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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사목] 평신도의 분열: 갈등을 넘어 친교와 성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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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7-29 ㅣ No.858

[증언, 한국교회의 과제] 평신도의 분열


갈등을 넘어 친교와 성숙으로



평신도의 소명과 책임

남미에서 선교할 때, “교회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평신도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대답은 “우리가 교회입니다.”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교회다.’라는 의식을 갖고 있는 평신도, ‘나’보다 ‘우리’, ‘공동체’라는 개념이 먼저 자리 잡고 있는 평신도들을 만나면서, 문득 한국교회의 평신도들도 이 말에 선뜻 동의할 수 있는지 자문해 본다.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계기로 ‘제도적 교회’로부터 ‘친교의 공동체’, ‘친교로서의 교회’로 새롭게 이해하는 변화가 일어났다. 성직자 중심의 수직적 교회 구조에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하느님 백성’의 수평적 교회 모습으로 전환한 것이다. 이에 따라 평신도의 역할과 위상도 교회 안에서 크게 변화하였다. 단지 지배받고 명령에 따르는 수동적 객체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움직이고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깨닫는 가운데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독립된 주체로서 자각하게 된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헌장’ 31항은 평신도들의 사도직 소명에 대해서 이렇게 지적한다.

“평신도들의 임무는 자기 소명에 따라 현세의 일을 하고 하느님의 뜻대로 관리하며 하느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것이다. 평신도들은 세속 안에서, 곧 각각의 온갖 세상 직무와 일 가운데에서, 마치 그들의 삶이 짜여지는 것 같은 일상의 가정생활과 사회 상황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거기에서 하느님께 부르심을 받아, 자기의 고유한 임무를 수행하며 복음 정신을 실천하고 누룩처럼 내부로부터 세상의 성화에 이바지하며, 또 그렇게 하여 무엇보다도 자기 삶의 증거로써 믿음과 바람과 사랑으로 빛을 밝혀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평신도들의 활동은 세상에서, 세상의 누룩으로서 그리스도의 정신을 구현하는 것이다. 이런 활동을 하는 평신도들이 더 많아질 때 우리 사회는, 우리 교회는 더 나아지지 않을까?


본당에서의 분열과 갈등

신자들에게 “왜 신앙생활을 하느냐?” 하고 물으면 70퍼센트 이상이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고’라고 대답한다. ‘마음의 평화’, 결코 나쁜 것 같지 않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도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하신 말씀이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하셨으니 말이다. 그러나 때로는 이 ‘평화’ 지상주의가 우리의 ‘평화’를 깨뜨리고 만다.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 찾아온 대부분의 평신도들은 주변 신자들의 권유나 성직자, 수도자들의 권유로 본당에서 봉사하고,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한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다른 사람들과 봉사활동을 하면서 가치관과 세대, 성격, 봉사에 임하는 자세의 차이 등등의 이유로 조금씩 마음의 평화가 깨지면서 반목과 갈등이 드러나게 된다.

하느님과의 인격적 관계 없이 시작된 봉사와 헌신은 결국 상처와 아픔, 억울함과 답답함으로 남아 타인에게 부정적인 언어와 험담 등의 결과물로 전달되고, 서로에게 깊은 상처와 갈등을 만드는 계기가 된다.

또한 오늘날 본당 안에서 분열과 갈등은 권위주의와 무관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고 사회현상으로 “외향적이고 직접적이고 가시적이고 즉각적이고 피상적이고 일시적”(「복음의 기쁨」, 62항)인 문화를 우선시하는 사회가 있다. 이 모든 것들과 무관하지 않다. 실제 많은 신자들의 삶은 하느님의 자리에 ‘돈’이 자리하였고, 내적인 것보다 겉모습에 너무 신경쓰며 살고 있다.


성직자의 권위주의

한국교회 안에서 본당 사제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사제는 본당에서 전반적인 사목의 책임자이다. 본당 공동체의 모임이나 단체, 그리고 소공동체 모임에서 소통과 공감을 이끌어내는데 큰 영향을 준다. 아직까지 한국교회의 분위기는 신자들 스스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성직자나 수도자의 지시나 도움을 기다리는 소극적인 신앙생활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상하게도 사회에서 큰 책임이 있는 지도자일지라도 교회에 오면 어린아이 흉내를 내며 사제의 말만 기다린다.

물론 이것도 우리 교회의 권위적인 구조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21세기에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교회 모습을 띠고 있는 우리 교회의 아픔이다. 이런 권위적인 구조에서는 복음은 없고 사제만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느님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고 그분 사랑의 고요한 기쁨을 느끼지 못하며 선행을 하고자하는 열정도 식어버린다. 이는 신앙인들에게도 매우 현실적인 위험이 된다(「복음의 기쁨」, 2항 참조).

본당에서 처음 모임이나 활동을 시작하는 신자들은 활동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기를 원한다. 하지만 권위적인 구조는 하느님을 만나기보다 사제를 먼저 만나게 한다. 이런 권위적인 사목에 잘 어울리는 것은 바로 복음은 없고 사제만 있는 모습이 아닐까?


성직자와 평신도의 관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평신도의 위상에는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성직자와 평신도의 수직적 신분을 강조하는 것은 공의회에서 근본적으로 지양되었다.

