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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성, 그 영원한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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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규 [mugeoul] 쪽지 캡슐

2001-03-05 ㅣ No.152

 

  모성은 그것이 잘 이뤄만 진다면 대단히 자유롭고 사랑이 넘치는 이상향을 낳을 수 있다. 이른바 자유혁명에 모성적 파토스가 함께 함은 바로 그 이유에서이고, 또한 참된 유토피아가 종교적인 면으로만 그래도 가능성이 있음은 종교는 사랑의 고리인 까닭이다.

 

  흔히 대지를 모성에 비유하나 모성은 대지보다 더 위대하다. 대지는 자연도태라는 일면 비정한 손길에 따라 생명을 키우나, 모성은 못난 자식일수록 더한 사랑으로 살리려 한다. 곧 대지의 사랑은 한계가 있으나, 모성은 무한에까지 이른다. 사실 모성의 그런 특성이 사랑과 자비의 고등종교를 낳는데 크게 영향을 주었다. 같은 여성신이면서도 고대종교의 이른바 대지의 여신들과 고등종교에서의 보살이나 그리스도교의 성모 마리아는 얼마나 다른가. 흔히 낳은 어머니 보단 키운 어머니의 정(情)이 더 깊다 하는데, 이는 "낳은" 대지와 "받아들이는" 모성 바로 그 차이다. 대지에 사는 생명은 모두 유한한 존재로서 치열한 생존투쟁 속에 언젠간 사라져야 할 운명이지만, 모성은 그 어떤 영원한 생명력을 지닌 "품"을 가지고 있기에 그 생명에게 영원의 빛을 안겨다 준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의 반(反)종교적 풍조를 모성의 고갈현상에 그 어떤 연관을 찾을 수 있겠다. 이른바 여성해방운동 역시 반모성적인 성향으로 흘러가선 인간으로 하여금 영원에의 창을 닫게 만들 것이다. 사르트르의 실존철학은 그것에의 한 예언적 현상이 아닐까. 그의 무신론이 니체와 카뮈와 다른 것은 그들은 하느님을 느끼거나 보고서도 짐짓 모른 체 하는 것이었지만, 그는 사실 그 어디에서도 하느님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니, 영원의 세계란 그에게 있어 허구 바로 그것이었을 뿐이다.

 

  과연 "영원한 여성 곧 모성만이 우리를 이끌어 올린다"고 어쨌든 모성은 영원에로의 창이다. 그러기에 루터는 말할 것도 없고, 존 웨슬리의 감동적인 신앙발견까지 모든 열정적인 신앙부흥운동에선 언제나 하느님의 모성적 자애가 강조되었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모성을 강조함은 신심을 중요시한다는 것이니, 그로써 온갖 형식주의가 배격되는 것이다. 그 때 하느님은 제단의 하느님이 아니라 이미 심혼의 하느님이 된다. 그는 "항성(恒星)보단 불규칙한 행성(行星)으로 있길" 원하고, 그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게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고, 엄마 품에 안긴 아기처럼 "무얼 먹을까, 무얼 입을까, 걱정치 말라"고 외치게 된다. 과연 "아흔 아홉 번이나 용서를 청해도 다 들어주는" 마음은 다름 아닌 바로 그 모성뿐이다. 그 때 그곳에 뜨겁고도 밝은 사랑이 감돌고 그것은 빛이 되어 둘레를 비친다.

 

  종교가 때때로 보다 열정적인 상태에 있을수록 광신화하는 이유도 그것이 모성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인간 예수 자체가 남성이면서도 지극히 여성적인, 아니 차라린 모성적인 면을 지닌 분이시고, 우리 종교의 열정적 영성운동(靈性運動)의 대부분은 마리아로 상징되는 모성적 성격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요즘의 성령쇄신운동 역시 마리아에 대한 신심을 고조시키고 있고, 중세의 종교개혁 역시 결국은 농민반란 같은 모성적인 면으로 치닫고 말았다. 또 사실 고등종교를 창시한 예수를 비롯하여 석가·공자·마호멧의 4대성현 모두가 모성적인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때때로 종교가 매너리즘이나 조직적 권위주의에 빠져 비(非)열정적 상태에서 세속화되기도 하며 정치권력화되어 신도를 지배하려 드는 등 부성화 경향을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종교의 참된 모습은 결코 아닌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그런 것을 ’종교의 타락’이라고 부른다. 종교의 본질적 요소는 사랑이나 자비(慈悲)나 인(仁) 같은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 어디까지나 모성적인 것이다. 하여 진실로 건강한 애정을 지닌 모성을 지니고 있을 때만이 종교는 이상적인 상태에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의 성령에 의해 공동체 전체에 사랑의 나눔이 흘러 넘쳤던 초대 그리스도교회 시대, 석가의 체취가 은은하게 향기를 풍기며 신도들에게 진리의 자유함을 만끽하게 만들어 주었던 원시 불교 시대, 악기를 타고 노래를 즐겁게 부르는 인간 공자가 살아 있던 공맹(孔孟)의 유학 시대를 이상적 황금시대로 추억하고 언제나 그 시대로 돌아갔으면 하는 꿈을 꾸고 있다. 그런데 그 모두엔 계율이나 조직에 얽매이지 않는 모성적 부드러움과 지극히 인간적인 자유로움과 생동감있는 사랑이 풍요롭게 넘쳐 나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을 낳는 대지(大地) 역시 원초적인 모성을 지니고 있기에 대지의 여신들이 종횡무진 활약하는 고대 원시종교로부터 시작하여 대지는 본질적으로 종교와 상통하고 있기도 하다. 이렇게 사실로는 대지가 인간을 키우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인간은 대지는 마구 짓밟고 다니면서, 찬양은 오히려 하늘에게 보낸다. 물론 문화적 존재인 인류 자체가 원래부터 시선이 ’앞과 위’로 자연스레 향하는 까닭에서이겠지만, 여기에서 ’창조신학(創造神學)’의 영성(靈性)이 도저히 발붙힐 수 없도록 만드는 왜곡된 신앙관이 비롯되고 있음은 또한 부인못할 현실이다.

