로 판단했다. 그 잣대로 가톨릭교회는 지난 수세기 동안 참으로 편협했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그 ‘편협한’ 가톨릭교회의 신자들은 상대적으로 ‘관용적인’ 사람들의 나라 영국에서 19세기 중반까지 대학에 출석할 수조차 없었다. 미국에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아서, 하버드대학교 신학부에 가톨릭 교수가 임용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였다.

최근에 있었던 교황의 방한은 우리에게 잔잔하면서도 깊은 감동을 남겼다. 떠들썩하고 거창한 것을 선호하는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결코 요란하지 않은 가운데서 큰 울림을 느꼈고 받아들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민이 공감한 것과는 다른 감정과 정서를 보인 이들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교황께서 명동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던 날, 성당 들머리에서는 한 무리의 형제들이 교황을 반대하는 구절을 적은 팻말들을 들고서 소리 지르고 나팔을 불어댔다. 비가 내리는데도 그들이 길거리로 나온 것 또한 신앙심의 발로이겠지만, 나와 같지 않은 이들과 공감하고 존중하며 대화하라고 조근조근 이르는 교황의 가르침보다 그들의 소리가 결코 크지는 않았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4년 10월호, 이석규 베드로(CBCK 교리교육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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