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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가톨릭 문화산책: 문학 (7) 에밀 아자르의 장편소설 자기 앞의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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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10-07 ㅣ No.186

[가톨릭 문화산책] <35> 문학 (7) 에밀 아자르의 장편소설 「자기 앞의 생」


밑바닥 인생, 그래도 괜찮아 사랑이 있으니까



갈리마르 출판사의 폴리오 시리즈 중 하나로 나온 「자기 앞의 생」. 저자명이 로맹 가리로 돼 있고 괄호 속에 에밀 아자르로 돼 있다. 7층 계단을 표지화로 삼았다.
 

프랑스 소설가 에밀 아자르의 1975년 작 「자기 앞의 생」의 마지막 문장은 "사랑해야 한다"이다. 소설의 마지막 이 한 문장이 얼마나 가슴을 힘차게 치는지는, 읽지 않고서는 도저히 알 수 없으리라. 아랍 소년 모하메드(애칭 모모)는 자기를 돌봐준 유다인 노파 로자 부인이 아파트 지하실에서 죽자 악취를 없애려 향수를 뿌려가며 시신 옆에서 며칠을 보낸다. 사랑의 위대한 힘과 문학적 감동의 힘이 거세게 몰려와 정신이 혼미한 터에 작가는 이 한 마디를 설파하고 펜을 놓는다. "사랑해야 한다." 


가장 비참한 곳에서 피어나는 사랑

소설의 무대는 유다인과 아랍인, 흑인들이 뒤섞여 살고 있는 프랑스 벨빌의 슬럼가다. 엘리베이터조차 없는 7층 아파트를 걸어서 오르내리는 뚱뚱한 노파 로자 부인은 창녀의 아이들을 데려다 키우며 근근이 살아간다. 직업상 아이를 키울 수 없는 여인들인지라 전직 창녀인 로자 부인에게 아이를 맡겨놓고는 매달 일정한 돈을 보내는 것이었다. 로자 부인은 폴란드 출신 유다인으로 아우슈비츠 포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아픈 기억이 있다. 그녀는 아우슈비츠 공포를 잊지 못해 최악의 상황에선 '아우슈비츠!'를 외치며 울부짖는다.

모로코와 알제리 등지에서 몸을 팔며 살다 늙어서 그 일을 할 수 없게 되고, 창녀의 아비 없는 자식을 맡아 키우는 것으로 입에 겨우 풀칠을 한다. 아이 어머니로부터 양육비 송금이 끊기기 일쑤지만 로자 부인은 인자한 할머니 노릇, 자상한 어머니 역할을 나름대로 충실히 한다. 세 살 때부터 더러운 뒷골목 세계에서 같은 처지의 아이들과 함께 자란 모모는 로자 부인을 통해 사랑의 뜻을 조금씩 깨달아간다.

모모는 처음엔 로자 부인이 자기처럼 부모 밑에서 자랄 수 없는 아이들을 모아 돌봐주는 자선사업가인 줄 알고 있었지만 예닐곱 살 때 어딘가에서 부쳐주는 송금수표를 받고 그 돈으로 자기에게 먹을 것과 입을 옷을 사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무튼 이 7층 아파트 한 칸은 로자 부인이 아이들을 키워주는 하숙집인 셈이었다.
 

로자 부인의 성교육

영화 '마담 로자' 포스터. 프랑스를 대표하던 미인 배우 시몬느 시뇨레의 마지막 작품으로 늙고 뚱뚱한 모습으로 나온다.
 

이 소설의 묘미는 두 사람의 대화에 있다.

"모모야, 넌 착하고 예쁜 아이다. 그게 위험하단다. 항상 조심해야 돼. 네가 네 엉덩이로 벌어 먹고 살지 않겠다고 내게 약속해라."

"약속할게요."

"모모야, 엉덩이란 하느님이 인간에게 내려주신 가장 신성한 것이란 걸 늘 명심해라. 그것이 바로 동물과 다른 점이란다. 아무리 돈을 많이 주겠다고 꾀어도 절대로 유혹에 넘어가선 안 된다."
 
이 아파트와 인근 슬럼가에는 동성애자, 성전환자, 포주, 창녀, 전과자, 홀몸노인, 병자 등 온갖 사람이 뒤엉켜 살아간다. 우리나라로 치면 쪽방촌 같은 곳이고, 그들의 삶은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밑바닥 인생이다. 이곳에서 자라면서 범죄자가 안 되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이제 열네 살, 막 사춘기에 접어든 모모에게 로자 부인은 아주 진지하게 성교육을 한다. 여기에서는 동성애가 흔해 거리로 나서면 '엉덩이'로 쉽게 돈을 벌 수 있다. 향수가게 쟈끄씨는 어린 모모를 노골적으로 유혹한다. 로자 부인은 모모와 약속한다.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몸 파는 일로 돈을 벌지 않겠노라는 약속을. 어머니를 대신해 부인은 성교육을 했던 것이다.

