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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뜨겁게 만나다: 엔도 슈사쿠의 깊은 강 - 신은 인간을 포용하는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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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5-17 ㅣ No.165

[뜨겁게 만나다] 신은 인간을 포용하는 존재


엔도 슈사쿠, 「깊은 강」

 

 

엔도 슈사쿠 생애 마지막 장편소설인 「깊은 강」은 1993년 그의 나이 70세에 출간되었다. 책이 출간되자 일본 문학계는 엔도 슈사쿠 문학의 집대성이자 최고의 작품으로 유명한 그의 소설 「침묵」을 능가한다고 평가했다.

 

 

잃어버린 것을 찾아 떠나는 여행

 

「깊은 강」은 13장으로 구성되어 각 장마다 등장인물의 삶과 행적, 그리고 인도 관광 목적을 뚜렷이 구분하고 있다.

 

평범한 샐러리맨이던 이소베는 아내와 과묵하고 굴곡 없는, 평이하지만 안온한 삶을 산다. 그러다 아내가 죽고 난 뒤 이소베는 내세를 굳게 믿던 아내의 소원인 환생을 이루어주고자 인도 여행을 떠난다.

 

학생 때 같은 대학교 신학생인 오쓰를 유혹하고 버린 나루세 미쓰코는 오쓰에 대한 알 수 없는 미련으로 그의 뒤를 쫓는다. 그래서 오쓰가 유학 간 프랑스 파리로 신혼여행을 떠나고, 그곳에 남편을 남겨둔 채 오쓰를 만나러 리옹으로 간다.

 

오쓰와 만난 미쓰코는 “신은 존재라기보다 손길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을 베푸는 덩어리입니다.”라는 오쓰의 말에 자기와는 이미 동떨어진 차원의 세계로 들어가 있는 그를 발견하게 된다.

 

동화작가 누마다는 기르던 구관조가 죽자 야생동물 보호지역을 찾아 인도 여행을 결심한다.

 

또 전쟁 중에 미얀마 정글에서 부대를 이탈한 기구치와 스키타가 있다. 스키타는 굶주림을 참다못해 죽은 전우의 인육을 먹는다. 일본으로 돌아온 스키타는 그 기억을 잊으려고 술로 세월을 보내다 생을 마감하게 되고, 기구치는 숨진 전쟁 동료의 영혼을 위로해주고자 아픈 과거를 가슴에 안고 인도 여행단에 끼어 갠지스 강까지 오게 된다.

 

이렇게 각기 저마다 아픈 상처를 안고 인도 바라나시에 도착한 일행 앞에 인도 수상 간디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는 아름답지도 않고 위엄도 없는, 그저 성자였다

 

새벽 4시. 오쓰 신부가 일어나 몸을 닦고 세수를 하고, 혼자 미사를 올린다. 마지막 기도를 마치고도 오쓰 신부는 계속 무릎을 꿇고 있다. 리옹 수도원에서도 오쓰 신부는 예수님과 마주할 때만이 평온함을 찾을 수 있었다.

 

날이 밝아오자 오쓰 신부는 질퍽하고 더러운 거리를 돌아다닌다. 오쓰 신부가 찾는 것은 귀퉁이에 웅크린 채 헐떡이며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인간의 모양새를 하고도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 인생들이며 갠지스 강가에서 죽는 것만을 마지막 소망으로 삼고 간신히 갠지스 강가에 당도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있는 곳을 오쓰 신부는 잘 알고 있었다. 그곳은 사람의 눈이 닿지 않는 좁은 벽 틈으로 밖의 빛이 겨우 새어 들어오는 장소였다.

 

벽에 기댄 노파가 눈에 들어오자 오쓰 신부는 자루에서 알루미늄 컵과 물병을 꺼내 물을 따라 노파의 입에 컵을 갖다 대고 물을 흘려보낸다. 노파는 힘없는 목소리로 “강가…”라고 말한다.

 

오쓰 신부는 포대기를 자루에서 꺼내 노파의 자그마한 몸을 싸서 업는다. “강가….” 노파는 오쓰 신부의 어깨에 전신을 내맡기고 똑같은 말을 울먹이며 되풀이한다. 일을 끝낸 오쓰 신부가 걸으며 기도한다.

 

“당신은 등에 십자가를 지고 죽음의 언덕 골고타를 올랐습니다. 저는 지금 그 흉내를 내고 있습니다.”

 

화장터가 있는 마니카르니카 가트에서는 이미 연기 한 줄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갠지스 강의 성자

 

항상 튀는 행동으로 동료 여행객을 당황케 했던 산조가 사진기를 들이대고 인도인의 주검을 찍었다. 그 순간, 화장터로 내려가는 계단 부근에서 비명이 울렸다.

 

웅크리고 있던 힌두교도들이 일제히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지르며 내달리기 시작했고 동양인 한 명이 허겁지겁 달아나고 있다. 일본 관광단의 일행인 산조였다.

 

그러자 시신을 나르고 휴식을 취하던 오쓰 신부가 뛰쳐나와 유족 앞을 가로막고 서서 진정시키려 애쓴다. 하지만 격앙된 유족들은 가로막고 선 오쓰 신부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패고 발로 차댔다. 그 사이에 산조는 강변 뒤쪽 미로로 도망쳤다.

 

수상의 암살로 신경이 곤두선 힌두교도가 오쓰 신부에게 분노를 퍼부었다. 화물차에서 부려지는 짐짝처럼 가트에서 굴러 떨어진 오쓰 신부는 그대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때 미쓰코가 모여든 사람들 사이로 오쓰 신부를 보고 소리쳤다.

 

“이 사람이 아니에요. 이 사람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그러자 오쓰 신부가 가늘게 눈을 떠 미쓰코를 보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목은 오른쪽으로 뒤틀린 채.

 

“정말 바보야. 하느님 때문에 일생을 망치다니. 당신이 하느님의 흉내를 냈다고 해서 증오와 에고이즘밖에 없는 세상이 바뀔 턱이 없잖아.”

 

미쓰코의 절규처럼 오쓰의 행적은 하느님의 흉내만 냈을 뿐일까?

 

오래전 일본 나가사키 성지로 순례를 갔었다. 푸른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엔도 슈사쿠 문학관이 앉아있는 소토메 마을에 세운, 작은 비에 새겨진 비문은 아직 내 눈에 그대로 담겨있다.

 

“인간이 이토록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나 푸릅니다.”

 

* 윤일숙 요세피나 - 동화작가. 이화여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일보에 동화 ‘돼지’로 등단했다. 동화집 「세모돌이의 웃음」, 「바보 삼부자」, 청소년 소설집 「늘 푸른 나무처럼」, 「키 큰 느티나무」 등을 펴냈다. 햇빛출판사 대표로 한국가톨릭문인회 회원이다.

 

[경향잡지, 2013년 5월호, 글 윤일숙 · 그림 박순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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