 

  한편 모성은 그 비(非)이성적인 성격 때문에 일단 잘못 흐르면 과도해지고 광기마저 띠어 오직 힘만이 지배하는 사회를 낳게 되기도 한다. 즉 방종과 다른 이에 대한 본능적 증오를 수반한 이기주의가 팽배해 있는 이른바 무법천지와 같은 영웅시대를 이루게 된다. 사실 영웅이나 위인 뒤엔 항시 모성의 영향이 있게 마련이다. 그뿐 아니라 폭군들은 대개 모친 콤플렉스를 지닌 자이다. 홉스의 약육강식· 다아윈의 자연도태·니체(그는 여성의 울타리에서 자라났다!)의 힘의 철학·스펜서의 적자생존 등등의 지극히 대지적인 사상은 모성의 타락된 모습이다. 거기엔 모성에 있어 본질적 요소인 사랑이 결여되어 있다.

 

  그런 사상들과 역시 같은 모성적 산물인 종교에서의 "원수를 사랑하라!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이를 돌 보라!" 같은 말들을 비교해보라! 그것엔 오직 사랑의 있고 없음의 차이가 있을 뿐인 것이다. 우리는 그토록 연약하게 보이는 루소가 고대 희랍의 도시국가 스파르타를 찬양한 것에 대해 의아하게 느끼지만, 모성과 여성의 열렬한 숭배자인 인간 루소를 염두에 두고서 생각할 때 오히려 그것은 당연하기만 하다. 스파르타는 그 외면적인 남성화에도 불구하고 적자생존의 모성적 사회였던 것이다.

 

  무엇보다 한 시대에 있어 여성이 모성을 지니지 않을 때 그 사회는 병든다. 아니 파멸에까지 이르고 만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 사회가 쇠망의 길에 빠져들 때, 거기엔 반드시 모성결핍의 풍조가 나타난다. 사실 에와가 그런 짓을 저질렀을 때는 아직 자녀를 낳지 않았었다. 만일 그녀가 일찍 아이를 낳았다면 선악의 열매가 인간의 목구멍에 걸리는 그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여성의 모성은 어떤 면으로 봐도 사회의 젖인 것이다.

 

  모성의 시대 그 의미는 한마디로 ’모성에로의 수렴’이다. 참된 구원은 언제나 모성적이다. 즉 여성적이 아닌 것이다. 여기에서 밀교(密敎-탄트라)의 크나큰 잘못의 근본원인이 연유되었다. 그들이 찾은 샤크티의 참된 원천 그 속성은 아무래도 모성적이다. 따라서 그들 수행자들이 불성(佛成)을 위해 여성과의 교합(交合)과 같은 불완전한 방법이 아닌 참으로 모성을 지니길 원했더라면 진리의 길은 얼마나 확실했을 것인가. 사실 여성이란 남성과 마찬가지로 반적(半的) 존재일 따름이다. 따라서 모성의 시대는 곧 구원의 시대이다. 또한 그것은 당연히 자비와 은총의 때, 무한한 사랑의 때이다. 그 모두가 모성을 드러내는 것이니, 이 종말론적 시대에 모성의 역할은 더욱 요구된다.

 

  그에 반면 부성은 딱딱하고 메마른 면은 있어 그러한 인간적인 이상향을 낳을 수는 없지만, 그 대신 차분하고 정돈된 법치국가나 이상적 민주국가를 낳을 수 있다. 금욕주의적 질서 속에서 상호공존공영하며, 제한된 자유를 누리며 자율 속에서 안정되고 영구적인 소시민사회적 국가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사회의 열도는 낮고 약하지만, 기원전 4세기경의 도시국가 아테네 같은 에토스적인 분위기가 그 사회를 조직적으로 지배하게 된다.

