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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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종이책 읽기: 최인호의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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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11-12 ㅣ No.188

[김계선 수녀의 종이책 읽기] 최인호의 인생



“생(生)은 신이 우리에게 내린 명령(命令), 그래서 생명(生命)”

지난 9월 선종한 작가 최인호 베드로의 책 「최인호의 인생」의 표지에 작게 박혀져 있는 이 글귀는 산다는 것의 숭고함, 생명의 당위성이 느껴져 그가 가고 없는 지금 더 절실하게 다가왔다. 사는 것이 곧 하느님이 주신 소중한 선물이라는 것을 그의 인생을 통해 만나보게 되었다. 그가 ‘문학’을 시작한 지 올해로 50년 되는 해의 신작 작품집이 「최인호의 인생」이다. 신앙인뿐만 아니라 모든 독자들에게 소설가가 내놓은 신작이 종교적인 내용이어서 미안하지만 작가란 어차피 그때그때 마음에 담고 있는 것을 쏟아내는 사람들이라고, 그래서 이 책의 내용의 깊이가 상당한 무게로 다가왔다.

‘아무것도 청하지 말고, 아무것도 거절하지 말며’, ‘꽃잎이 떨어져도 꽃은 지지 않는다.’는 마치 선문답의 깨달음 같은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말씀을 내용의 제목으로 고른 그에게서 벌써 경지에 도달한 도인의 향기가 풍긴다. 그의 선견지명대로 과연 꽃잎이 떨어져도 꽃은 지지 않을 것 같다.

‘암’에 걸린 자신을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고 담담하게 고백하였지만 그도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또 여느 신앙인들과 마찬가지로 겪을 수 있는 것을 다 겪었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는 “가톨릭 신자로서 앓고, 가톨릭 신자로서 절망하고, 가톨릭 신자로서 기도하고, 가톨릭 신자로서 희망을 갖는 혹독한 할례의식을 치렀다. 나는 이 할례의식을 ‘고통의 축제’라고 이름 지었다. 아직도 출구가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고통의 피정 기간 동안 느꼈던 기쁨을 많은 분들에게 전하려고 한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신앙인으로서 고통가운데 기쁨을 느끼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자신의 고통이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 동참하는 부활이라는 것 또 그 고통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기까지는 겪어내야 할 과정을 겪은 사람만이 그 기쁨을 안다. 그 기쁨이 묻어나는 글들을 작품집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어찌나 반갑던지….

‘그동안 나는 암에 걸려 투병하고 있었다.’고 그간의 침잠을 짧게 설명하고는 자신에게 그런 태풍이 불어 닥친 것은 다름 아닌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날 병원 복도에서 마주친, 천사와 같은 머리 깎은 어린 환자의 눈빛을 보았을 때 남몰래 눈물을 흘리면서 저 아이는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하며 절규하던 그가 주님의 말씀을 접하고 비로소 죄의식에서 해방되었다. “병원 안에 있는 수많은 환자들… 아아, 지금 이 순간에도 얼마나 많은 가정 속에서 소중한 우리의 아빠, 엄마, 딸, 아들, 이제 갓 태어난 아기들이 온갖 병으로 스러지고, 신음하고, 죽어가고 있을까. 그들은 모두 죄인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대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있다는 진리를 깨달았던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한 그는 참 많은 작품을 써왔고 대중의 사랑을 받는 소설가로 기억이 된다. 그 작품들이 영화화되고 뮤지컬로도 만들어졌으니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치고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리라. 도도하고 까칠하고 자신감 넘치던 작가 최인호는 1987년 세례를 받고 가톨릭에 귀의했다. 그의 작품 세계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대중의 시선을 의식해서 작품을 쓰고 그 작품으로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던 작가가 「길 없는 길」이라는 종교소설을 쓰게 된 계기는 세례를 받았던 충격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밝힌다. 가톨릭에 귀의했을 때 비로소 지금껏 믿어왔던 진리라고 부르는 진리가 실은 진리가 아니고 속임수였으며, 사람이라면 추구해왔던 돈과 명예와 권력의 영광은 우상이었음을 깨닫는다. 자신의 근원인 ‘참나’를 발견하기 위해 무던히도 찾고 두드리고 구하던 그가 말씀 안에서 참나를 발견한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사람의 아들로 육화되어 오셨다면 우리는 사람의 아들에서 하느님의 아들로 영적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길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길이며 생명을 지닌 전인적 존재로서 인간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가치이며 부활의 참의미라고 공언한다. 그리고 그는 암 투병을 통해 그 길을 걸어갔다. 그리고 이 작품집을 통해 그가 걸어갔던 길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신앙고백이자 사랑의 고백이다. 그리고 진리에 대한 고백이다.

“저는 어떻게든 벌에게 인정받고 나비에게 돋보이려고 기를 쓰고 있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이 집중되는 스포트라이트가 조금이라도 빗겨 가면 악착같이 그 화제의 중심에 다시 서려 하였으며, 매스컴에 이름이 끊임없이 호출되어야만 출석부를 체크한 학생처럼 마음이 놓였고, 항상 저에 대한 평가에 귀를 기울이고, 온갖 찬탄과 박수소리, 선망의 시선에서 멀어진다 싶으면 불안하고 소외감을 느꼈던 전형적인 속물적인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최민순 신부님의 시 “두메꽃”을 묵상하면서 그는 진정으로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선언하시는 주님의 ‘값없는 꽃’의 절대 가치의 의미를 깨닫고 남은 인생은 그렇게 살고 싶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 책의 2부에서는 그가 만났던 위대한 스승들인 이태석 신부님, 김수환 추기경님, 법정스님과의 인연을 생생하게 그린 미발표 묵상 소설을 싣고 있다. 소설이지만 실제 만남과 이별을 담고 있어 마음으로부터 공감이 된다. 어쩌면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그와의 이별을 그렇게 준비시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엿가락의 기도는 기발하면서도 주님을 믿고 맡겨야 하는 의미를 어쩌면 이렇게 재미나게 쓰고 있는지 우리도 그렇게 평화를 누리길 갈망해 본다. “제가 그토록 기도했으면서도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하였던 것은 제가 구하기 전에 이미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시고, 이를 구해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요즘 저의 기도는 엿가락 기도로 바뀌었습니다. ‘주님, 이 몸은 목판 속에 놓인 엿가락입니다. 그러하오니 저를 가위로 자르시든 엿치기를 하시든 엿장수이신 주님의 뜻대로 하십시오. 주님께 완전히 저를 맡기겠습니다. 다만 제가 쓰는 글이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의 입속에 들어가 달콤한 일용할 양식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엿장수의 이름으로 바라나이다. 아멘.’ 요즘 저는 80%정도로 그리스도의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지금쯤은 하느님 나라에서 완전한 평화와 영복을 누리고 있을 그가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고 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월간빛, 2013년 11월호,
김계선 에반젤리나 수녀(성바오로딸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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