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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문화산책: 가톨릭 문학 (5) 너새니얼 호손의 장편소설 주홍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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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7-13 ㅣ No.172

[가톨릭 문화산책] <25> 문학 (5) 너새니얼 호손의 장편소설 「주홍글씨」

법의 심판보다 더 중요한 건 내면의 소리 '양심과 도덕'


너새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 1804~1864)이라는 미국 작가의 이름은 잘 모를지라도 「주홍 글씨」(The Scarlet Letter)라는 제목의 소설은 삼척동자도 알 것이다. 영화로도 여러 번 만들어졌는데 제일 최근작인 1995년 영화에서는 헤스터 프린 역을 데미 무어가, 딤즈데일 목사 역을 게리 올드만이 맡았다. 같은 제목의 한국 영화와 TV 드라마는 호손의 소설과 별 상관이 없다.

「주홍 글씨」는 대속(代贖)의 의미로 쓰였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친일파 후손의 조상 땅 되찾기 소송이 줄기차게 이어지고 있는 우리나라와는 정반대되는 일이다.

너새니얼 호손 사진. 호손이 쓴 「주홍 글씨」는 선조의 죄와 대속, 타락과 구원의 문제를 주제로 다루고 있다.


조상의 죄를 내가 대신 갚고자

영국 청교도 후손으로 미국에서 다섯 번째 세대인 너새니얼 호손은 동인도와 무역을 전문으로 하는 부유한 항구도시 세일럼(매사추세츠주 보스턴 북부)에서 태어났다.

미국으로 이주한 조상 중 제일 윗대인 윌리엄 호손은 치안판사로서 퀘이커교도 여성을 공개 태형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보다 더 강직하고 고집 센 그의 아들 존 호손은 세일럼에서 마녀사냥 소동이 일어났을 때 19명을 교수형에 처한 재판관 중 한 사람이었다.

서인도제도에서 미국으로 팔려온 한 여성 노예가 있었다. 이 여성이 아이티에서 믿는 민간 신앙인 부두(Voodoo)교를 세일럼에 전파하는 과정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여성이 북 리듬에 맞춰 추는 신비한 춤이나 정령 로아(Loa)에 홀렸을 때 엑스터시 상태를 본 사람들이 악마에 들린 것으로 오해했기 때문이다. 이 소동은 주민들 사이에서 엉뚱하게도 저 여자가 마녀다, 저 여자도 마녀다 하며 상호 고소 고발로 이어졌는데 재판부는 제대로 조사도 하지 않고 19명을 마녀로 판결, 교수형을 내렸다. 한 여성이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존 호손에게 "신이 너의 가문에 저주를 내릴 것이다!"라고 부르짖었다. 1692년에 일어난 일이었다. 몇년 뒤 재판의 불공정성이 드러났고, 재판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단체로 단식하며 참회했지만 마녀 누명을 쓰고 죽은 19명의 목숨을 되살려낼 순 없는 일이었다.

이 일을 알게 된 호손은 보스턴 세관에서 일하면서도 조상의 죄악을 고백하고 싶은 마음과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선조의 죄와 대속, 타락과 구원의 문제를 주제로 한 장편소설을 써보기로 결심한다. 몇 편의 실패작 이후 19세기 미국 소설의 최고봉에 오른 소설 「주홍 글씨」를 완성한다. 작품의 줄거리는 이렇다.
 

용서받지 못할 사랑

영국에서 건너온 청교도 후손들이 세운 도시 보스턴은 17세기 무렵, 완고한 윤리의식이 지배하고 있었다. 젊고 씩씩한 딤즈데일 목사는 교구의 아름다운 유부녀 헤스터 프린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진다. 헤스터는 사랑 없이 결혼했던 나이 많은 남편이 죽은 줄 알고 조용히 과부로 살아가던 차에 그만 젊은 목사와 사랑에 빠졌던 것이고, 그 사랑은 펄이라는 생명체를 결실로 맺게 한다.

미국 세일럼 시내에 있는 너새니얼 호손 동상.


이 일을 발설하면 목사는 공개적으로 처형 당할 테니 헤스터는 동네 사람들의 집단 따돌림에도 함구한다. 그런데 영국에서 결혼한 뒤 죽은 줄로만 알았던 헤스터의 늙은 의사 남편은 살아 있었다. 불원천리 아내를 찾아왔더니만, 아내는 재혼하지 않았는데 자기도 모르는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있었다. 전 남편은 칠링워스라는 이름으로 바꿔 자신을 숨기고, 아내를 범한 자를 찾아내 아내와 함께 복수할 결심을 한다.

딤즈데일 목사는 목회를 하면서도, 기도를 하면서도 계속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한다. 헤스터 프린은 존경받는 목사의 앞길을 망칠 수 없다는 생각에 비밀을 지키는 어려운 과정을 견뎌내며 아기를 낳는다. 그로 인해 옷에 간음(Adultery)을 의미하는 'A'라는 글자를 크게 새겨 붙이는 벌을 받고 동네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며 투옥된다. 감옥에 옛 남편 칠링워스가 찾아와서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실토하라고 하지만 헤스터는 단호히 거절한다. 그러자 칠링워스는 자신이 아이의 아버지를 찾아내겠다고 하면서 자신이 옛 남편이라는 사실을 발설하지 말라고 헤스터에게 부탁한다.

