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월)
(백)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아버지께서 보내실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선교ㅣ복음화

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파리외방전교회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4-25 ㅣ No.166

[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파리외방전교회 본부를 가다 (상)


‘피의 순교’ 두려워 않던 숭고한 넋 깃들어

 

 

2003년 마련된 파리외방전교회 박물관. 김대건 신부를 비롯해 아시아 각국 선교지 관련 유물과 선교사들의 유품이 전시돼 있다.

 

 

프랑스 파리 중심가 ‘128 뤼드 박(Rue du Bac)’ 거리. 한 지붕 아래서 가장 많은 성인이 나왔다고 해서 농담 삼아 ‘순교 전문대학’이라 불리는 장소. 1658년 아시아 지역 선교를 목적으로 교구 소속 신부들로 결성된 프랑스 최초의 외방선교회인 ‘파리외방전교회’ 본부가 위치해 있는 곳이다.

 

다소 육중해 보이는 짙은 갈색 문을 열고 들어서니 박물관 및 성당 건물이 바로 마주하고 있었다. 그 옆 창살문 너머로는 본부 건물 출입구가 내비쳤다.

 

전교회가 창설될 당시 이 지역은 파리 외곽에 속한, 일명 ‘변두리’였다고 했다. 서울의 강남지역이 70~80년대 이후 부상한 것처럼 현재 파리외방전교회 본부를 둘러싼 일명 7구 지역은 대형 백화점이 들어서 있고 각국 대사관들이 자리 잡고 있는, 파리에서도 대표적인 중산층 동네로 꼽힌다.

 

350여 년 역사 속에 복음을 위해 순교의 피를 뿌린 선교사들의 숭고한 넋이 깃들여진 곳. 무심히 바쁜 걸음으로 지나가는 시민들 사이에서 또 번화한 건물들 중간에서 왠지 세상을 향한 무언의 예언자 같은 모습으로 비춰졌다.

 

알려진 대로 한국교회와의 인연은 1831년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브뤼기에르 주교가 초대 조선대목구장에 임명되면서부터다. 이런 면에서 파리외방전교회의 한국 선교역사는 곧 한국 천주교회의 형성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본부 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200여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초기 한국교회 설립의 시간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박물관 위층에 마련된 성당으로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그간의 전교회 역사 속에서 수많은 선교사들이 회원들과 가족들의 기도 속에서 파견미사를 거행하던 곳이다. 성당 입구 좌측 벽면 샤를르 쿠베르탱이 그렸다는 작품이 눈에 띈다. 피의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고 머나먼 동양의 나라로 떠나는 젊은 선교사들의 비장한 얼굴, 그리고 자식과 형제를 머나먼 극동의 나라로 떠나보내야 했던 가족들 심정이 헤아려지면서 마음이 아렸다.

 

파견을 앞둔 선교사들은 이 성당에서 파견미사와 파견식을 거행한 후 본부 정원의 성모상 앞에서 회원들과 마지막 기도를 올리고 보르도 항구로 가서 선교지로 떠났다 한다.

 

정원에서 바라본 파리외방전교회본부 건물. 현재는 아시아에서 프랑스로 유학온 사제들의 신학원 기능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떠나라! 복음의 군대여, 그대들의 소망을 이룰 날이 왔다. 선교사들이여, 그대들의 발자취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친구들이여, 이 생에선 안녕을. 언젠가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이오.” 라는 선교사 파견 노래가 울리는 속에….

 

1843년 말 파리외방전교회 성가대 책임자로 4년 반 정도 일했던 19세기 프랑스 대작곡가 ‘구노’가 성가대를 맡으며 오르가니스트로 일했던 과거 이야기를 들었다. 그 기간 동안 구노는 사제로서의 꿈을 가지며 2학기 동안 신학 강의를 들었으나 1847년 신학 공부를 포기하고 1848년에는 성가대 지휘 자리도 그만 뒀다고 알려진다. 그는 한국에서 순교한 앵베르 범 주교와 절친한 사이였다. 어느 날 범 주교가 조선 땅에서 순교한 소식을 접하고 조선교회와 순교자를 위해 작곡한 곡이 현재의 「가톨릭성가」 284장 ‘무궁무진세에’다. 성당 지하 1층에 마련된 박물관에는 구노가 작곡한 그 악보가 전시돼 있었다.

