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19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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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영동 지역의 교우촌 형성과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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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7-19 ㅣ No.1217

영동 지역의 교우촌 형성과 변화

 

 

원주교구 문화영성연구소에서는 연속 기획으로 원주교구 각 지역의 천주교 교우촌 형성과 변화에 대한 세미나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그 일환으로 지난 6월 14일에 성내동 성당에서 ‘영동 지역 교우촌의 형성과 변화’에 대한 세미나가 열릴 예정이었습니다만 아쉽게도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세미나는 취소되었습니다. 세미나는 개최되지 못하였지만 그 내용을 요약하여 소개합니다.

 

 

1. 영동 지역의 천주교 전래 : 박해시대의 천주교 신자 이동과 정착

 

* 영동 지역은 대관령(領)을 기준으로 강원도의 동쪽(東) 지역을 가리킨다. 아래로는 삼척시부터 위쪽으로는 북한의 통천, 고성군 일대까지를 포함하며, 경상북도 울진도 예전에는(1963년 이전) 강원도에 속하였었기 때문에 영동 지역에 포함 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이번에 소개하는 영동 지역은 주로 원주교구에 해당되는 동해, 삼척 지역만을 대상으로 합니다. 또 때로는 영월, 평창, 정선 지역도 영동 지역으로 구분하기도 하지만 그 지역에 대한 소개 역시 이번 내용에는 포함 시키지 않았습니다.

 

천주교와 관련하여 영동 지역이 처음 언급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서울 회현동에 사는 곽진우(郭鎭宇)가 충주에 사는 이석중(李石中)에게 천주교를 가르쳤다는 죄로 체포되어 유배를 가게 되었는데, 그 유배지가 삼척이었다. 그러나 그는 유배를 가는 도중 정선에서 다시 한양의 형조(刑曹)로 압송되어 돌아갔기 때문에 삼척에 도착하지는 못하였다.(「사학징의」 1801년 참조)

 

실질적으로 영동 지방에 복음을 처음 전파 한 사람은 원주 감영(감원 감영)에서 순교한 복자 김강이(金鋼伊, 시몬)라고 할 수 있다. 충청도 서산 출신의 김강이와 그의 아우 김창귀(타대오)는 박해를 피하여 전라도 고산 등을 거쳐 강원도 울진(현 경북 울진군)에 살며 신앙생활을 하다가 1815년 체포되었다. 당시 강원 감사가 조정에 올린 보고(장계)에는 김강이가 “신자들에게 천주교 서적과 소식을 전해 왔으며, 여러 해 동안 천주교 교리를 외우고 익혀서 온몸으로 깊이 빠져 있습니다”(「일성록」 1815년 10월 18일)라고 기록된 내용이 있어 그가 혼자 숨어서 신앙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활발히 신앙을 전한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김강이의 체포와 순교 이후 울진이나 영동 지역의 신앙생활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본격적으로 천주교 신앙인들이 영동 지방에 정착하게 된 계기는 1866년 병인박해를 피해서 신자들이 이주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1921년에 발행된 경향잡지에는 영동 지방에 사는 한 교우가 영동 지방 신앙의 역사를 회상하며 “령동 교우들로 말하면 五六十년 전 병인군난 풍파시에 전라, 충청, 경기도 교우들이 피란차로 령동에 넘어와셔 근근득생하야 사난 교우들이오”라고 전하고 있다.(「경향잡지」 1921년 9월) 이러한 내용은 박해를 피해 이주하여 정착한 신자들이 당시에도 여전히 생존하여 있으면서 증언한 것이므로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한 것이다. 당시 신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영동 지역으로 이주한 신자들은 이주 전에는 대부분 경기도의 양근과 강원도의 풍수원, 혹은 충청도의 배론 등 교우촌에 살았거나 연고지를 두고 있는데, 이들의 영동 지역으로의 이주는 대체로 세 경로를 통해 이루어졌다. 첫째는 경기도 양근(양평)에서 살던 교우들은 북한강을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여 샛령(새이령, 대간령)을 넘어 영동 북부 지역, 즉 지금의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지역에 정착하였다.

