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 (금)
(홍)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한국ㅣ세계 교회사

[세계]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38: 성화상 논쟁과 제2차 니체아 공의회 - 흠숭과 공경 구별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1-04 ㅣ No.229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38) 성화상 논쟁과 제2차 니체아 공의회 - 흠숭과 공경 구별로 논쟁 해결

 

 

- 제2차 니체아 공의회가 개최된 니체아(현지명 이즈니크)의 소피아 성당.

 

 

[터키=김상재 기자]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었으므로 우상숭배를 초래하는 신상을 만들지 않는 유대 율법의 영향을 받았다.

 

자연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성상을 만들어 세우는 것에 부정적이었고 물고기나 배와 같이 신자여부를 확인하는 암호나 간단한 상징물 혹은 신앙교육을 위해 착한 목자, 어린 양과 같은 소박한 그림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신비를 표현했다.

 

그러나 신앙의 자유를 얻은 4세기 이후 영세자들이 늘어나자 모든 이들에게 상징적인 표현만으로 신앙신비를 설명하기가 어려워졌다. 보다 구체적이고 시각적인 표현이 필요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맹이었던 시절이었으므로 이런 표현들은 예술적 시각에서 보다 교육의 도구로 이해됐고 교부들은 설교를 진리를 얻어 듣는 도구로, 성화상은 보는 도구로 강조했다. 이러한 성화상은 특히 동방지역을 중심으로 대중화 되기 시작했고 6~7세기 경에는 교회, 수도원, 카타콤바, 개인 집 등에 그려졌다.

 

그러나 성화상이 대중화되면서 병든 사람을 고쳐준다는 등의 미신적 관념이 도입되면서 성물공경 현상이 나타났다. 이런 성숙치 못한 성화상 공경의 풍습과 교의적인 충돌 등으로 성화상 논쟁이 일어났다.

 

논쟁은 주로 그리스도의 신성만을 강조하고 참된 인성을 부정하는 단성론자들에 의해 시작됐다. 사람의 모습으로 표현된 그리스도의 형상은 신성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므로 성화상 공경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이단에 빠질 수 있다는 논거였다.

 

이에 대해 692년 콘스탄티노플 제2차 트룰라눔 교회회의는 하느님께서 사람의 모습을 갖추게 되셨으므로 그리스도의 성화상이 가능하다고 선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로마제국에서 이 성화상 문제는 수그러지지 않고 오히려 파괴운동으로 발전했다.

 

717년 즉위한 동로마의 레오3세 황제는 성화상 공경에 대한 이러한 찬반 논의를 잘 알고 있었지만 불안한 국내외 정치상황 때문에 개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강화된 이후 성화상 공경 옹호자들이 자기와 적대 관계에 있던 선대황제들의 옹호자였고 자신의 권위에 완전히 복종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726년 구약의 우상숭배 금지와 이슬람과 유대인들의 개종을 이유로 성화상 파괴를 명령했다.

 

이는 단순히 교의상의 문제만이 아니라 교회를 포함한 전 제국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려는 절대군주로서의 야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요소도 크게 작용했다.

 

당시 동로마는 이슬람의 진출과 슬라브 민족의 남하를 막기 위해 많은 전쟁을 치르고 있었으므로 막대한 부를 필요로 했다. 그러므로 광대한 토지와 면세권을 지니고 있으면서 황제의 권위에 예속 되지 않는 수도원을 속박시켜 국가 정책에 대한 수도원의 개입을 방어하는 동시에 수도원의 수많은 재산을 차지하고자 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성화상 논쟁은 이제 교의적인 문제를 떠나 황제의 전제정치로부터 벗어나려는 교회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투쟁적 성격으로 양상이 변하게 된다.

 

전통신앙에 의해 배척된 단성론을 주창하던 소아시아의 주교들은 레오의 조치를 받아들였지만 대다수 성직자와 신자들은 레오를 반대했고 그레고리오 2세 교황도 황제의 요구를 거부함으로써 제국 전체에 황제를 반대하는 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이에 레오 3세는 730년 1월 17일 성화상 공경을 금지하는 칙서를 발표하고 성화상 철거를 무력으로 강행했다.

 

그레고리오 2세 교황은 성화상 파괴 중지를 요구하며 주교들이 결정해야할 교의적 문제에 간섭치 말 것을 명령했으며 후임자 그레고리오 3세 교황도 로마 교회회의를 통해 성화상 파괴, 비방, 제거 행위를 파문했다. 여기에 대한 반동으로 레오 3세는 교황을 체포하기 위해 함대를 보내기도 했고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등지의 교회 재산을 몰수하기도 했다.

 

이제 상황은 동서 제국의 극렬한 대립으로 치닫게 됐다.

 

성화상 논쟁은 레오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5세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렀다. 성화상 공경을 인정한 매부 아르타바도스의 반란을 경험한데 이어 교황청과 프랑크 족의 동맹을 지켜 본 콘스탄티누스는 정치적 안정을 위해 754년 히에레이아에서 회의를 개최해 성화상 파괴를 재가했다.

 

이러한 전제정치에 반대한 것은 거의 수도자들이었는데 수도자들의 봉기는 박해와 처형으로 이어져 많은 지방에서 수도자들이 전멸하다시피 했다.

 

성화상 논쟁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은 것은 열 살의 어린 나이로 황제가 된 콘스탄티누스 6세를 대신하여 섭정한 이레네 황후에 이르러서다. 자신이 성화상 공경으로 추방당하기도 했던 이레네 황후는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콘스탄티노플에서 공의회를 개최했으나 반대파 군인들에 의해 해산됐고 787년 가을에서야 니체아에서 공의회가 시작됐다.

 

제2차 니체아 공의회는 동서교회가 함께 한 마지막 공의회로 성화상 논쟁을 흠숭과 공경으로 구별함으로써 해결했다. 흠숭은 하느님께만 해당되고 공경은 피조물에게도 해당된다는 사상을 통해 성화상 공경의 교의적 기반을 다진 한편 이의 남용을 경계했다.

 

이외에도 공의회는 한 수도원에 남녀수도자를 함께 두는 것을 금지했으며 수도자나 성직자가 단독으로 여인과 식사하는 것을 금하는 등의 22개 법규를 정했다.

 

성화상 논쟁이 공경 쪽으로 가닥을 잡음으로써 수도원의 부흥시대를 가져왔고 황제에게 예속됐던 동방교회의 자율권이 커졌으며 성화상 공경을 끝까지 지킨 로마교회와 교황의 권위가 제국 전역과 교회 안에서 높아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100여년에 걸친 논쟁은 지역간의 첨예한 대립을 가져와 이후 동서교회의 골을 깊게했고 결국 동서교회가 분열하는 한 원인이 됐다.

 

[가톨릭신문, 2002년 1월 20일, 김상재 기자]



1,487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