 

현재의 박물관은 2003년 개관됐다. 이전에는 본부 1층에 마련된 몇 개의 방들로 전시실이 구성됐으나 2000년 선교회 건물이 대대적 수리에 들어가면서 지금과 같은 박물관으로 단장돼 순례객의 발길을 모으고 있다. 최근 들어 매년 방문객 수가 늘고 있어 지난 한 해 동안만 8만 명이 다녀갔다고 한다.

 

이곳에는 동양 각지에서 활동했던 선교사들의 유품들과 한국을 비롯, 각 선교지와 관련된 물품들이 전시돼 있다. 김대건 신부의 유물을 포함해 1838년 베트남에서 순교한 피에르 보리 신부가 처형당하기 직전까지 목에 차고 있던 칼, 선교사들이 차고 있던 족쇄, 피 묻은 헝겊, 망나니가 쓰던 칼 등이 눈길을 모은다. 선교사들이 현지에서 입고 다니던 옷들을 보며 그들이 얼마나 전교지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었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보리 신부가 죽음 직전까지 쓰고 있었다던 칼은 이 박물관의 유래가 됐다고 볼 수 있다. 어찌어찌 이 칼이 보리 신부가 순교한 다음 외방전교회 본부에 오게 됐는데 그 후 선교사 파견을 앞둔 후배 신부들은 본부를 떠나기에 앞서 칼 앞에서 묵상 하는 것이 관습처럼 됐다는 것이다.

 

박물관내 성당. 파리외방전교회를 찾은 한국 순례객들이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지난해 전교회 창립 350주년 기념식을 가졌던 파리외방전교회는 그간 4300여 명의 선교사를 아시아 각국으로 파견했다. 그리고 170여 명의 순교자를 배출했다. 이들 중 12명이 한국에서 순교, 그중 10명의 선교사가 1984년 시성됐다.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선교사들이 현지에서 보낸 수명은 평균 3년이 넘지 못했다고 한다. 순교로 인한 죽음도 있었지만 전염병, 기아, 강도 피습 등의 이유로 선교사로서의 짧은 생을 마감해야 했다.

 

현재는 250여 명의 선교사들이 아시아 12개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본부에는 15명의 회원과 함께 60명 정도의 아시아 교회 유학생 신부들이 생활하고 있다. 일종의 신학원인데, 과거에 비해 지원자가 줄면서 회원 수 역시 줄어들게 되었고 이런 배경에서 프랑스교회 유학 사제들을 돕는 모습으로 전교회 활동 몫을 넓힌 것이라 볼 수 있다. 본부에서 생활하고 있는 유학생들을 포함해서 파리외방전교회가 프랑스 내에서 돌보고 있는 전체 유학생 수는 100명 정도라고 한다. 아시아인 사제 양성에 힘썼던 그간의 전교회 고유 몫을 또 다른 모습으로 아시아교회와 나누고 있는 것이다.

 