 

둘째는 풍수원에 살던 교우들이 횡성, 평창 등을 거쳐 대관령을 넘어 강릉에 정착하였다. 세 번째로 배론에 살던 교우들은 제천과 영월, 평창을 거쳐 강 북쪽에 정착하였다. 이 경로는 단순히 이주의 경로만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이주의 과정에서 정착하여 교우촌을 이루었고, 또 어떤 이들은 그 교우촌을 경유하여 더 먼 곳을 찾아 떠나갔다. 그래서 그 이주의 경로는 해당 지역 교우촌의 분포와 일치한다. 가령 뮈텔 주교는 1891년과 1893년, 1900년, 1901년 등 모두 네 차례 강원도 지역의 공소와 교우촌을 방문하는데, 이 방문 경로, 특히 1900년의 방문 경로는 박해시대 신자들의 이주 경로, 정착 교우촌의 상호 관계와 연결성을 잘 보여 준다. [2020년 7월 19일 연중 제16주일(농민 주일) 춘천주보 들빛 3면, 문화영성연구소]

 

 

2. 초창기 영동지역 교우촌 생활

 

영동지역에 본격적으로 신자들이 정착한 것은 1866년 병인박해를 피해 신자들이 이주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주로 경기도 양근(양평)이나 풍수원, 배론에 살던 교우들은 북한강을 따라 샛령(새이령, 대간령)을 넘거나 횡성, 평창, 혹은 제천 영월을 거쳐 대관령을 넘어 바닷가 영동 지방에 자리를 잡았다. 특히 초기에 이주한 교우들은 강릉이나 삼척 등의 비교적 번화한 지역보다는 영동 북부지역, 측 강릉 북부의 명주와 양양, 고성지역 등에 정착하였다. 이는 당시 강릉이 강원도에서는 읍세(邑勢)가 가장 큰 도회 지역이어서 박해를 피하는 처지에서 정착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전혀 새로운 환경인 바닷가로 이주한 신자들은 비록 고향에서는 더 멀어졌지만 신앙은 더 깊어졌고, 낯선 지역에 살면서도 교우들 간의 만남은 더 가까워졌다.

 

1900년 뮈텔 주교는 평창을 거쳐 11월 22일부터 12월 9일까지 영동지역의 교우촌을 방문하였는데, 방문 기록에 나타난 교우촌과 공소는 모두 15곳에 이른다.(강릉시 구정면, 양양군, 양양읍, 현남면, 현북면, 서면, 강현면, 속초시 대포동, 노학동, 고성군 토성면, 거진읍 현내면 등)

 

이는 비록 박해를 피해 멀리 떠나왔지만 새로 정착한 곳에서도 얼마나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는지, 또 전교에 얼마나 열심하였는 지를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당시 박해를 피해 교우촌을 이루고 산 교우들은 대부분 담배 농사를 짓거나 잠업에 종사하거나 옹기를 구우며 생활하였다. 고향을 떠나 먼 바닷가에 정착한 이들도 바닷가에 살면서도 어업에 종사하기보다는 그들이 떠나온 곳에서의 생활이었던 옹기를 굽는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뮈텔 주교의 영동지역 순방 기록에서도 옹기점과 관련된 언급이 자주 보인다.

 

“5리 떨어진 다음 공소인 쉬일(양양읍 파일리)로 떠났다. 거기에는 세집 뿐인데, 내가 1882년 방문했을 때의 옛 옹기점 때 보다는 좀 더 잘 살고 있다.”(1900년 11월 29일)

 

“싸리재 옹기마을(속초시 대포동)을 향해 10리 길을 떠났다. 공소 집은 따로 있었고 매우 넓었다.”(1900년 12월 2일)

 

“하루 종일 성사를 주었다. 고해자는 80명이 좀 넘었는데, 이곳이 옹기점과 열산(고성군 현내면)의 옹기점, 30리의 고성 땅에 있는 오시골과 조포골(고성군) 두 작은 교우촌에서 온 교우들이었다.”(1900년 12월 7일)

 

영동지역 북부에 먼저 자리 잡은 교우들의 생활은 이후 교우촌이 영동의 남부, 즉 지금의 강릉 남부와 묵호, 삼척 지역으로 확대되면서도 그대로 이어져, 그곳의 교우들 역시 대부분 옹기를 구위며 생활하였고, 아예 천주교 신자는 옹기 굽는 사람이라는 이야기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그렇게 생활은 비록 어려웠어도 박해를 피한 안도감,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며 교우들이 모여 사는 행복감은 모든 시련과 가난을 이겨내고도 남았다. 당시 교우촌 교우들의 생활을 노래한 <避惡修善歌(피악수선가)>에서는 교우촌 생활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전후좌우 모든교우 일심으로 화목하세. / 세속에 없던부모 여기오니 새로있고 / 세속에 없던형제 여기오니 무수하다 / 세속에 적던친구 여기오니 허다하다 / 세속에 드문물건 여기오니 무진하다 / 가사농업 區處후에 농업인들 없을소냐” [2020년 7월 26일 연중 제17주일 춘천주보 들빛 3면, 문화영성연구소]

 

 

3. 원주교구 영동지역의 교우촌 형성 : 서낭당의 교우촌

 

영동의 북부(영북) 지역에는 병인박해를 피해 이주를 한 신자들이 일찍부터 교우촌을 형성하여 신앙생활을 이어왔지만, 영동의 남쪽, 곧 지금의 원주교구 관할 지역인 동해와 삼척 지역에 신자들이 정착하여 교우촌을 이룬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그래서 1922년에 이르기까지 강릉 북쪽의 교우촌은 어림잡아 15곳에 이르렀지만, 강릉 남쪽의 교우촌은 양양 본당에서 분할된 금광리 본당(현 주문진 본당)의 오일골 공소(현 강릉시 옥계면) 한 곳뿐이었다.

