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일)
(백) 부활 제5주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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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적 사회의 실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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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규 [mugeoul] 쪽지 캡슐

2001-03-05 ㅣ No.154

우리는 이른바 ’예수적 사회’

(종말론적인 것은 제하고 오직 윤리적인 부분

따라서 차라린 예수적 유토피아라 해도 좋다)가

2천년이라는 그토록 오랫동안에 이뤄지지 않았다고 실망한다.

 

또 원시 초대 그리스도 교회공동체 때나

프란치스코 생전의 프란치스코 수도회 등등에서

극히 부분적으로 간혹 그것이 실현되었다 해도 순간적일 뿐

다시금 그 빛을 잃고 사라저버리고 만다고  

그 꿈의 불가능함과 헛됨을 말하며 포기하라고 떠든다.

 

하지만 신앙적인 관점만이 아니라

세속적인 눈으로 봐서도 그러기엔 아직 이르기만 하다.

 

생각해 보자.

그 2천년이란 이른바 생태학적,

아니 좁혀서 사회학적 견지에서 볼 때에도

극히 짧은 기간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현 본성으로 볼 때

쉽사리 그리고 당연히 이뤄질 것 같은

’권력에 의한 왕국인 고대문명사회’도 그것이 성립되는 데엔

곧 계급사회의 탄생에서부터 고대왕국의 성립시기까지

근 1만 여년이나 걸렸다.

 

하물며 반(反)본성적으로까지 생각되어지는

예수적 사회야 얼마나 어렵겠는가.

 

뿐만 아니라 현 인류가 급속한 문화성장을 하고 있다 하여

그런 적응능력마저 발달한다고도 보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예를 들어 인류의 생물학적인 변화를 보자.

그동안 거의 기하급수적으로 이뤄져 온 문화적 진보에 비해

인간의 대뇌량은 50만년에 겨우 300cc 정도만 확대될 만큼

놀랄 정도로 커지는 변화를 입지 않았다.

 

따라서 신앙인은 물론이고 세속인들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

 

한 새로운 사회양식(패러다임)이 탄생되어

그것이 전사회적으로 침투하여 굳어 뿌리를 내리는 데엔,

즉 이상적으로 실현되는 데엔

최소한 몇 천년은 필요하다고 본다.

 

3천 년의 역사를 가진 민주주의적 사회조차도

아직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고,

공산주의는 단 1세기만에

아예 반동적으로 나가버리며 제 갈 길을 못 찾고 있다.

 

하여 이른바 예수적 사회를

이른바 성령의 도움이야 제하고서라도

오직 비신앙적인 견지에서만 얘기한다 해도,

어쨌든 그런 까닭에 결코 포기해선 안될 것이다.

 

더욱이 그런 사회를 이루는 것이

우리 인류 전체의 생존의 길이 될 것이 확실 한데에서야

그것을 너무 조급하게 생각해서는 안될 말이다.

 

하느님나라를 이루기 위해

우주는 150억 년을,

지구는 45억 년을,

생물계는 40억 년을

그리고 우리 인류만 하더라도 5백만 년을

꾸준히 기다려 왔지 않는가.

 

사실 급변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인지

현대인은 대단히 ’조급한 역사의식’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들에게 있어 시간이란

마구 쫓기고 쫓는 것으로밖에 여겨지지 않고 있다.

그래 현재는 과거에 쫓기고

내일은 오늘에 쫓기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진화론을 논할 때도 드러난다.

떼이야르 드 샤르댕을 비롯한 진화론자들은

마치 지구 전체가 인간이라는 종(種)을 낳기 위해

급속도로 맹렬히 진화의 길을 밟아 달려온 것처럼 이야기한다.

더욱이 그런 걸 소설창작 하듯 즐기기까지 하는 듯 보여진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지구의 역사는 50억 년이고

생명의 역사 역시 그에 못지 않게 길고 오랜 시간이다.

 

사실 말이 35억 년이지

우리로선 ’영원한 시간’으로 표현하는 게

이해하기 더 쉬울 정도로 길고 긴 시간이다.

더욱이 그 진화의 역사란 해뜨고 지는 매일 매일로 볼 때엔

조금의 변화도 입지 않은 듯하게 느껴질 만큼

완만하고도 미미한 속도의 진행이었다.

 

거기에다 생물학적인 진화와

그에 따르는 생태계의 변화의 의외성은 너무나 잘 알 수 있고

그건 현대에 와서도 변함없다.

신종(新種)의 출현은 물론이고 돌연변이마저도

얼마나 드물고 또 어려운 일인가!

 

이렇게 생물계의 전 개체수가 폭발적으로 증대하였고

천과만종(千科萬種)으로 다양하게 진화·방산되어

그런 것의 확률이 대단히 높아진 지금에 와서도 그러한데

겨우 몇 종의 원시생명체만

바람 앞의 등불처럼 깜박이며 생존했었던

시원(始源) 몇 십억 년의 시기에선 과연 어떠했겠는가!

그야말로 불변(不變)-정중동(靜中動)-적멸(寂滅)

바로 그러했으리라.

 

그런데 그걸 지켜보시며 창조행위를 계속하신

하느님의 끈기와 한없이 넓은 마음을 생각해보라.

그런데도 그분에겐 그 기간이 기껏

우리의 일주일 정도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고 하니!

그만큼 하느님에 있어 창조는 기꺼이 즐겁고

한없이 좋게 느껴지는 것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역사와 우주를 논할 때에

우리는 보다 여유 있고 느긋한 마음가짐을 지닐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사심 없는 접근자세(approach posture)가 요구된다.

 

그럴 때 우리는 역사와 우주 속에서의

인간의 위치와 가치를 보다 참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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