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8일 (토)
(백)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가르멜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55: 성녀 소화 데레사의 영성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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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7-04 ㅣ No.815

[가르멜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55) 성녀 소화 데레사의 영성 ⑦


영적 어린이는 순수하고 속 깊은 사랑을 사는 사람

 

 

- 영적 어린이는 순수한 사랑을 사는 사람이다. 그림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

 

 

속 깊은 잔잔한 사랑

 

지난 호에서 우리는 소화 데레사의 영적 어린이 길의 특징으로 사랑의 길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소화 데레사가 추구했던 사랑의 색깔은 다른 성인들과는 좀 달랐습니다. 대(大) 데레사처럼 열렬하고 뜨겁고 감동적이고 어쩔 줄 몰라서 주체하지 못하는 그런 사랑이라기보다는, 은근하고 수줍어하면서도 속 깊은 사랑, 자신의 사랑이 뜨겁다고 티를 내진 않지만, 그 마음속에는 누구보다도 큰 사랑, 동시에 일상적인 삶 속에 뿌리내린 잔잔한 사랑을 소화 데레사는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소화 데레사는 위대한 성인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위대한 일을 했지만 아주 미소한 영혼에 지나지 않는 자신은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자신을 “그분 마음대로 하시도록” 내어놓을 뿐이라고 겸손되이 자신의 사랑에 대해 말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하느님께서 모르신다 해도 가장 큰 고통을 참아 견디는 것을 기쁘게 생각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분께 일시적인 영광을 얻어 드리기 위해 고통을 참아 받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사소한 행동 하나를 통해 하느님의 입술에 미소가 스칠 수 있게 하는 것만으로도 족하다고 성녀는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보다, 아기 예수님의 손에 놓인 쓸모없는 장난감이 되는 게 꿈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섬세함

 

이런 이야기를 하는 소화 데레사를 알면 알수록 정말이지 깜찍한 성녀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너무도 깜찍하고 귀여운 아가, 엄마의 마음을 사로잡을 줄 아는, 그러면서도 엄마의 속을 헤아릴 줄 아는 영민한 아가! 아마 하느님께서는 소화 데레사를 그렇게 보지 않으셨을까 싶습니다. 

 

한여름에 더워서 땀을 흘리거나, 겨울에 너무 추워서 힘들 때에도 소화 데레사는 하느님이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실 틈을 안 주려고 몰래 살짝 얼굴을 훔치거나 손을 비비는 섬세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수도회 규칙에 규정된 고행을 할 때에도 성녀는 미소를 지으려 노력했습니다. 둘째 언니인 아녜스 수녀가 왜 그랬냐고 물어봤더니, 하느님께서 자기 표정에 속아 자신이 괴로워하는 것을 못 알아보시게 하려고 했답니다. 

 

성녀는,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줄곧 당신께 달려가 여기 이 지상에서 지내는 것이 괴롭다고 말씀드리지 않아도 우리가 지상에 남아 시련의 시기를 다 채우도록 두셔야 하는 것만으로도 여간 괴롭지 않으시니, 괴로운 기색을 보여 드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지긋이 헤아리는 섬세한 여인의 마음 씀씀이를 읽을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런 성녀의 마음은 천국에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훗날 천국에 갔을 때, 만일 그곳에 오래전부터 자신이 바랐던 게 아무것도 없다 하더라도 성녀는 실망하는 티를 내지 않도록 조심할 거라고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께서 그런 티를 못 알아채셔서 마음이 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행위의 가치를 결정짓는 순수한 사랑

 

그런데 이런 속 깊은 사랑은 또한 순수한 사랑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성녀는 대성당을 세우고 싶어 한 옛날 어느 지체 높은 성주 이야기에 빗대어 순수한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 성주는 자기 혼자서 굉장히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당을 지었다는 명예를 차지하기 위해 그 어떤 신하도, 백성도 헌금하지 못하도록 포고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성당이 건축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어느 가난한 할머니가 돌을 운반하는 말이 힘들게 언덕을 올라가는 것을 보고 속으로 이렇게 혼자 생각했습니다. “이 하느님의 성전을 짓는 데 헌금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지만, 그래도 여기에 뭔가를 바치면 좋겠다. 이런 큰일을 위해 아무 생각도 없이 수고하고 있는 저 동물들을 내가 도와준다면, 아마 하느님께서도 기뻐하실 거야.” 그래서 이 할머니는 마지막 남은 몇 푼으로 마른 풀 한 단을 사서 말에게 주었답니다. 

 

성당 건축 공사가 끝난 후, 성주가 축성식을 거행할 때가 되자 자신이 이 성당 건축을 위해 많은 재물을 기증했음을 오래도록 증명하기 위해 머릿돌에 자기와 자기 가족의 이름을 새기게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음 날 보니 그 이름은 지워지고, 거기에는 무명의 가난한 부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주는 화가 나 몇 번이고 자신의 이름을 새겼지만, 번번이 그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성주는 그 이름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수소문해서 데려오도록 명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그 할머니를 데려오자 성주는 혹시 성당을 짓는 데 무엇을 바친 것이 없는지 캐물었습니다. 할머니는 무서워서 아무것도 없다고 대답했지만, 성주가 거듭 캐묻자 마른 풀 한 단이 기억나서 돈을 내는 게 금지되어 있어서 말이 마른 풀을 조금 먹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을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성주는 어째서 그 가난한 할머니의 이름이 새겨졌는지 깨달았으며 그 후로는 아무도 감히 그 이름을 지우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렇듯 순수한 사랑으로 한 아주 작고 감춰진 행동이 오히려 위대한 업적보다 더 가치 있다고 소화 데레사는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행위의 규모가 아니라 거기에 담긴 사랑의 순수함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하느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순수한 사랑으로 일상의 작은 일들을 하는가가 일의 규모와 상관없이 그 일의 가치를 결정짓는다고 성녀는 가르칩니다. 

 

이처럼 성녀가 말하는 사랑은 작고 일상적이지만 아주 순수하고 속 깊은 사랑이었습니다. 소화 데레사가 초대하는 영적 어린이가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평화신문, 2016년 7월 3일, 윤주현 신부(대구가르멜수도원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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