 

강릉 이남, 동해와 삼척 지역에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한 것은 1931년에 강릉 옥계에 거주하던 하경연(요셉)이 동해지역(묵호)에 이주해 오면서부터이다. 이후 본격적으로 교우들이 모여 교우촌을 이룬 것은 1935년~1937년 사이 몇몇 교우 가족들이 삼척군 북삼면 쇄운리 성황당골(현 동해시 쇄운동(灑雲洞))로 이주해 오면서부터이다. 이 당시 이주해 온 교우로는 경기도 양평과 풍수원에서 살다가 주문진 행정(杏亭)을 거쳐 쇄운리로 온 홍승실(베드로) 가족, 옥계 공소 회장을 하다가 이주를 온 남봉길(프란치스코) 가족, 경기도 여주군 도전리에서 행정을 거쳐 이주를 해 온 배한복(원주교구 배은하 신부의 조부) 가족과 그 동생 배삼복(춘천교구 배종호 신부의 부친) 가족이 있다.(배한복, 배삼복 가족이 본래 살던 경기도 여주군 도전리는 병인박해 당시 박해를 피해 교우들이 숨어들어 살던 교우촌으로, 일제 강점기에는 원심이(遠深里)라고 불렸다. 이곳은 본래 강원도 원주군 강천면에 속아있으나 1906년 경기도 여주군으로 편입되었다).

 

처음 몇 가족이 이 쇄운리 교우촌으로 이주한 후 점차 다른 교우들도 이주를 하여 많은 경우에는 30여 가구에 80여 명의 신자들이 교우촌을 이루어 모여 살게 되었다. 본래 살던 곳에서부터 깊은 신앙을 가지고 있던 이들은 가난 중에서도 더욱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낮에는 다른 교우촌과 마찬가지로 옹기를 구워 북평 읍내와 옥계, 삼척으로 나가 팔았고, 마을로 돌아와서는 가족과 마을의 교우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신앙생활을 하며 신앙의 공동체를 이루었다. 평상시의 기도 생활에 충실한 것은 물론 북평에 본당이 생기기 전에는 영성체를 하기 위해 그 전날 저녁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고 12시간 공복제를 지키며 새벽 4시부터 삼척 공소까지 걸어가 성사를 받았다. 그 당시의 신앙생활을 권정순(마리아, 배은하 신부의 모친)은 이렇게 전한다.

 

“세수를 하고 기도하러 들어가면 시아버님(배한복)께서 ‘육신은 밥을 먹고 크는 것이고, 영혼은 기도로서 성숙해지는 것이다. 그러니 영혼의 밥부터 먼저 드리자.’ 하시고는 한두 시간 걸리는 조·만과를 식구들을 한데 모아 함께 매일같이 기도를 드렸다. 말 안 듣는 자식들은 싸리 가지 회초리로 종아리에서 피가 나도록 매를 때리며 신앙교육을 시키셨다.”

 

이러한 신앙생활은 이곳 교우촌 어느 집이든 볼 수 있는 모습이었고, 교우촌에 사는 신자들은 생활은 넉넉하지 못했지만 한 가족처럼 살며 서로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대부분의 동네 일을 한 집안일처럼 하였다.

 

이들이 이주하여 정착한 마을은 본래 성황당이 있어 ‘서낭당’이라고 불리던 마을로 미신이 성행하던 마을이었다. 그러나 교우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사랑하며 나누는 삶을 통해 서낭당은 신앙의 집, 신앙당으로 바뀌어 갔다. [2020년 8월 2일 연중 제18주일 원주주보 들빛 3면, 문화영성연구소]

 

 

4. 바다 같은 하느님을 다시 만나다

 

1866년의 병인박해를 피하여 떠나온 신자들이 1900년대 초반까지 영동의 북쪽에서 여러 교우촌을 이루며 신앙의 터전을 마련하였지만, 그 당시까지 영동의 남쪽, 지금의 원주교구 지역인 동해, 삼척에는 천주교 신앙이 전해지지 못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와서 차츰 신자들이 이주해오기 시작하였고, 특히 1935년~1937년 무렵에 경기도 양평과 풍수원, 경기도 여주군 도전리(원심이)에서 이사를 온 신자들이 삼척 지방(지금의 동해시) 쇄운리의 서낭당에 모여 살며 교우촌을 이루고 새롭게 신앙생활을 이어나갔다. 안타깝게 고향과 가족을 두고 떠나와 물설고, 산설고, 낯도 설었지만, 신앙 안에서 새롭게 만난 이들이 곧 가족이 되었고, 예전에 미신으로 젖어있던 ‘서낭당’ 마을은 신앙의 집, 신앙당으로 변모되었다. 그리고 교우들이 점차 늘어나며 교우촌은 공소로 발전하였고, 공소는 성장하여 본당 공동체로 자리 잡았다.

