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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그리스도교 철학자: 성 토마스 아퀴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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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7-30 ㅣ No.174

[그리스도교 철학자] 성 토마스 아퀴나스


교회사 안에서 철학적으로 가장 영향력이 있는 학자를 뽑으라고 한다면, 주저 없이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를 꼽는 사람이 많습니다. 수도자로, 철학자로, 그리고 신학자로 평생을 학문과 저술에 매진한 그가 남긴 방대한 작품들이 여전히 철학사 안에서, 그리고 특별히 토마스주의자(Thomist)들 안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며, 숨을 쉬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토마스의 생애와 주요 작품들

스콜라철학을 집대성한 공로를 인정받아, 교회로부터 ‘천사적 박사(Doctor Angelicus)’라는 칭호를 부여받은 토마스는 1225년경 이탈리아 나폴리 근처, 아퀴노(도시의 이름이자 가문의 이름)라는 마을의 로카세카 성에서 그라펜 란트울프 아퀴노의 일곱 번째 아들로 태어납니다.

다섯 살에 성베네딕토수도회 몬테카시노 수도원에서 초등교육을 받은 토마스는 1239-1244년에 나폴리대학에서 일반학문을 공부한 뒤,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1244년 도미니코수도회에 입회합니다. 가족들의 영향권에서 토마스를 떼어놓으려 했던 수도회는 그를 로마와 볼로냐로 보내지만, 도중에 가족들에게 붙잡혀, 1244년 5월부터 1245년 가을까지 로카세카 성에 감금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토마스의 의지가 매우 굳건하여 결국 가족들이 뜻을 굽히게 되고, 도미니코회 총장의 권유로 파리대학(1245-1248년)에서 수학하게 되는데, 거기서 토마스는 성 대 알베르토라는 위대한 스승을 만나게 됩니다. 1250년과 1251년 사이에 사제품을 받은 토마스는 쾰른으로 교수 자리를 옮긴 알베르토를 따라 쾰른에서 1252년까지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다시 파리로 돌아와 처음으로 롬바르두스의 「명제집」에 대한 강의를 시작하여, 1256년부터는 신학강의를 하게 됩니다.

1259년에 토마스는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와 나폴리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합니다. 이후 1261년에는 오르비에토에 있는 도미니코회 교수단의 수장으로 수도원에서, 그리고 1265년에는 로마의 신학교수로 로마 교황청 소속 학원에서 1268년까지 강의를 합니다. 이때 토마스가 처음으로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을 집필하기 시작합니다. 1268년부터 1272년까지 토마스는 다시 파리대학에서 신학교수로 강의하게 되고, 그의 많은 저술들은 이 당시에 집필됩니다. 「신학대전」의 많은 부분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주해서」들도 여기서 저술됩니다.

1272년 초에 토마스는 파리를 떠나, 이탈리아로 돌아와 1273년 말까지 나폴리에서 남은 열정을 모아 가르쳤습니다. 위대한 철학자요 신학자였지만 사색을 통해 자주 황홀경에 이르기도 했던 토마스는, 1273년 12월에 미사를 봉헌하던 중 신비체험으로 모든 저술활동을 중단하게 되는데, “내가 쓴 모든 것이 지푸라기처럼 보인다.”는 말을 남기면서 붓을 꺾습니다. 그러던 1274년 3월, 그레고리오 10세 교황의 부름을 받아 제2차 리옹공의회에 참석하려고 떠난 길에서 낙마하여 포사노바의 시토회 수도원에서 치료를 받다 주님 안에 영면하게 됩니다.

그 뒤 불과 50년이 채 지나지 않은 1323년 토마스는 요한 22세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고, 1567년에는 영광스럽게 ‘교회학자(Doctores ecclesiae)’ 칭호를 부여받습니다. 토마스가 후대에 남긴 위대한 저서들은 현대의 책으로 200쪽씩 묶어도 400권가량이나 되는 엄청난 양입니다.

