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5일 (일)
(백) 부활 제6주일(생명 주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윤리신학ㅣ사회윤리

[사회] 일상의 평화를 이루기 위한 그리스도인의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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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5-05 ㅣ No.1313

[복음살이] 일상의 평화를 이루기 위한 그리스도인의 노력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에게 처음 나타나셨을 때 처음 하신 말씀이 “평화가 너희와 함께!”입니다. 이미 그전부터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도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리니 행복하다고 하셨고 예루살렘이 평화의 길을 걷기를 바라셨으며, 제자들에게 그들이 방문하는 집에 평화를 빌어주라고 권고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에페2,14)라고 고백합니다.

 

이처럼 평화는 그리스도교의 핵심 주제이며 신앙인이 추구하는 구원의 실현과 맞닿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평화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그 평화를 추구하며 예수님의 제자로서 이 세상 안에서 평화를 이루기 위해 파견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상 안에서 참된 평화를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첫째로 평화는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기도와 성찰의 삶에서 시작됩니다. 그리스도인이 추구하는 평화는 단순한 균형을 유지하고 갈등을 해소한 상태와는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요한 14,27)라고 하신 것은 주님이 주시는 평화가 사회적 정치적 평화가 아니라 바로 영적인 삶 안에서 얻어지는 내적인 평화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평화가 내적인 안정과 풍요로움, 그리고 하느님의 선물이고 구원의 상태를 의미한다면, 평화의 선물을 받을 준비로서 회심, 즉 마음속의 증오와 불의, 완고함, 이기심 등을 버리고 용서와 화해, 자신을 낮추는 겸손과 기꺼이 자기를 내어주고 타인을 수용하려는 태도를 필요로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평화의 근원이신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통해 각자의 삶에 질서를 회복하고 내면의 고요함을 누리는 가운데, 점차 자신의 살아가는 사회와 더 넓은 세상으로 정의와 자유, 조화와 안정, 사랑과 연대로서의 평화를 확장해 나가야 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영적인 삶 안에서 얻어지는 내적인 평화

 

교황 요한 23세는 ‘지상의 평화’에서 국가 간의 대립으로부터의 “무장해제는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무기를 제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 대한 가르침에서 그 계명을 지키기 위해 형제에게 성을 내거나 욕하는 것부터 삼갈 것을 권고합니다. 이처럼 평화는 내 마음 안에 있는 미움과 시기, 그리고 관계 안에서 흔히 일어나는 분열과 불화를 제거하여 마음의 평정을 회복하고 서로 신뢰를 회복하려는 노력으로 시작합니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인에게 먼저 요구되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마음을 열어 하느님과 깊은 관계를 맺게 할 뿐만 아니라, 존중과 이해, 존경과 사랑의 태도로 다른 이들을 만나게 해” 주며,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모든 평화의 참된 친구들, 곧 평화를 사랑하고 자신이 살고 있는 다양한 환경에서 평화를 증진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힘을”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리스도교 생활의 원천이며 정점’인 성찬례는 평화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모든 참된 투신을 위한 마르지 않는 샘”입니다(간추린 사회교리 519항).

 

두 번째로 이사야서(32,17)의 말씀처럼 “평화는 정의의 열매”이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정의와 공정함 통해 평화를 이루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고전적인 정의의 의미는 각자의 몫이 각자에게 정당하게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평화는 ‘질서의 고요함’이요, 정의란 만물의 질서 안에서 정당한 자리를 정해주는 능력이나 의지이므로 정의와 평화는 떨어질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정의의 기본은 인권을 지키는 일입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권리가 지켜지지 않을 때 평화는 위협받습니다. 특히 생명권과 양심의 자유를 비롯하여 인간으로서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키며 존엄하게 살아가도록 보장하는 기본권을 지키고 증진시키는 일은 평화로운 사회를 건설하는데 본질적인 것입니다. 부조리하고 정의롭지 않은 사회는 억울한 피해자를 낳게 되고 그들의 마음속에서 자라나는 증오는 분쟁의 씨앗이 되어 사회의 평화를 위협합니다.

 

정의로운 삶은 일상에서 개개인이 각자 자신의 부당한 욕심을 다스리고 매사에 공정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것도 포함됩니다. 정직하면 손해 본다는 우리 사회의 통념에 순응하며 주변의 불의와 부정에 눈감고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 하며 살아간다면 결코 참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자연환경을 보호하는 일도 정의의 열매로서의 평화를 이루는 일입니다. 인류가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생태계를 착취하고 파괴한다면 이는 하느님이 부여하신 창조질서를 훼손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후대에 자손들이 누려할 몫까지 빼앗는 불의를 저지르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일상의 사소한 폭력도 거부해야

 

셋째로 “평화는 사랑의 열매”입니다. 사랑은 각자의 몫을 정당하게 돌려주는 정의보다 더 많은 것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주어라”(마태5,39-41). 이 복음 말씀처럼 상대방의 요구보다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내어주는 애덕 앞에서는 다툼이 생길 수 없습니다. 조금도 손해 보지 않고 자신의 몫을 챙기려고 해서는 참된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사랑의 열매로서의 평화는 구체적으로 자비와 비폭력, 용서와 화해를 통해 추구될 수 있습니다. 특히 평화는 폭력을 거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평화를 위해 폭력이 아니라 십자가의 희생을 선택하셨던 것처럼 평화의 일꾼인 그리스도인들은 일상 안에서 사소한 폭력도 거부해야 합니다.

 

교회는 정당방위를 위한 최소한의 무력사용은 인정하지만,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타인의 권리와 사회적 의무를 존중한다는 조건을 지키면서 “가장 약한 사람들이 취하는 방어수단”을 택하라고 권고합니다(사목헌장 78항). 이는 강자가 사용하는 힘의 논리 대신 비폭력을 택하라는 것이며, 어리석음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십자가의 사랑이 결국 진정한 승리의 길이라는 부활 신앙에 바탕을 두는 태도입니다.

 

넷째로  폭력적인 적대와 대립으로 점철되어왔던 분단 시대를 극복하고 남북이 화해와 협력을 통한 통일로 나아가는 것은 시대적 사명이며 한국의 그리스도인으로서 평화를 이루기 위한 소명입니다. 통일 정책을 주관하는 정부의 열린 마음과 지혜로운 대북 정책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개개인도 남북의 평화통일을 위한 기도와 함께 북한 어린이 영양제 지원과 결핵환자 돕기 등 인도적이고 평화적인 지원 단체에 후원하고, 북한을 탈출하여 한국에 정착한 새터민들이 잘 적응하도록 도와주는 일도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를 위한 기도’를 다시 한 번 되새겨봅시다. 그리스도인들이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평화의 도구’로서 살아가도록 다짐하면서 우리 사회에 정의와 사랑이 넘쳐흘러 참된 평화가 이룩될 수 있도록 하느님의 은총을 간구하면 좋겠습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6년 5월호, 박정우 후고 신부(가톨릭대학교 종교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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