작가는 이 비참한 곳을 하느님의 뜻을 알고 실천하는 성스러운 공간으로 그려내고 있다. 지하실에 있는 '유다인 홀'에는 제단이 마련돼 있다. 이곳은 로자 부인이 수많은 날, 버려진 아이들과 자신과 이 세상 모든 어리석은 자의 죄를 사해달라고 기도했던 장소였다.

로자 부인과 모모가 만들어가는 세계는 참으로 가난해 맛난 것을 배불리 먹을 수도 없고 아파도 약을 제대로 쓸 수 없다. 하지만 이 세계에는 인종의 벽, 신분의 벽, 나이의 벽이 없다. 가장 밑바닥 삶을 살아가는 두 버림받은 생이 나누는 따뜻한 대화 속에는 사랑의 뜻이 담겨 있다. 남을 배려하고 용서하는 사랑의 뜻이.
 

이 작품의 주제는
 
두 사람은 남을 증오하거나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지 않는다. 혹자는 과연 이런 인생도 살 만한 것인가를 묻고 싶겠지만 모모는 밑바닥 삶을 살아가는 이들 속에서 슬픔과 절망을 딛고 살아가는 지혜와 상처를 보듬는 법을 배운다. 특히 너무 뚱뚱해져 자신의 손으로 똥도 닦을 수 없는 로자의 엉덩이를 모모가 닦아주는 장면이나, 로자가 죽고 난 뒤 모모가 로자의 곁을 떠나지 않고 지키는 모습은 깊은 감동을 준다.

궁금한 것이 있을 때마다 하밀 할아버지에게 달려가곤 했던 모모처럼 우리도 이 소설을 읽으며 스스로에게 물을 수 있어야 한다.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뒷골목 인생도 가치가 있는 것인가? 나는 내 앞의 생을 얼마만큼 사랑하고 있는가? 아니, 도대체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다"는 이 단순한 말을 나는 얼마나 깊이 느끼고 있는가?

소설이 영화화된 적이 있다. 이집트 태생의 유다인 모쉬 미르라히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이 영화는 프랑스 대표 여배우 시몬느 시뇨레가 로자 부인 역을 맡아 생의 마지막 열연을 했다. 1977년에 나온 이 영화의 제목은 '마담 로자'였다. 모모는 세미 벤 유브라는 유다인 소년이 맡아 실감 나는 연기를 했다. 소설에서는 모모가 향수를 계속 뿌리며 로자 부인의 시체를 지키다 사람들에게 발각돼 시골에 있는 나딘느 아줌마 댁으로 보내지는 것으로 돼 있는데, 영화에서는 로자 부인 옆에서 손을 꼭 잡고 함께 죽는 것으로 나온다. 보다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고 싶었던 감독의 개작 욕심 때문이었으리라.
 

'로맹 가리'의 다른 이름 '에밀 아자르'
 
로맹 가리(왼쪽)와 진 세버그 부부의 행복한 순간.
 

책이 출간됐을 때 에밀 아자르라는 무명의 작가에게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상 '공쿠르상'이 주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이름이 한 번 눈길에서 벗어난 작가에게는 스포트라이트를 다시 비추지 않는 완고한 프랑스 문단에 재도전장을 낸 로맹 가리의 또 다른 이름임이 밝혀지는 데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에밀 아자르가 로맹 가리의 조카 폴 파블로비치의 필명으로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책을 낸 적 없는 파블로비치가 한동안 작가 행세를 하고 다녔다니 귀신이 곡할 일. 비평가들이 로맹 가리를 무자비하게 공격하자 로맹 가리는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여러 권의 소설을 발표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자기 앞의 생」이다. 그는 필명으로 또다시 공쿠르상을 받는다.

1956년 「하늘의 뿌리」로 공쿠르상을 탄 바 있는 로맹 가리는 이 작품으로 권토중래했지만 "노망이 들기 전에 하밀 할아버지가, 사람은 누군가 사랑할 사람이 없으면 살 수 없다고 하던 말이 옳은 것 같다"고 한 소설 속 모모의 말이 씨가 됐는지, 자기 앞의 생을 자살로 마감한다.

로맹 가리는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으로 레지옹 도뇌르 훈장 수훈자이며, 외교관이었다. 자신의 작품을 여러 편 영화로 찍은 감독이기도 했으며, 영화배우 진 세버그와 재혼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공쿠르상을 두 번 받았다는 것,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프랑스 문단에 충격을 준 것, 권총으로 자살한 것 모두 이제는 프랑스 문단의 가십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실종 8일 만에 진 세버그의 시체가 발견되자 로맹 가리는 절망의 늪에 빠져 있다가 15개월 뒤 권총으로 자살했다는 것. 자신이 왜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소설을 써야만 했는지를 밝힌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은 자살한 다음 해에 출간됐다.
 
[평화신문, 2013년 10월 6일,
이승하 교수(프란치스코,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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