파리외방전교회 본부 정원에는 동양적 이미지가 물씬 풍겨 나오는 팔각정이 있다. 이 팔각정 앞에서 파리외방전교회 회원들은 동료 선교사들의 순교가 알려지면 함께 모여 감사의 송가인 ‘테 데움(Te Deum)’을 불렀다고 한다. 1831년 브뤼기에르 주교가 초대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된 후 1886년 한불 조약으로 종교의 자유가 이뤄질 때까지, 그 사이 조선에 밀입국한 선교사는 30여 명에 달한다. 당시 본부에서 조선은 가장 위험한 나라였지만 그만큼 선망의 나라로 여겨졌었다고 했다. 2003년 서울 명동본당 신자들이 뮈텔 대주교와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세운 한국순교성인 현양비가 정원 한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박해로 점철된 한국 초기교회 시절, 교우들과 함께 피를 흘리신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을 기리며, 한국교회를 위해 봉사하신 외방전교회의 모든 사제들….’ 현양비에 적힌 글귀들이 새삼 깊숙한 의미로 다가왔다. 시공간을 뛰어 넘어 하느님 안에서 맺어진 선교사들과 한국교회의 굳은 신앙적 교감을 드러내는 모습이었기에…. [가톨릭신문, 2011년 4월 10일, 파리(프랑스) 이주연 기자]

 

 

[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파리외방전교회 (하) - 한국지부의 역사


‘대개척자들’, 한국전쟁 때 12명 순교

 

 

1932년 5월, 파리외방전교회 총장 게브리앙 주교 방문 기념으로 대구 성모당 앞에서 선교사들과 기념촬영.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로, 대구교구 초대교구장을 맡았던 드망즈 주교다.

 

 

1801년 주문모 신부가 6년의 한국 선교 끝에 순교하고 난 뒤 한국 신자들은 교황에게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다. 두 번의 실패 끝에 마침내 세 번째 편지가 교황 레오 12세에게 무사히 전달됐고 교황은 파리외방전교회에 선교사 파견을 청했다.

 

당시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서는 교황의 의견에 미온적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총 회원이 38명뿐인 상황에서 새로운 선교지에 보낼 인력과 재원은 턱없이 부족했고 ‘조선’이란 곳은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또 밀입국한 이들에게 무자비하다고 전해진 악명 높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 고민으로 선교사 파견 결정을 할 수 없었던 파리외방전교회 본부는 1828년 회원들에게 회람을 돌렸다. 혹시 지원자가 있다면 선택권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막 방콕 보좌주교로 임명된 바르텔레미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에 가겠노라고 자원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조선교구 초대교구장으로 브뤼기에르 주교를 임명, 그렇게 파리외방전교회와 한국교회는 연을 맺었다.

 

파리외방전교회 한국지부 회원들. 연피정 중 미사를 마치고 한자리에 모였다. 회원 대부분은 외국인사목 피정 영성지도 병원사목 등 특수 사목 분야에서 활동 중이다. 서울대교구 원로사목자 최승룡 신부가 자리를 함께했다.

 

 

그러나 조선 땅을 밟기도 전에 브뤼기에르 주교는 운명을 달리했고 그 뒤를 이어 모방·샤스탕 신부가 선교사를 자청했다. 그런 상황에서 1836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로는 최초로 모방 신부가 입국에 성공했다. 또 이듬해에는 샤스탕 신부, 후에 제2대 조선교구장에 임명되는 앵베르 신부도 조선에 들어오게 된다.

 

모방 신부는 입국한 지 몇 달 되지 않은 상태에서 3명의 젊은 조선인을 중국으로 보내는 등 현지인 사제 양성 작업을 시작했다. 그것은 파리외방전교회 활동의 특수성이기도 했다. 김대건·최양업 신부 탄생은 그런 배경에서 이뤄졌다.

 

1886년 한불조약으로 종교자유가 명시화되고, 그 후 10여 년이 흘러 조선에 비교적 종교 자유가 확실해졌던 1900년경, 파리외방전교회는 명동대성당을 건축하고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 수녀들을 초청했다. 특히 서울교구장 뮈텔 주교는 서울신학교를 세워 수십 명의 한국인 사제를 배출시켰다. 독일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엔수도원을 찾아 선교사 파견을 요청했으며, 메리놀외방전교회와 성골롬반외방선교회에도 선교사 지원을 청해 평양 춘천 지역을 각각 이들에게 맡겼고, 원산지역은 성 베네딕도회 회원들에게 이양했다.

