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8일 (토)
(백)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이윤일(사도요한)의 증거자들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2-12 ㅣ No.656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이윤일(사도요한)의 증거자들

 

 

보지도 않고, 그럴싸하게 말하는 사람을 허풍장이 혹은 거짓말쟁이라고 한다. 그래도 그 시대를 한 번도 살아내지 않고 본 것처럼 설명하는 역사가는 거짓말쟁이가 아니다. 그것은 시간이라는 바다에 떠 있는 진실한 증언들을 모아 다리를 구축하여 그 시대를 건너다닌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징검돌들을 ‘증인’이나 ‘사료’라고 한다. 2015년 을미년이 시작되었다. 200년 전인 1815년 을해년, 영남지역은 박해로 물들었다. 이해 이윤일이 태어났다. 그리고 이윤일의 순교는 120년 전 을미년에 간행된 『치명일기』라는 사료집으로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윤일(일명 李齊賢)은 1815년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따라 상주 갈골로 갔다.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교우촌인 여우목으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회장으로 신앙생활을 하다가 체포되어 문경 관아를 거쳐 상주옥에 갇혔다. 결국 그는 대구 경상감영으로 끌려와 참수치명했다. 그의 유해는 현장에 있던 이응칠 등에 의해 형장 근처에 가매장되었다. 이듬해 아들 이위서 등이 와서 정식 분묘를 만들어 장사지냈다. 2년 후 이들은 묘를 날뫼(비산동)로 옮겨 모셨다. 이후 이윤일의 후손들은 생활터전을 찾아 이리저리 옮겨 다니게 되었다. 1세기 반이나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한국교회는 순교자들이 쓴 순교자들의 기록으로 이어져 왔다. 병인박해 때도 신자들이 순교한 때부터 바로 기록되기 시작했다. 또 이 박해에서는 생존한 선교사들이 있었다. 박해를 피해 조선을 탈출했던 세 신부는 필사적으로 재입국에 힘썼고, 기다리는 동안 순교자들의 행적을 기록했다. 특히 칼래 신부는 순교자들의 약전을 적었다. 리델 신부는 주교가 되어 다시 조선에 재입국했다. 칼래 신부의 약전이나 리델 주교의 편지가 순교자들에 대한 증거자료로 제출되었고, 페롱 신부는 병인순교자 교구재판에서 증언했다. 페롱 신부는 순교자 17명에 대해 증언했는데, 이 증언에 이윤일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윤일은 어떻게 이어져 왔을까?


병인박해 순교자에 대한 조사

신앙의 자유가 오면서 순교자들에 대한 조사는 활기를 띠었다. 1876년부터 입국한 선교사들은 파리외방전교회의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조사 원칙에 따라 예비조사를 시작했다. 신부들과 역대 회장, 복사 등 교회의 일을 하던 평신도들이 순교자들의 후손이나 순교행적, 목격자들을 찾아 나섰다. 그런데 이 조사를 더욱 활기차게 한 것은 기해·병오박해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수속 때문이었다. 입국을 기다리면서 기해박해 소식을 들었고, 입국하여 바로 병오박해를 겪은 페레올 주교는 순교자 조사를 서둘렀다. 기해·병오박해 순교자들에 관한 조사는 1847년 교황청 예부성성에 접수되어, 10년 후 순교자 82위가 가경자로 선포되었다. 그리고 교황청에서는 1864년과 1866년 두 차례나 시복조사 위임장을 조선에 발송했으나, 이 위임장은 병인박해 와중이라 교회에 전달되지 못했다. 이후 시복조사를 위임받은 조선교회는 1882년부터 5년간 본격적으로 교황청수속을 위한 재판형식의 조사를 펼쳐나갔다. 블랑 주교 주도하에 뮈텔 신부가 판사(후에 푸아넬 신부)가 되고, 뮈텔 신부와 함께 입국한 로베르 신부가 서기로 일했다. 이 결과는 1906년 교황청으로 보내졌고, 1910년 유효령의 반포와 함께 그 적법성을 인정받았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동일인들에 의해 동일한 방법, 거의 동시에 병인박해 순교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이 자료들은 초기부터 시복시성을 위한 엄격한 평가를 받으면서 정리되었다. 초기 1,310여 건에 관한 순교 사실들이 수집되었다. 이 가운데 1895년에 이르러 조사대상자들이 877명으로 압축되었다. 그리고 결국 26명이 가경자로 선정되었고, 그중 24명만이 시복되었으니 그 시복과정의 엄격함을 과히 짐작할 수 있다. 시복 대상자의 선정과정에서 르장드르 신부의 엄격한 태도는 동료 선교사들에게까지 비판의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즉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자료는 처음부터 순교사실을 중심으로, 시복을 염두에 둔 항목으로, 그리고 교회재판을 진행하면서 그 정확성과 적법성을 거듭 확인하며 판가름하는 과정을 거쳤다.

