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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식별력과 책임의 성교육30: 성교육, 생명을 살리기 위한 간절한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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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7-01 ㅣ No.1553

[이광호 소장의 식별력과 책임의 성교육] (30) 성교육, 생명을 살리기 위한 간절한 노력


태아 향한 죽음의 손길… 지켜만 볼 것인가

 

 

성교육의 핵심 가치와 왜곡의 세상

 

생명, 책임, 인격, 절제, 정결, 혼인, 가정은 성교육의 7대 핵심 가치다. 남녀가 성적으로 결합하면 ‘생명’이 생긴다. 이는 대자연의 순리이고 창조 질서이기 때문에 어떤 피임법으로도 막을 수 없다. 따라서 성관계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라야 한다. 남녀 사이에서 책임의 동반자 의식이 우러나오려면 반드시 상호 ‘인격’적 신뢰가 쌓여야만 하고, 그 신뢰를 구축하기 위해 남녀가 먼저 할 일은 성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인생관을 확인하는 대화다. 남녀 성기의 결합은 가슴과 머리의 일치 이후에 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으로 가는 길인데, 이는 ‘절제’를 통해서 가능하다. ‘정결’은 ‘생명’ ‘책임’ ‘인격’ ‘절제’의 가치를 가장 이상적으로 완성하는 방식으로, 혼인 전에는 성관계를 맺지 않고, 혼인을 통해 짝으로 맺어지는 상대에게 나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혼인’과 ‘가정’은 인간 사회가 성관계로 인해 탄생하는 새 생명을 남녀가 책임지도록 묶어주는 관계며, 이는 인류가 교육과 문화로 학습시켜온 전통이다.

 

그러나 소비사회는 성과 관련한 이 7대 핵심 가치를 부정하고, 상업적 매체를 이용해 가치를 해체한다. 상업적 영상물은 성에 내재된 ‘생명’ ‘책임’ ‘인격’의 내용은 아예 보여주지 않는다. ‘생명’과 ‘책임’은 피임으로 대체 가능한 것처럼 속이고, ‘인격’은 성관계에 대한 동의로 대체한다. 남녀가 합의하고 피임만 하면 성관계는 얼마든지 해도 되는 것처럼 왜곡한다. 이런 성관계에서 발생하는 임신은 원치 않은 결과이니, 낙태권을 보장하라고 외친다. “성관계가 곧 임신 동의는 아니다”라는 주장이다. 운전하다가 사고를 내면 그 책임을 지는 것이 상식인데, 임신을 유발하는 행동은 하면서 책임은 회피하려 한다. 선진국에서는 양육비 책임법인 ‘히트 앤드 런 방지법’을 강력하게 시행하여 남녀가 성관계와 생명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하지만, 이들은 이런 제도도 외면한다.

 

이들은 ‘절제’와 ‘정결’을 억압의 악덕으로 헐뜯으며 성적 자유를 외친다. 이는 피임약이 최초로 개발돼 임신의 부담에서 완벽하게 벗어날 수 있다는 환상이 퍼져나갔던 1960년대 성 해방 운동의 조류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완벽한 피임법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이 증명됐음에도 이들의 생각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남녀의 결합인 ‘혼인과 가정’은 버려야 할 구시대의 폐습인 것처럼 왜곡되는 현재, 이런 생각을 하는 단체들이 한국 성교육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고, 상당수의 언론도 여기에 동조적이다.

 

 

미디어 리터러시(media literacy)가 꼭 필요한 시대

 

성과 관련된 고귀한 7대 가치를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미디어 리터러시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는 미디어를 정확하게 읽고 그 내용의 참과 거짓을 분명하게 가려내는 식별력이다. 방송 내용이 실제 사실과 다를 수 있으니 곧이곧대로 믿지 말고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선진국에는 이 교육이 잘 정착돼 있다. 블로거 무터킨더의 ‘언론을 믿지 말라고 가르치는 독일 교육’을 보자.