 

이후 한국전쟁 전까지 부이용·베르몽·시잘레 신부 등 열성적인 신부들의 활동으로 파리외방전교회 한국지부는 소위 ‘대개척자들의 시대’를 맞는다. 특히 델랑드 신부와 생제 신부는 예수성심시녀회와 성가소비녀회를 각각 설립했는데 이 두 수녀회 모두 현재 한국교회 여성수도회 안에서 중추적인 자리를 잡고 있다.

 

6·25 전쟁으로 인해 12명의 회원이 학살되는 비극을 다시 겪어야했던 파리외방전교회는 휴전 이후로도 40여 명이 활동했으며 현재는 12명의 회원이 남아있는 상태다. 한국지부 본부도 2008년 11월 서울 성북동에서 합정동 전진상센터로 옮겨왔다.

 

주님공현대축일은 파리외방전교회의 주보 축일이다. 사진은 축일 미사가 봉헌되고 있는 모습. 전교회는 매년 이날 회원들이 함께한 가운데 축일 미사를 거행한다. 지난 2008년 주의공현 대축일 에는 350주년 기념 미사를 봉헌한바 있다.

 

 

홍세안 지부장 신부가 지부 본부를 지키고 있고 회원들 대부분은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사목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들이 전체 모이는 때는 피정 등을 포함 일 년에 1∼2번 정도. 활동 영역은 병원 원목, 외국인 및 이주노동자 사목, 피정·영성지도, 교도사목 등 다양하다. 가장 혜택 받지 못하고 소외된 이들을 찾아 봉사하는 노력에 초점을 두고 있다.

 

지구 전체 인구 중에서 60%의 비중을 차지하는 아시아 대륙이지만 그 인구 비중만큼 가톨릭 신자 수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파리외방전교회가 해야할 일은 아직도 많다는 의견이다.

 

한국과 관련해서는 특히 북한교회에 깊은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홍세안 신부는 앞으로 북한이 개방되면 북한 선교를 위해 투신할 예정임을 밝혔다. 이미 몇 해 전부터 상당수 파리외방전교회 사제들은 인도적 구호단체 인솔을 위해 북경을 통해 북한에 다녀온바 있다.

 

한국 사회 내부적으로도 제 상황들이 급변하고 있는 시점에서 전교회가 함께 도와야할 사목적 과제가 많다는 생각이다. 예를 들면, 다문화 가정이 늘고 있는 처지에서 그 2세들에 대한 교회의 배려 역시 필요해 질 것이라는 예상, 그리고 점점 교회를 떠나고 있는 젊은이들에 대한 관심 등이다.

 

사회가 변하는 만큼 그에 응답하기 위한 교회의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러한 새로운 도전에 답할 파리외방전교회의 활동 반경 역시 새로워 질 것이라는 입장이다. 이 같은 한국지부의 시도를 위해 2∼3년 내 본부로부터 2명 정도의 젊은 사제가 합류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100여 년 넘게 한국교회와 고통·기쁨을 함께 해온 파리외방전교회. 각 시기마다 한국교회가 필요로 하는 요청에 노력해온 이들은 그 가운데 가장 큰 봉사를 ‘희망을 품고 한국인 사제 양성에 늘 힘써 왔던 것’으로 꼽고 있다. 앞으로도 한국교회와 함께하는 이들의 활동은 다양한 방법으로 계속될 것이고 한국 신자들과 이어질 것이란 전망이다.

 

 

[인터뷰] 파리외방전교회 총장 골롱브 신부


“한국 평신도, 선교사 심장 울렸다”

 

 

“한국 선교는 파리외방전교회 역사 안에서도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교황청의 요구가 아니라 바로 한국 신자들의 자발적 요청에 의한 선교였다는 면이 그렇습니다. 그러한 신자들의 바람, 그리고 전체 교회에 대한 믿음이 브뤼기에르 · 앵베르 주교와 샤스탕 · 모방 신부와 같은 초기 선교사들의 심장을 울렸고 순교가 확실한 상황임에도 선교를 자청할 수 있도록 결심하게 만들었습니다.”