병인박해 순교자 자료의 수집은 1876년부터 1923년까지 뮈텔 신부, 르장드르 신부, 드브레 주교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중 뮈텔 주교는 파리외방전교회 신학생 시절부터 시복수속과 교회재판에 대해 체계적으로 교육받았고, 1876년 한국선교사로 임명되면서 바로 시복수속의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는 조선입국을 시도하는 동안 통킹에서 시복수속에 관한 실무적인 일도 배웠다. 그는 1880년 한국에 입국하여 순교자를 조사했다. 1890년 제8대 조선교구장으로 재입국해서는 시복수속 관계를 총지휘했다. 병인박해 순교자 자료조사에서 시복에 이른 과정은 자료수집 단계(1876-1899), 교구재판 단계(1899-1900)를 거쳐 5년에 걸친 교황청 수속을 위한 재판(1921-1925) 기간이었다. 1876년부터 본격적으로 가동된 병인박해 순교자 조사는 다블뤼 주교, 위엥 신부, 오메트르 신부 등의 유해를 발굴하면서부터 시복수속을 위한 예비조사로 논의되었고, 1884년부터 시복수속을 적극 추진했다. 1895년에는 시복수속 담당자 르장드르 신부가 그때까지 조사된 병인박해 순교자 877명의 약전이 수록된 『치명일기』를 간행했다. 당시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는 『치명일기』를 전국의 각 본당과 공소에 돌려 순교자들에 관한 보다 구체적인 증거와 누락된 순교자들에 관한 증언을 확보하고자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310건의 순교자 가운데 29명이 가경자로 선정되었고, 1899년부터 이들에 대한 조사수속을 위한 교구재판이 열렸다. 교구재판에는 100명의 증인들이 동원되었고, 증인이 거주하는 지역별로 재판이 진행되었다.(총 351회 개정) 이 결과는 1901년 교황청으로 보내졌다. 이는 1918년 예부성성에 정식으로 접수되었고, 이듬해 순교자들의 교황청 수속이 서울교구에 위임되었다. 이때 자료가 충분치 못한 3명의 순교자가 탈락되었다. 이후 1921년부터 5년간 교황청 수속 재판이 개정되어 85명의 증인들이 26위의 순교사실에 대해 증인심문을 받았다.(총 129회 개정) 각 재판의 정리단계에서는 신부들이 증인으로 나왔다. 드망즈 신부도 교구재판 98회차에 증인으로 섰다. 1922년에는 규장각에서 관변 측 자료들을 발굴하여 대조할 수 있는 행운도 누렸다. 이 재판의 결과는 1952년 그 순교의 유효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이윤일에 대한 증언자들

병인박해 순교자에 대한 순교사실 조사는 초기에는 순교자에 대한 자료를 광범위하게 조사했지만, 1899년 교구재판 기간에는 이미 선정된 29명에 대한 보완작업이 진행되었다. 교황청 재판을 위해서는 29명에 대한 심문만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1899년까지 29위에 들어가지 못한 병인박해 순교자는 순교사실이 그저 증언록으로만 남을 처지였다. 이윤일에 대한 증언은 늦게야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윤일은 관변 문헌에 관계 자료가 있었다. 병인박해 과정에서 초기 베르뇌 주교 등의 순교와 병인양요,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사건, 신미양요 등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국사범으로 처형된 천주교 신자들의 사안은 『고종실록』이나 『포도청등록』 등의 관변측 자료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 숫자는 전체 순교자에 비해 극히 일부이며, 또한 서울, 경기 중심이다. 따라서 문경 여우목의 회장이었던 이윤일이 기록에 남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다.