토마스의 주요 작품만 열거해 본다면, 「신학대전」, 「이교도 논박(Summa contra Gentiles)」,「가톨릭 신앙의 진리(Quaestiones Disputate de Veritate)」, 「존재자와 본질에 대하여(De Ente et Essentia)」, 「명제집 주해(Scriptum super Libros Sententiarum)」 등이 있고, 아리스토텔레스 작품에 대한 주해서로, 「영혼에 대하여(De Anima)」를 위시하여 다수가 있으며, 위 디오니시오와 보에티우스에 대한 주해서와 성경주석서, 그리고 「악에 관한 논제」, 「거짓과 오류에 관하여」 등의 소품집이 전해집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의 신(神)존재 증명

13세기 말까지 이어진 십자군 전쟁으로 이슬람 세계와 서구의 관계가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있을 때, 스페인의 코르도바와 톨레도의 무슬림 학자 밑에서 공부하던 서유럽 학자들에 의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들이 알려지고, 이 저술들이 라틴어로 번역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유입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토마스는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신학과 종합하고자, 이성과 신앙의 조화 속에서 자신의 길을 개척해 갑니다. 이러한 토마스의 노력이 잘 드러나는 것이 「신학대전」 서두에서 논하고 있는 ‘신존재 증명’입니다.

일명 ‘다섯 가지의 길(quinque viae)’이라 불리는 토마스의 ‘신존재 증명’은 초심자들에게 주제가 허락하는 한 최대한 간단명료하게 신이 우리에게 알려지는 것을 소개하려는 교수지침서로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근본적인 문제에서 출발합니다. 토마스는 신에 대한 지식은 타고 나는 것이라고 여겼으면서도, 그 지식이 막연하고 조악할 때가 많아 입증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신존재’의 자명성에서 좀 더 분명히 드러나는 것, 곧 신의 결과물에 의해 증명되어야 하는 것을 이성으로 밝히고자, 스스로 신에 대한 신앙을 배제하고, 철저히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적 사유에 의존하여, 신존재 증명을 꾀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증명을 앞에서 말한 대로 다섯 가지 방법으로, 곧 인과관계 안에 ① 제1원인에서, ② 제1운동자에서, ③ 필연적 존재에서, ④ 완전성의 최고단계로, 그리고 우주만물의 ⑤ 목적인(目的因) 안에서 신을 이성적으로 찾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신존재를 증명하면서도, 토마스는 ‘신이 존재한다.’에서 존재의 의미가 우리가 사용하는 존재의 의미와 같을 수는 없기에, 신에게 유비적인 언어를 적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분명 우리 이성만으로는 절대 도달할 수 없는 한계의 여지를 남기고 있기에, 토마스에게 이성적 역할은 다시금 신학적 영역의 여백을 남기고 있습니다.


진정한 행복을 위한 토마스의 윤리학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사유를 근간으로 당대까지의 모든 윤리적 통찰을 아우르고, 이를 뛰어넘는 그리스도교적 윤리사상을 「신학대전」 II부에서 전개합니다.

인간의 ‘최종 목적’이 행복이라는 전통적인 통찰에서 출발하여, 일시적인 즐거움이나 쾌락이 아니라, 지속성과 진정성을 향한 의지가 누릴 수 있는 행복은 ‘보편적 선’에서 이루어질 수 있음을 확신하고, ‘보편적 선’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토마스는 재물이나 감각적 쾌락, 그리고 권력이 ‘보편적 선’에 부합하지 아니하고, 이는 오로지 ‘존재 자체’인 신 안에서 찾을 수 있기에, 인간 삶 전체의 목적을 신 안에서 찾고 있습니다. 곧 진정한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무한한 선’이신 ‘신의 본질’을 ‘직관’하는 ‘지복’에서 이루어질 수 있음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불어 ‘신을 인식하고 사랑하는 것’ 안에 ‘궁극적인 선’에 도달할 수 있는 피조물은 오로지 인간뿐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 허석훈 루카 - 서울대교구 신부. 1999년 사제품을 받고, 독일 뮌헨 예수회철학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교구 통합사목연구소 상임연구원을 지내고 지금 가톨릭대학교 교수로 있다.

[경향잡지, 2013년 7월호, 허석훈 루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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