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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철학 에세이: 진정한 행복을 주는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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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11-28 ㅣ No.132

[가톨릭 철학 에세이 - 철학이 던지는 행복에 관한 열 가지 질문 11]

진정한 행복을 주는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나의 무게는 나의 사랑이다(Pondus meum amor meus)”(성 아우구스티노, 「고백록」, 13권, 7장).

“여러 특성이 모두 선한 사람 자신에 대한 관계에 속하며, 또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것처럼 벗에 대하여 관계를 맺고 있기에(그의 벗은 또 하나의 그 자신이기에), 우정도 역시 이러한 여러 특성 가운데 하나로, 이러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다름 아닌 벗으로 생각된다”(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9권 4장).

“사랑은 더 높은 차원으로 성장하고 내적으로 정화해 가며 이제 결정적인 사랑이 되고자 합니다. 결정적인 사랑이란 두 가지 의미, 곧 (오로지 이 사랑뿐이라는) 배타의 의미와 ‘영원’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사랑은 시간을 비롯한 온 삶을 그러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랑의 약속은 궁극적인 것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곧 사랑은 영원을 바라봅니다. 사랑은 참으로 ‘황홀경’입니다. 도취 순간의 황홀경이 아니라, 자기만을 찾는 닫힌 자아에서 끊임없이 벗어나 자기를 줌으로써 자아를 해방시키고, 그리하여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참으로 하느님을 발견하는 여정인 황홀경입니다”(교황 베네딕토 16세,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6항).


우리는 왜 서로 다른 사랑을 구분해야 하는가?

‘정념으로서의 사랑’과 ‘끌림으로서의 사랑’은 우리를 끊임없이 매혹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랑에서 적어도 순간이나마 생생하게 행복을 경험한다고 느끼곤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넘어서는 체험도 오직 이런 사랑 안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이라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러한 차원의 행복의 경험, 기쁨의 경험만으로 내가 시간을 이겨내고 나의 삶을 지속적인 행복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가에 대해서 조금씩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정열과 애착에 의해 사랑하는 이에게 쏟아부은 나의 호의와 관심 역시 나를 넘어서 순수하게 그에게 향했던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나의 자기중심적 추구로 귀착되는 움직임 속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 반성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행복은 지속적이고 항구한 좋은 삶이라는 관점에서 사랑을 행복의 중심으로 삼으려면, 이러한 즉각적인 정서적 움직임으로서의 사랑만으로는 부족하며 정념과 끌림을 포함하고 동기로 삼는다 하더라도 거기서 더 높은 차원으로 상승하는 사랑의 개념이 요구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높은 차원의 사랑의 본모습을 성찰하는 것은, 행복을 철학적으로 성찰하려는 우리의 노력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하겠습니다. 어쩌면 내가 어떤 사랑을 하는가에 따라 내가 이해하는 행복의 모습이 달라진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정념으로서의 사랑과는 다른, 행복에 어울리는 사랑에 대해 생각해본다는 것은 사랑이 매우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고, 그 다양한 모습의 사랑은 서로 다른 차원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리고 사실 사랑이라는 현상이 가진 다면성을 섬세하게 서로 다른 개념으로 표현하고 그것들의 유기적인 상호관계를 분명히 하는 것은 철학의 관점에서든 신학의 관점에서든 덕의 윤리학을 정립하는 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윤리학이란 무엇보다도 덕이라는 지평 안에서 행복의 참모습을 그려보려는 시도이기 때문입니다.


애덕, 참행복으로 이끄는 사랑

그리스도교 철학과 신학의 영역에서 사랑이 행복의 중심에 있으며 동시에 그 사랑이 복합적 현상이기에 그 사랑의 양상들을 분별하는 것이 참된 행복의 삶을 살아가는 데 더없이 중요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한 분이 바로 히포의 아우구스티노 성인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사랑이 우리 삶에서 주도권을 지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를 그 유명한 격언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원하는 바를 행하라(Dilige, et quod vis fac).”라는 말로 잘 요약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동시에 사랑이란 말로써 우리가 무분별한 우리의 정념과 욕망, 일시적인 욕구의 충족을 포장할 수 있다는 것을 「고백록」에서 밝히셨듯, 무엇보다 자신의 삶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는 참된 사랑은 애착의 차원이 아닌 의지의 차원에서 드러난다고 보았기에 “만일 그의 사랑이 선하다면 그의 감정들과 의지는 똑같이 선하게 되고, 만일 그의 사랑이 악하다면 그것들이 악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기에 이제 정념으로서의 사랑(amor)에 머무는 것이 아닌 더 높은 차원의 사랑은 다른 이름을 가져야 합니다. 이를 그리스도교는 애덕(caritas)이라 부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에게 애덕은 “우리가 사랑해야만 하는 것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말 안에 덕을 통한 도덕적 삶과 그러한 도덕적 삶을 통한 좋은 삶으로서의 행복이 함축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행복을 이끄는 사랑에 대한 담론에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에게 참으로 중요한 사실은 “하느님은 사랑(caritas)”이시라는 성경의 증언입니다.

여기에 그리스 철학이 사랑을 말하는 데 주로 사용하였던 에로스와 필리아 대신에 매우 드물게 사용되었던 아가페라는 단어를, 그리스도교 철학이 신적 사랑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애덕이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여 사랑에 대한 성찰의 중심으로 삼게 된 이유가 있다 하겠습니다.

하느님은 애덕의 원천이시고 그러기에 행복의 원천이시기도 합니다. 뛰어난 중세 철학사가 에티엔앙리 질송은 인간의 행복과 하느님이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사랑에 대한 성찰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하느님은 애덕이시다. 도덕적 삶은 애덕 그 자체이다. 우리가 애덕으로 살려면 하느님 곧 애덕을 향하여 나가야 하고, 동시에 미래의 행복에 대한 담보로서 애덕 곧 하느님을 소유해야 한다.

… 그러나 그것은 담보 이상의 어떤 것이다. 우리는 애덕으로 담보를 잡고 있다고 말하지 말고, 오히려 미래의 행복에 대한 보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이 보증은 되돌려야 할 담보로서 취해진 것이 아니라 장차 완전하게 완성될 선물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애덕을 가지고 있다고 하고, 나중에는 애덕 그 자체를 가질 것이라고 한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길어낸 그리스도교적 사랑에 대한 깊은 성찰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교회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에게 이어졌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우정으로서의 사랑(philia)에 대해 논하면서 밝혀낸 행복의 내용으로서 덕을 나누는 상호적 사랑, 그리고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말한 하느님 안에 참여하는 행복의 길로서의 사랑을 탁월하게 종합하고, 거기에 더욱 넓고 깊은 보편성을 부여합니다. 그리하여 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우리 행복의 길인지를 보여줍니다.

이제 행복에 대한 탐구의 마지막 여정을 이 위대한 ‘천사 박사’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는 것으로 마무리하려 합니다.

* 최대환 세례자 요한 - 의정부교구 신부. 정발산본당 주임으로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과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연재하는 동안 행복에 대한 독자들의 견해와 질문을 열린 마음으로 기다린다.(theophile@catholic.or.kr)

[경향잡지, 2012년 11월호, 최대환 세례자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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