 

파리외방전교회 총장 조즈 골롱브(Gerges Colomb) 신부는 “파견 초기 전교회 내부에서 다소 반대하는 면이 없지 않았지만 곧이어 3명의 신학생을 마카오로 유학 보내는 과정에서 앵베르 주교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그 이후 10명의 순교 성인이 나온 한국 선교에 아무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밝히면서 “한국 선교는 초기 교회 신자들의 신앙심과 충실함에서 나온 것이고 초기 선교사들의 사랑과 희생에 대한 답변”이라고 강조했다.

 

골롱브 신부는 “현재 한국교회에 많은 교구 성직자가 생겨 난 것은 파리외방전교회의 영향이 클 것”이라고 말했다. 선교 시작부터 파리외방전교회의 목적이 자체 교구 성직자들에 의한 한국교회 설립이었고, 교구 성직자 양성에 우선권을 뒀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수도회를 통해 선교가 이뤄진 필리핀 · 인도네시아교회와는 대조를 이룬다고 전했다.

 

선교 지역에서의 사제 양성 노력에 대해 골롱브 신부는 “1658년 파리외방전교회가 창설된 이래 전교회 소속 선교사를 통해 아시아에서 120개 이상의 교구가 설립됐으며, 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 아시아 지역에서는 파리외방전교회에 의해 5000여 명의 신학생이 양성됐다”고 했다. 모두 현지 교구 소속 성직자 양성이 목적이었다는 것이다.

 

캄보디아를 제외하고는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수가 이전보다 줄어든 상황이라고 말한 골롱브 신부는 그러나 많은 수는 아니지만 최근 들어 꾸준히 성소자가 늘고 있어 희망적이라고 했다. 현재 20여 명 신학생들을 양성 중이고, 올해 1월 세 명의 부제 및 세 명의 사제가 서품됐으며, 6월에도 4명의 사제가 탄생할 예정이라고 한다.

 

골롱브 신부는 덧붙여 10여 년 전부터 파리외방전교회가 실시하고 있는 준회원 프로그램이나 평신도 자원봉사자 양성 계획은 또 다른 면의 선교사 양성 노력이라고 설명했다.

 

준회원 프로그램은 아시아 지역 사제들이 일정 기간 교육을 거쳐 선교 지역에 파견,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로서의 삶을 체험하도록 지원하는 것이며 또 평신도 해외 자원봉사자 양성 계획 역시 평신도 지원자들이 선교지 교회를 배우고 봉사의 삶을 살도록 기회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특히 2003년부터 실시된 평신도 해외 자원봉사자 프로그램은 성소자 양성을 위한 내용으로도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되고 있다는 평가다. 현재 양성중인 신학생들 대다수가 이 같은 자원봉사자 프로그램을 통해 입회를 희망했다는 면에서 그렇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는 선교지 나라와 혼례를 하는 것이라 봅니다. 역사뿐 아니라 언어, 문화, 전통을 배우면서 말이죠. 우리 선교사들은 한국을 비롯해 활동이 활발한 아시아 일부 교회들의 역동성에 기뻐합니다. 선교사들이 봉사하는 모든 나라에서 현지인 성직자를 양성하고 선교지 국가에서 단 한 명의 선교사가 남을지언정 그들이 속한 선교 영역 안에서 현지 사제들과 이방인이라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파리외방전교회의 가족은 바로 선교지 교회이며 그들이 속한 국가는 바로 선교지역 국가라고 강조한 골롱브 신부는 “우리의 선교는 예나 지금이나 하느님을 모르는 이들을 위해서 그들의 나라를 위해 영원히 떠나는 것”이라고 전했다. [가톨릭신문, 2011년 4월 17일, 이주연 기자]



3,750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