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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사목] 학교에서 노동의 법과 권리를 가르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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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2-24 ㅣ No.983

[김경집의 세상 속으로] 학교에서 노동의 법과 권리를 가르쳐라

 

 

우리는 모두 노동자다

 

‘그는 일한다.’ ‘그는 노동한다.’ 두 문장은 같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느낌이나 태도는 다르다. ‘노동’이라는 말은 ‘천한 일’이라는 어감으로 써왔다. 몸 써서 힘들게 일하는 것을 노동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거기에 ‘계급’이라는 개념도 억지로 넣었다. ‘일’은 포괄적이다. ‘누구나 일한다.’ 그 말에는 아무 저항이 없다. 그러나 ‘누구나 노동한다.’ 하면 뭔가 어색하고 불편하다.

 

그러면서 ‘노동은 신성하다.’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는 ‘신성한 노동’은 소수의 강자와 부자를 위해 부지런히 일해서 그들의 이익을 채워주는 뜻에서 신성할 뿐 정작 ‘노동하는 사람’의 신성함은 외면한다. 그 괴리는 비겁과 차별에서 온다. 군사정부들은 노동이라는 말 자체를 꺼렸다. 그게 교육을 통해 일반적 태도로 굳었다. ‘노동자의 날’도 ‘근로자의 날’로 바꿨다. 그렇게 노동은 꺼리는 말, 위험한 말이 되었다. 그러나 노동과 일은 같은 말이다.

 

‘우리는 모두 노동자다.’ 일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양한 방식으로 노동한다. 노동해야 살아갈 수 있다. ‘금수저’ 물고 태어난 소수는 안 그럴지 모르지만. 노동자는 ‘노동력을 제공하고 받은 임금으로 생활을 유지하는 사람’이다. 그게 사전의 정의다. 그러나 꼭 임금을 받아야 노동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 노동 아닌 것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노동자다. 그 말에 계급이나 차별의 악습을 빼면 당연히 그렇다. 그래야 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우리는 노동을, 아니 ‘노동’이란 말을 삐딱하게 본다.

 

노동은 내 존재의 근거고 삶의 방법이다. 그러려면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지불받고 내 나름의 삶을 기본적으로 영위할 수 있는 건강한 분배와 소비의 방식이 보장되어야 한다. 경제적 대가를 많이 받건 적게 받건 우리는 모두 노동한다. 그런데도 노동이라는 말에 적대감이나 혐오감을 느끼는 이도 있다. 이러니 우리에게 노동은 신성한 것이 아니다. 하층의 삶의 방식일 뿐이다. ‘노동하지 않으려고’ 죽어라 공부한다. 대기업 책상이나 검사나 장관 자리에 앉으면 노동이 아닌가? 우리는 모두 노동자다.

 

 

어렸을 때부터 가르쳐야

 

많은 학생이 아르바이트를 한다. 자기가 필요한 것은 자기가 벌어야 한다는 걸 일찍부터 경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경제활동일 뿐 아니라 노동의 중요성을 깨닫는 기회다. 그러나 대부분 제대로 노동의 대가를 받지 못하거나 심지어 착취와 폭력에 공공연하게 노출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물론 약자인 학생들을 착취하는 사용자들이 비난받고 법률적 책임을 져야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만일 이들 학생이 제대로 노동에 관한 법률과 권리에 대해 알고 있다면 그런 폭력에 무방비 상태로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교육과정 중에 과연 노동에 관한 법률과 철학에 대한 교육 내용을 학습하고 있는지부터 물어야 한다. 실업계 고등학교 학생들이 현장실습을 나가기 전 형식적으로 간략하게 알려주는 게 고작이다. 헌법에 보장된 노동의 권리에 대한 법률 지식뿐 아니라 노동 자체에 대한 깊은 성찰을 가르쳐야 한다.

 

우리의 자녀들은 대부분 학교를 졸업하면 노동자가 된다. ‘노동자’라는 용어 자체에 대한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경제발전에서 노동은 어느 정도의 희생을 강요하거나 지나친 요구를 자제해야 한다고 조장하는 언론 등의 영향도 크다. 여전히 노동의 권리에 대해 모른다거나 사회가 노동에 대한 철학이 결핍하다면 이것은 심각한 문제다.

 

노동삼권과 근로기준법 등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일방적 희생과 자의적 해고의 위협에 노출되는 현실은 학교에서 제대로 노동의 권리와 법률에 관한 교육이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기본 권리에 대해 아무런 교육도 없이 노동현장에 투입되어야 한다는 건 비인격적이고 반인권적인 결과를 구조적으로 만들어내는 고약한 일이다.

 

우리가 거의 노동자이면서 최저시급이 얼마인지 관심을 두지 않는 것도 ‘내 일이 아니면 된다.’는 식의 이기적 개인주의에 함몰하게 하는 사회적 악습이다. 내가 시급을 받지 않더라도 그건 기본적으로 알아야 한다. 그건 ‘동료 시민들’에 대한 최소한의 공감이다. 그래야 이익에 대한 공정한 분배가 가능해지고 사회적 건전성도 확립할 수 있다.