즉 『승정원일기(고종 3년 11월 29일)』와 『일성록(고종 병인년 11월 29일)』에 거의 동일한 내용이 실려 있다. “문경현에서 잡은 사류 중에 이제현, 김예기, 김인기 등 3명은 매우 깊이 빠진 자들이니 해당되는 율을 시행하도록 묘당에서 처리해 주기 바랍니다.”라는 경상감사 이상현의 장계이다. 더욱이 이때 이후로 천주교 신자들의 경우에는 미리 형을 집행하고 난 다음 이를 보고하도록 하는 ‘선참후계(先斬後啓)’의 원칙이 허용되었다. 이 선참후계가 허락된 이후는 지방에서 살던 천주교 신자 기록이 관변기록에 나타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이윤일에 대한 기록은 다행히도 중앙의 관변 기록에 실릴 수 있었다.

이외 이윤일의 순교 사실은 증언 자료에 의거해서 밝혀지고 있다. 초기 자료 수집단계에서 이윤일의 자료가 어떻게 수집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이윤일은 『치명일기』에 오른 877명 중 797번에 기재되었다. 순교자들에 대한 보완 사실을 각 본당신부에게 고하라는 주교의 명에 따라 이의서와 박 아녜스는 1897년경 본당신부께 이윤일의 순교사실을 적어 올렸다. 박주현도 한참 후인 1921년 본당의 페셀 신부에게 이윤일에 대한 자료를 제출했다. 1900년 교구 재판이 열렸을 때는 박주현, 이의서, 박 아녜스가 각각 증언했다. 박주현은 김 수산나의 아들이며 이윤일 처의 종질로서 이윤일은 그의 당고모부였다. 그는 증언 당시 50세였는데, 홀아비로 경상도 동래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그는 여우목에서 이윤일 가족과 함께 생활하고 있었지만, 포졸들이 들이닥쳤을 때, 홍역을 앓고 있어서 체포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모친 김 수산나는 이윤일과 함께 체포되어 결국 순교했다.

이의서는 이윤일의 아들인데 박해 이후 여러 곳으로 이사를 다니다가 용인 먹방이에서 아내와 함께 농사짓고 있었다. 그는 당시 49세였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과부가 된 이윤일의 며느리 박 아녜스였다. 박 아녜스도 용인 먹방이에 살고 있었는데 나이는 66세였다. 그는 가계(家計)가 빈한하다고 했다. 기존 문서들에서 이의서와 박 아녜스가 부부로 보고되기도 했다. 그러나 교구재판 120회에 의하면 이의서의 아내는 이 마리아이다. 이는 최휘철이 이미 지적한 바 있다. 다만 박 아녜스가 이 시몬의 부인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아직 어려움이 있다. 이의서가 상주 옥에 갇혔을 때 형수가 있었는데, 그가 박 아녜스인 것 같다. 아녜스는 이윤일을 모시고 10년 동안 살았다. 이의서와 박 아녜스는 이윤일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이와 같이 교구재판에서 이윤일에 대한 증언은 이윤일과 함께 살던 가족 내에서 이루어졌다.

한편, 1921년부터 1925년 사이에 이루어진 교황청재판에서는 주재용 신부와 박주현이 대구에서 증언했다. 1922년 주재용 신부는 17, 18회 차에서 증언에 나섰다. 이어 박주현이 22, 23회 차에 증언했다. 그는 이미 72세나 되었으며 그 당시 경상도 울산군 두서면 내와동 탑곡리에서 살고 있었는데, 당시에는 이의서와 연락이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84, 85회 차에는 다시 이윤일의 아들 이의서가 증언했는데, 이 증언청취 재판은 풍수원에서 열렸다. 교황청 재판의 증인들은 당시 활동하던 신부들도 많았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순교행적은 『병인일기』라는 제목으로 1919년 3월부터 1920년 9월(417-430호)까지 『경향잡지』에 연재되었다. 이윤일은 『경향잡지』 430호에 실려 있다.

증언을 하는 것은 역사를 사는 일이고, 증언의 진실성을 파악하고 제 자리에 넣는 일은 역사가의 기본 의무이며 능력이다. 뮈텔 주교, 드브레 주교, 르장드르 신부, 주재용 신부, 박 아녜스, 이의서, 박주현 등 많은 사람이 이윤일을 역사 위에 띄웠고 우리는 이를 전달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윤일은 누가 무엇을 어떻게 전한 모습으로 지어졌는가?

[월간빛, 2015년 2월호,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2,040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