 

“독일인들은 언론을 무조건 신뢰하지는 않는다. 독일에서는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파간다(선동)’가 어렵다. 역사와 교육 때문이다. 독일인들은 미디어를 활용한 선동에 넘어가 거악의 앞잡이가 된 일을 지금까지 치욕과 상처로 여긴다. 독일인들은 권력이나 언론이 얘기하는 선동을 일단 의심하고 보는 습관이 있다. 역사적 경험을 통해서 미디어를 통한 우민화가 얼마나 무서운지 뼈에 사무치도록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교사들은 교과서보다는 별도의 문학 서적을 이용하고, 텍스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세 문제를 낸다. ①요점 정리와 내용 분석을 해라. ②작가의 의도나 정치 사회적 배경을 설명하라. ③당신의 관점을 써라. 비평하라. 주입식 교육도 아니고 생각을 해야 하는 연습을 7~8학년부터 13학년까지 수년 동안 계속한다고 생각해보라. 그런 훈련을 한 사람이 어떻게 신문 기사를 활자가 주는 의미 그대로 믿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민주시민으로서의 역량을 키우기 위한 독일교육의 근간이며 우리에게도 간절히 필요한 자세다.”

 

 

포기해서는 안 되는 생명 수호

 

과거 독일인들이 미디어의 선동에 속아서 수많은 생명을 죽이는 데 협력했던 것처럼, 이 시대의 우리는 수많은 배 속 생명을 죽이는 거악에 휘말릴 비극적 상황에 놓여 있다. 인간의 생명권을 옹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국가기관인 여성가족부가 낙태죄를 폐지해야 한다는 의견서를 5월 22일 헌법재판소에 제출했다. 여성가족부라는 이름에 합당한 일은 낙태죄 폐지가 아니라, 양육비 책임법 제정이다. 여성과 아기와 가족을 모두 살리는 입법을 위한 의견서를 보내야 할 부처가 그 일은 방기하고, 낙태 허용 주장을 하는 것은 명백한 직무유기다. 정부 부처까지 생명을 죽이는 일에 나선다면, 마지막 희망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노력하는 개인들의 출현이다.

 

무려 2500명의 아이들을 관 또는 궤짝 속에 숨겨온 여성이 결국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레나 샌들러.<관련 영상 QR코드> 1939년 나치가 폴란드를 침략하자 저항군이 된 29살의 간호사다. 그는 게토(유다인 거주지역)에서 유다인 아이들을 구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응급차, 쓰레기봉투, 관, 심지어 시체 사이에 몰래 숨겼다. 이때 구조된 아이들은 2500명이 넘는다. 그는 전쟁 후 가족과 다시 재회할 수 있도록 아이들의 이름을 적어 유리병에 보관했지만 1943년 체포된다. 잔인하게 고문을 당하고도 입을 열지 않자, 사형을 선고받는다. 사형 집행 전, 극적으로 풀려난 그는 신분을 위장한 채 숨죽여 살았다. 그러면서도 아이들의 이름이 적힌 유리병을 찾아내 유다인 단체로 보내는 것을 잊지 않다. 이레나는 평범한 삶을 살았다. 결혼도 하고 자녀 3명을 둔다. 2007년이 되어서야 진정한 영웅, 이레나의 업적이 세상에 알려진다. 노벨평화상 후보에 올랐지만, 상을 받지는 못했다. 그는 상관없다고 말했다. 

 

“제가 구한 아이들뿐 아니라, 그들의 손자와 손녀들까지 저를 찾아오는 게 기쁨입니다.” 용감한 간호사 이레나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어떻게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냐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했다. “아버지 덕분이죠. 아버지께서는 늘 제게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우면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가톨릭 신자 이레나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라는 말씀을 목숨 걸고 실천했다. 생명을 수호하는 개인이 됐다. 우리도 이레나처럼 ‘가장 작은 이’의 생명을 지키는 개인으로 살아야 한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7월 1일, 이광호 베네딕토(사랑과 책임 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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