 

노동의 권리에 무관심하거나 경시하는 사회 분위기는 자기모순에 빠지게 한다. 자신의 권리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업신여기는데 어떻게 자신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으며 사회적 연대감을 확보할 수 있을까? 선진국은 학교 교육과정에서 노동문제에 대한 광범위한 교육을 시행하고 있다. 단순한 권리에 대한 지식에 그치지 않고 경제 · 사회 · 윤리적 측면의 교육을 교육과정에 포함하고 있다.

 

독일의 경우 초등학교부터 정규 수업으로 철저하게 가르친다. 학생들은 ‘모의 노사교섭’을 수업을 통해 배우며, 기업경영에 관한 자료를 주고 학생들이 스스로 노사 양측 대표를 선정해 협상하는 과정을 경험하게 한다. 단체교섭 등에 관한 자세한 내용을 가르치고 부당한 절차에 대해 항의 문건 만드는 법, 협약 체결 뒤 언론과 인터뷰하는 요령 등도 배운다.

 

다른 나라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학교 교육과정에서 단체교섭권 등에 대해 세밀하게 배운다. 단순히 협상의 기술만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중요함과 정보의 비대칭성에 대한 비판과 인간의 가치, 그리고 연대감 등을 배움으로써 개인의 삶과 사회적 체제를 건강하고 견고하게 만드는 초석이 된다.

 

노동에 관한 선진국의 교육과정을 보면 정말 부끄러울 지경이다. 2007년 노사정위원회는 노동인권 교육 강화를 주문했다. 그래서 제8차 교육과정에 도입하도록 교육부에 제안했다. 교과서에서 ‘노동’이라는 단어조차 몇 번 나오지 않는 현실을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적어도 근로기준법과 노동삼권에 대한 올바른 교육을 요구했다. 그러나 거부되었다.

 

올바른 노동의 권리가 마련되지 않는 한 정상적인 사회는 불가능하며, 무엇보다 마땅히 배웠어야 할 내용을 몰라 사회에서 구조적 불이익을 강요당하는 모순에 노출되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교육부는 노동인권 교육이 계급적 성향의 교육으로 변질하여 근로자의 권리만 강조하는 방향으로 편향될 가능성이 있다는 전국경제인연합회나 한국경영자총협회 등의 지적에 순응했다. 그 밖에도 교육부는 다양한 노동인권 교육을 필수 교과과정에 담고 실질적이고 내실 있는 교육을 시행할 조치를 마련하라는 요구를 거부했다.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는가! 이 나라 교육은 그저 학생들을 공부하는 기계로 만들고 부당한 요구에도 순응하며,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인권을 유린당해도 고스란히 떠안고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싶은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교육부는 결코 그래서는 안 된다.

 

이제라도 학교에서 노동의 소중함과 존엄성을 가르치고 정당한 권리에 대해 심층적으로 학습하게 해야 한다. 그러려면 교과과정에 노동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과 노동법을 포함해야 한다. 그것이 올바른 가치관을 키워주는 교육의 본질적 사명이기도 하다.

 

이런 문제를 해소하려면 다음 세대를 위한 기성세대와 자식들의 미래를 위한 부모들의 문제 제기와 공론화를 통해 이른 시일 안에 이러한 교육이 시행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런 게 진짜 연대의 힘이고 가치이다. 도대체 언제까지 노동의 문제를 이념의 문제로 낙인찍고 정당한 요구와 주장마저 ‘종북, 좌파’ 운운하며 억압할 것인가? 그 억압의 대상이 바로 우리 자신이고 우리 자식들인데!

 

 

교회도 공부하고 실천해야

 

교회도 노동에 관한 법에 대해 충실히 공부하고 실천해야 한다. 그것을 외면하고 착취자에게 복을 빌어준다면 그것은 공정한 노동과 정의에 대한 우롱이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을 꾸짖으며 하신 말씀을 깊이 성찰해야 한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루카 11,42).

 

하느님 사랑은 부당한 착취의 거부다. 그 틀 안에서 노동은 신성하다. 그러나 그 말이 단순한 포장이면 거짓이다. 노동은 단순히 임금을 받으려고 제공하는 품이 아니다. 노동을 통해 내 삶을 실현하고 자아를 완성한다. 그러므로 노동의 권한과 법의 보호는 필수다.

 

법이 약자를 외면하는 사회는 망한다. 아래가 꺼지면 결국 위도 무너진다. 그런 연대감을 가져야 한다. 중산층을 만드는 것이 노동자의 몫이다. 노동자가 살아나야 중산층이 커진다. 그래야 사회가 건강해진다.

 

우리는 모두 노동자다. 정신들 차리자. 그리고 당당하게 노동에 관한 권리와 법률을 가르치고 감시하도록 교육하자. 학생들에게 그것을 가르치면서 어른들도 새삼 다시 배우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 김경집 바오로 - 인문학자.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 「고장 난 저울」을 냈다.

 

[경향잡지, 2017년 2월호, 김경집 바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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