여기에서부터 본당에서 성직자와 평신도의 갈등이 시작된다. 아직도 많은 사제들은 본당에서 임금처럼 군림하고 행동한다. ‘사제의 꽃은 본당신부’이지만 ‘본당의 임금은 주임신부’가 아닌데 때로는 너무나 사제의 권위를 앞세워 충돌한다.

그러나 이는 성직자들만 탓할 수만은 없다. 성직자들의 삶의 형태는 변화되어야 한다. 하지만 또한 평신도들이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하거나 어떤 선입견이나 편견으로 사제를 바라보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좀 더 사랑의 눈길로, 그리고 신앙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서로 이해와 통교가 나아지리라 희망해 본다.


평신도 사도직 간의 갈등

가끔 신자들로부터 어느 신부님은 ‘매리지 엔카운터(부부일치운동)’를 좋아하시고, 어느 신부님은 ‘레지오 마리애’를 좋아하시고, 또 어느 신부님은 ‘꾸르실료 운동’을 좋아하시고, 어느 신부님은 ‘성령 세미나’를 좋아하신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왜 이런 이야기가 나올까? 사제는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 마땅함에도 말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한국교회 안에서 다양한 평신도 단체와 운동은 초기 단계의 어려움과 정체성의 위기를 넘어, 성숙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평신도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평신도들의 신앙생활의 성숙에 이바지하였지만, 일부에서는 교회의 기본 조직인 본당생활 안에 통합되지 못하는 경향도 있다.

본당 공동체가 ‘다양성 안의 일치’를 통해 친교 공동체로서 나아가야 하는데, 때때로 어떤 단체나 운동은 자신들만이 좋은 가톨릭 신자가 되는 유일한 답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더욱이 본당신부를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려고 조정하려고까지 한다. 끼리끼리 문화와 분파주의가 생기는 이유이다. 그러다 보니 이런 사람들에게 때로는 신앙보다는 사교적 만남이 먼저고, 신앙생활이 삶이 아니라 취미처럼 보이기도 한다.


복음의 기쁨

「복음의 기쁨」에서 프란치스코 교종은 복음이 우리의 신앙을 어떤 삶으로 이끄는지에 대해 말씀하신다.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이의 마음과 삶을 가득 채워줍니다”(「복음의 기쁨」, 1항).

그동안 우리 교회는 전례가 큰 중심이 되어왔다. 그러면서 성경을 소홀히 한 게 사실이다. 복음을 모르면서 어떻게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을까? 복음이 없는 기쁜 소식이었다. 그래서 우리 삶이 흔들릴 때 우리는 하느님을 찾지만 소통하지도 공감하지도 못한다. 많은 신자가 삶과 신앙의 괴리로 흔들린다. 당연히 냉담으로 이어진다. 위기에 찬 교회의 모습이다.

하느님과 소통이 없는 교회의 모임은 진정한 소통을 할 수 없다. 자기들끼리 그들만을 위한 모임이 된다. 이웃을 배려하는 마음보다 자신들의 이익을 먼저 챙기게 된다. 개인주의적 신앙, 곧 사회적 관심이 심각하게 결여된 자기중심적 신앙의 형태는 끼리끼리 문화를 조성하고 본당 공동체 활성화에 장애가 되는 공동체를 만든다.


소공동체 모임

교회는 변화되어야 한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명제이며 화두이다. 그 변화의 중심에서 하느님과 이웃의 소통과 공감을 이끌려고 처절하고도 고심에 찬 노력을 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소공동체 모임이라고 생각한다. 소공동체는 우리 교회의 많은 문제점 중에 신자들이 하느님과의 소통(복음적인 삶, 이웃과 나눔)을 원활하게 하려는 크나큰 움직임이다.

소공동체 모임은 아래로부터의 신앙이다. 곧 선택적인 모임이 아니라 누구나 본당 신자이면 소속되고, 그 지역의 모든 신자는 어떤 조건과 자격에 관계없이 참여할 수 있다.

또한 복음과 기도, 그리고 활동에서 이기적인 자아를 버리고 내 이웃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갖게 하며, 그러한 공동체 속에서 예수님을 체험하게 한다. 아직도 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있지만 언젠가 우리 교회 안에 토착화된 한국적 소공동체로 자리 잡기를 바란다.


우리는 본당 안에서 어떻게 소통하고 공감할 것인가

모든 평신도는 사제가 말보다 삶의 모범을 보여주기를 바란다. 그러한 사제의 모습은 신자들에게 하느님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체험할 수 있게 하는 또 하나의 시작이 된다. 그런 목자는 양들을 풀밭 또는 광야로 이끌어갈 수 있다.

평신도들도 사제 못지않은 행보가 필요하다. 스스로 복음을 가까이하고 생활과 신앙이 분리되지 않는 삶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복음을 읽고 복음의 삶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신앙 체험이 필수이다. 그렇게 나아가는데 본당의 소공동체를 중심으로 또 다른 평신도 단체들과 함께 노력하면 좋겠다.

* 강전용 마태오 - 대전교구 신부. 교황청립 우르바노대학교에서 교회법을 전공하고, 에콰도르에서 선교활동을 하였다. 교구 성소 담당을 맡다가 지금은 대전 산성동본당 주임신부로 있다.

[경향잡지, 2015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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