 

  여기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제국은 겉으론 부성적이지만 사실은 모성적 산물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제국을 형성시키고 성립시킨 구조는 부성적이나 그것을 유지시키는 원동력은 모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로마 공화정이 세력확대와 함께 필연적으로 전제적 제국주의로 변질되고만 것도 바로 거기에 이유가 있다.

 

  어쨌든 그리하여 부성적 사회에선 종교 보단 윤리가 더욱 발달한다. 아테네는 황혼에 접어들었으면서도 올페우스의 축제 보단 미네르바의 올빼미밖에 울 수 없었던 것이고, 소크라테스는 데몬의 음성이 들리는 등 그 타고난 종교적 심성에도 불구하고 아테네에선 오직 도덕적 철학자로만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공리주의, 민주주의, 인간평등사상(루소가 이것을 외쳤음은 지극히 모순적이다), 사회상호주의 등등 폴리스적 이데올로기는 이런 부성의 소산인 것이다. 근대 후로 와서 공리주의자 벤담의 고향 영국은 부성의 국가라 할 수 있고, 루소를 낳은 프랑스는 모성의 국가라 할 수 있다. 그 귀족주의에도 불구하고 영국에선 일찍부터 현실적 평등사상이 발달하여 산업혁명이 가능했다. 여기에서 ’현실적’이라는 말이 참 중요한 데, 평등사상이 현실적으로 주장될 때 그것은 부성적이 되나, 단순히 이상적으로만 요구될 때 그것은 모성적이 된다. 앞에서 말한 루소의 모순성은 그리하여 해결된다. 그것은 진실로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는 그 모성이 얼마나 강했던지 부성적 국가성격에로의 주도권 쟁탈이양 시도는 번번이 비참한 결과를 거두면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테미도르의 반동(反動)은 프랑스 체질의 산물이었고, 두 번에 걸친 나폴레옹(보나파르트와 루이)의 등장 역시 그러하다. 그것이 드골까지 계속된다. 아니 혁명에의 불같은 열정 자체가 프랑스의 모성적 체질에서 산출되었다.

 

  한편 또 하나의 모성적 국가인 현대의 러시아와 비교해 볼 때, 러시아는 프랑스의 모성이 비뚤게 나가 타락된 결과를 낳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근세에 있어 제정(帝政)에 대한 의식적 반발이 지극히 부성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 공산주의와 같은 반(反)인간적인 체제를 받아들이게 만들었지만, 그 본질적 모성은 사라지지 않아, 공산주의마저도 제국적으로 변질시키고 말았다. 더욱이 러시아가 공산주의를 품게 되었음은 마치 어머니가 아버지의 역할을 맡은 꼴이 되니 어색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필연적으로 폭력성과 잔인성을 지니게 되었고, 마치 측천무후 같은 꼴이 된 것이다. 물론 그들의 침략성 심지어는 침략전쟁마저도 모성적인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도 있으니, 국가란 원래 부성적인 성격의 산물인데 그러한 자기국가를 넘어서서 남과 섞여 보려는 욕구의 부정적인 발현이 전쟁을 낳게 되는 것이다. 그 점 영국에서의 페미니언 사회주의와 비교해 보라! 진실로 마르크스가 살아있을 때에 기거했던 영국이 오히려 순수 맑시즘에 의해 공산화 되었다면 마르크스주의는 지금과 같은 상황이 되진 않았을 것이다. 참으로 인류의 진보역사에 생산적으로 기여했을 것이다.

 

  한편 현대에 와서의 프랑스의 모성은 건강하다. 그리하여 지성과 문화의 나라가 되었으니, 특히 문화는 그 개방성과 발산력에 있어 다분히 모성적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실 문화가 이상적인 상태에 이르면 모성을 띠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이른바 프랑스에선 공산주의가 자유롭게 활동하며 상존하지만 결코 폭력성을 띠지 않고 유로-맑시즘으로 변형되면서까지 아예 기를 못 펴고 있다. 그리고 러시아와 프랑스 둘 다가 모성적 존재인 마리아에 대한 신심이 일반대중들 사이에서 두터운 것도 재미있는 현상이다.

 

  분명 모성은 삶의 한 신비이다. 온 우주만상의 모든 삶의 양식은 자기중심성을 띠고 있는데, 이 이기의 장에서 오직 모성만이 유일무이하게 탈자기중심적이니, 과연 기적같이 놀랍기만 하다. 진정 하느님으로부터 온 은총적 선물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것이 모성이다. 그 모성이 없었다면 이 우주는 파멸적인 종말을 벌써 겪고 말았을 것이다. 왜냐면 자기중심성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은 기어이 죽음의 늪을 파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성을 통해서 생명의 불씨는 보존되고, 그로 인해 자기중심성이 낳은 동심원적인 거대한 소용돌이는 해체되면서 우주종말의 시각은 자꾸만 지연되고, 그러다 끝내 하느님나라가 은총처럼 임하며 온 우주는 모성화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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