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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종이책 읽기: 신앙의 인간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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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10-14 ㅣ No.187

[김계선 수녀의 종이책 읽기] 신앙의 인간 요셉



‘신앙의 해’도 이제 저물고 있다. 신앙의 해에 읽은 책 중에서 가장 큰 수확이 있다면 바로 「신앙의 인간 요셉」을 만난 것이다. 한 달 피정을 마치는 날 지도신부님은 그동안 아름다웠던 하느님 체험과 꿈같은 사랑의 시간들이 현실의 삶에서 지속된다는 기대를 하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이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부드러운 이유식의 단계를 넘어서고 밥을 먹기를 바라신다고 하였다. 무시로 불어대는 유혹의 바람들, 그리고 때론 황량하기까지 한 영적 메마름이 오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고 이때야말로 ‘신앙’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와 우리에 대한 사랑’을 충만하게 맛보고 즐기고 나누는 이 신앙의 해에 ‘진정한 신앙이 무엇이던가? 혹은 하느님 아버지를 믿는다고 할 때 어느 정도의 믿음이 필요한가?’ 하는 물음 앞에서 신앙이 약함을 고백할 수밖에 없고 주님께 죄송한 마음이 먼저 든다. 그런데 「신앙의 인간 요셉」을 다시 읽으면서 하느님께서는 정말 우리에게 요셉을 통해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 보여 주신다는 것을 가슴으로 뜨겁게 느끼게 되었다.

2500여 년 전 팔레스티나에서 기록된 요셉 이야기가 최첨단의 문명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신앙인의 모델로 제시되고 그가 겪었던 파란만장하고 기구한 ‘운명’을 통해서 그가 어떻게 그 상황들을 대처하였는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바오로 사도가 ‘성경 말씀은 모두 우리에게 교훈을 주려고 기록된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커다란 가르침을 준다. 어떤 성서학자는 용서와 화해를 통해서 회복되는 형제애에 대한 진리를 준다고 하고 또 어떤 철학자는 이상적 지도자의 특성을 보여준다고 하지만 저자 송봉모 신부는 “성조 요셉의 이야기는 신앙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가르치고 있다.”고 보고 논리적이면서도 현대적인 해석과 더불어 구체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불확실하고 극적인 운명의 사건들,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편애와 더불어 형제들의 시기와 질시로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가고, 파라오의 경호대장의 노예로 신임을 얻어 편하게 사는가 싶었는데 경호대장의 부인을 겁탈하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무기수가 되어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고 이 고통의 시간들이 13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만약 그가 어릴 때 꾸었던 찬란한 꿈과 하느님의 섭리에 의지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요셉의 전반기 삶은 인간적으로 볼 때 너무도 불행한 삶이고 후반기 삶은 말 그대로 인생역전의 삶이다. 아버지 야곱은 하느님도 만나고 목소리도 듣고 씨름을 하기도 했지만 요셉은 가시적으로 한 번도 하느님을 뵌 적이 없다. 심지어는 하느님의 계시라든가 현존을 체험할 만한 암시도 없었다. 그렇지만 요셉은 하느님이 언제나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이런 신앙은 그가 삶의 기로에서 중대한 선택을 하게 만든다. 보디발의 아내의 성적인 유혹 앞에서 신의를 선택한 것이다. 저자는 꽤나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이 장면을 기술하고 있는데 오늘날 그 어느 시대보다 성에 대한 담론이 넘쳐나고 성을 상품화하는 이 시대에 이처럼 명료하게 성적 유혹에 대처하는 요셉을 경탄할 정도로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모든 죄 중에서 성적 죄악은 고통스러울 때보다 축복 중에 있을 때, 역경보다는 순조로울 때 더 많이 생긴다면서 배부르고 안락한 상태에서는 하느님보다 쾌락을 선택하는 약한 인간의 한계를 일깨운다. 그런데 우리의 주인공인 요셉은 여주인의 유혹을 거절하면서 “이렇게 엄청난 짓을 제가 어떻게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하느님께 죄가 됩니다.”라고 말한다. 이로써 주인에 대한 신의와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았다. 저자는 우리도 요셉처럼 하느님의 눈길을 의식하며 그분만을 표적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면서 죄는 표적을 놓치는 것,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잊은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요셉은 자신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자각하고 있었다. 자기가 소중한 존재임을 자각하고 인식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보루인가. 그러기에 자신을 함부로 할 수 없고 유혹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큰 힘이 되었다. 인간적 본능과 본성의 차이를 설명하는 부분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귀담아 듣고 꼭 읽어 보아야 할 대목이다.

요셉은 이후 무기수로 오랜 기간 감옥에 있었지만 그의 내면은 병들지 않았다. 하느님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파라오의 꿈을 해몽하는 요셉에게는 절대적인 신앙이 있었다. 저자는 그의 훌륭한 내적 태도를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첫째, 요셉은 2년 전 감옥에서 나갈 기회가 있었는데 그렇게 해주지 않으신 하느님을 원망하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 신앙을 갖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꿈을 푸는 것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둘째, 요셉은 파라오 앞에서 유일하고 전능하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공공연하게 고백한다. 셋째, 요셉은 최고 권력자 파라오 앞에서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하느님의 영광만을 드러낸다. 그는 지혜의 원천이 어디에 있으며, 운명의 주관자가 누구인지를 잘 알고 있다. 그는 세상을 이끌어 갈 통치자, 경륜가들이 지녀야 할 최고의 덕목, 곧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 신앙을 갖춘 인간으로서 지금 파라오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이집트에 기근이 들었을 때 그의 형제들과의 용서와 화해는 얼마나 극적이며 지혜로우며 치밀한가! 그가 화해를 이루고 용서하는 과정도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러고 보면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이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와 절대적인 신앙이 만나 모든 것을 합하여 선으로 이끌어 냈음을 볼 수 있다. 그의 아버지 야곱이 집념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라면 요셉은 하느님의 섭리에 자신을 내 맡겼다. 긴 역경의 세월 속에서도 하느님의 돌보심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느님이 선의로 이끌어 주리라고 굳게 믿었다. 오직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살았다. 그는 이야기를 할 때도 행위를 할 때도 반드시 ‘하느님’ 중심이었다. 만일 그가 성공하지 않았더라도 계속적으로 힘들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어떠한 처지에 있던지 하느님을 신뢰하면서 살아가는 ‘~일지라도’의 신앙이라고 맺고 있다. ‘~이라면’의 태도가 아니라. ‘억울한 일이 내게 닥칠지라도, 나의 원수가 번창할지라도, 내가 나의 겟세마니에서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고, 나의 골고타에서 고난의 잔을 마셔야 할지라도 나는 그 순간 나와 함께 계시며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신뢰하고 찬미할 것이다.’는 그의 신앙이 우리를 재촉한다. 요셉뿐만 아니라 실제로 이런 삶을 살아갔던 이들의 많은 예화와 풍부한 인용들, 학자들의 견해와 저자의 생각들이 풍부하게 펼쳐져 있는 이 책을 만나서 참 행복한 ‘신앙의 해’였고 이제 다시 항구하게 신앙을 살아야 할 출발점에서 참으로 귀한 벗을 만난 느낌이다.
 
[월간빛, 2013년 10월호, 김계선 에반젤리나(성바오로딸수도회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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