헤스터는 동네에서 떨어진 외딴곳에서 바느질로 생계를 이어가며 딸 펄을 키운다. 그 사이 7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 사람들 사이에선 헤스터에 대한 멸시의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았다. 마을에서 존경받는 딤즈데일 목사가 병약하다고 걱정하던 사람들은 유능한 의사라고 소문난 칠링워스를 목사의 집에 머물게 하면서 주치의 역할을 맡긴다. 겉으로는 유능한 의사지만 속으로는 복수심에 불타고 있던 칠링워스는 아이의 아버지가 목사라는 사실을 눈치채고는 치밀한 복수의 계획을 세워 서서히 목사를 압박해 나간다.


양심의 가책이 스스로를 단죄케 하다

헤스터는 목사가 갈수록 수척해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다가 결국 목사관에 와 있는 주치의가 자신의 옛 남편임을 실토한다. 갑작스러운 고백에 당황한 목사가 어찌할 바 몰라 하는 사이 헤스터는 목사에게 고향인 영국으로 몰래 도망가자고 제안한다. 목사는 그 제안에 동의하고, 이틀 뒤 지사의 취임식 날 성찬식 연설을 끝낸 뒤 사랑의 도피를 실행하기로 한다. 하지만 목사는 양심의 가책을 못 이겨 양심선언을 하고 처형의 길을 택한다. 성대하게 열린 성찬식에서 연설을 마친 목사는 다른 사람들과 길을 가던 도중 헤스터와 아이 펄을 오라고 하고는 마을 사형대에 올라가서 자신이 이 여자아이의 아버지라고 대중 앞에 자백하고 처형을 당한다. 그 순간 칠링워스는 자신의 복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을 알고 분노한다. 시간이 지나서 칠링워스는 펄에게 많은 유산을 남기고 죽고, 헤스터는 원래 살던 집으로 돌아와 주홍 글씨를 가슴에 달고 남은 생을 살아간다.
 

선과 악의 기묘한 관계

호손은 이 소설을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선과 악의 기묘한 관계다. 젊고 잘생긴 딤즈데일 목사가 선을, 늙고 교활한 칠링워스가 악을 대변한다고 봐선 안 된다. 칠링워스가 아내의 부정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범인(凡人)으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헤스터가 마을 근처에 계속 머물며 바느질로 생계를 꾸려간 것은 사랑을 성취한 자의 자신감에서 나온 행위였다. 그리고 그 자신은 사랑하는 딤즈데일 곁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 호손은 A자를 새긴 옷을 입고 살아가게 한 마을 사람들을 당당하게 대하는 헤스터를 통해 죄책감을 못 느끼는 인간의 양면성을 부각시켜 우리가 선과 악을 함부로 구분 지을 수 없게 한다.

법과 처벌의 문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법은 부정한 여인 헤스터에게 그리 큰 벌을 주지 않았다. 법의 심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양심의 소리임을 호손은 말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KKK단 활동 등 사사로우면서도 무서운 처벌인 '린치'(lynch)가 횡행하는 미국 사회의 모순은 이 소설에서도 재연된다. 호손은 미국이 총기 소지가 비교적 자유로운 나라가 될 것을, 연간 수만 명이 총에 맞아 죽어가는 나라가 될 것을 전혀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미식축구 선수 O.J. 심슨이 무죄로 풀려나는 나라가 미국이다.


진심으로 뉘우치면 구원을 얻으리라

딤즈데일 목사가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는 반면 헤스터는 하룻밤이지만 사랑을 성취했다는 생각에 별달리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다. 그래서 딤즈데일은 자백하는 길을 택하지만 헤스터는 전 남편에게도 마을 사람들에게도 용서를 구하지 않고 끝끝내 당당하게 살다가 죽는다.

도덕관념의 문제도 생각해볼 법하다. 신앙의 자유를 갈망하며 신세계를 찾아온 영국 청교도 후예들은 무척 검소하고 엄격했다고 한다. 그런데 소설에 나타난 그들의 도덕관념은 왠지 배타적이고 가학적인 것 같다. 타인에 대한 깊은 이해와 진정한 사랑을 기반으로 하지 않은 도덕과 윤리는 사상누각인 것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간적인 면모를 지닌 이는 칠링워스가 아닐까. 자기가 없는 동안 목사와 바람을 피워 아이를 낳은 아내가 후회하거나 반성하는 기미를 안 보이자 복수를 하려고 했던 것이다. 영화에서는 칠링워스가 악당 이미지로 나온다. 그는 사실은 딤즈데일 목사보다 더 고뇌하는 인물이었다.

헤스터 프린은 참회하지 않았지만 잘 살아갔고, 딤즈데일 목사는 목숨을 던져 참회함으로써 결국 영혼의 구원을 얻었다. 하늘 나라의 질서가 인간 세계에서는 잘 적용되지 않는가 보다. 호손은 자기 조상의 죄에 대해서도 고민했을 것이고 법만으로는 죄와 벌이 옳게 저울질되지 않는 것을 보고도 고민했을 것이다.

권선징악은 동양적 사고요, 인과응보는 불교적 사고라고 할 수 있다. 호손은 이런 사고에 머물지 않고 우리 모두가 양심, 즉 도덕적 진실성을 지녀야 한다고 역설하고 싶었던 것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도 죄를 지었으면 참회해야 한다. 고해성사도 바로 그런 의미에서 하는 것이 아니랴.

[평화신문, 2013년 7월 14일, 이승하 교수(프란치스코,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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