 

쇄운리에 자리 잡은 신자들은 처음에는 주로 마을의 남봉길(프란치스코) · 배삼복(바오로) 회장 집에서 공소예절을 하거나 강릉본당(현 임당동) 남양리 공소(현 옥계본당이 된 옥계 공소의 전신)로 다니며 미사에 참례하였다. 그러다가 1940년 묵호 공소가 설립되자 묵호 공소로 다니기도 하였고 때로는 강릉의 본당신부가 쇄운리를 방문하여 미사를 봉헌하고 판공성사를 추기도 하였다. 비록 신자들의 숫자는 15명~17명 정도 밖에는 되지 못하였지만, 신앙에 대한 열성은 누구보다 뛰어났고, 정성도 지극하였다. 이들은 때로는 삼척 공소로 또 때로는 묵호 공소로도 미사를 다니면서 오히려 그곳에 있는 신자들에게 감동을 주고, 열심을 불러일으켜 그곳 공소들이 본당으로 발전하는 데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그 덕분에 묵호 공소는 묵호본당으로, 삼척 공소는 삼척본당으로 승격되었고, 본당 건물이 지어질 때는 쇄운리의 신자들도 함께 참여하여 벽돌을 굽고, 나무를 날랐다. 쇄운리 서낭당 마을은 영동 지방 남쪽 신앙의 샘이 되었고, 본당들의 기둥이 되었다. 그리고 그곳 신자들은 쇄운리 서낭당 마을에도 성당이 세워지기를 원하였으나 아쉽게도 신자 수도 적고, 북평 읍내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본당은 1958년에 북평에 건립되었다. 그리고 쇄운리 공소 역시 1972년 삼화 공소가 설립되면서 문을 닫게 되어 원주교구 영동지역 신앙의 고향으로만 기억에 남게 되었다.

 

성내동 성당이 자리 잡고 있는 현재의 삼척 지역에 신자 공동체가 처음 형성된 것은 1945년 무렵이다. 당시 삼척에 세워진 동양시멘트 공장에 신자들이 취업하여 이사를 오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쇄운리에서 찾아온 교우들과 함께 공소예절을 하다가, 신자 수가 늘어나자 1946년 삼척 공소가 세워지게 되었고, 얼마 후인 1949년에 초대 주임신부이던 진 야고보(James Mcginn) 신부가 발령을 받으며 삼척 본당이 설립되게 되었다. 처음에는 외부에서 이사를 온 삼척 시멘트의 직원, 지역 학교의 교사 등이 모여 신앙생활을 하다가 교세가 급속히 확장되어 신자 수가 늘어나자 본당으로 승격되고 성당까지 짓게 되었다. 처음 성당 부지로 마련한 곳은 지금의 사직동 성당 자리였으나 시내의 중심과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다시 삼척 시내에 부지와 적산가옥을 매입하여 성당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곧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초대 주임신부이던 진 야고보 신부가 순교하였고, 전쟁 후 성당은 너무도 좁아 신자들이 함께하기에는 턱없이 좁았다. 결국 1956년에 삼척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현 성당의 부지를 마련하여 1957년 삼척 성당(현 성내동 성당)이 건립되었다. 성당을 짓기 위해 부지를 매입할 당시 그 자리에는 커다란 고목이 있었고 동네 주민들이 그 고목에 제사를 드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 자리에 성당이 건립된다고 하자 주민들이 나서서 반대하였고 지주들은 땅을 팔지 않았는데, 당시 성당을 건립하던 고 가비노(Kevin Conners) 신부는 지주들에게 “고목나무 제사보다 교회 제사를 매일 지내면 더욱 축복 많이 받는다.”고 설득하였다고 한다. 고목에 제사를 지내던 곳이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는 동산으로 변모하였다.

 

1966년, 본래 삼척 성당을 건립하려고 마련하였던 부지에 사직리 성당이 건립되었다. 성당을 건립할 당시에는 기존 골롬반 선교회의 휴양소를 이용하여 양로원 사업을 시작하기도 하였다. 사직 성당은 비록 삼척 시내의 외곽에 자리 잡긴 하였지만, 당시에는 시멘트 회사에 다니는 신자들이 많았고 또 남쪽 바닷가의 모든 공소들(맹방, 근덕, 동막, 궁촌, 용화, 장호, 임원, 호산)이 사직 성당의 관할이어서 결코 작은 곳은 아니었다. 특히 1977년 사직 성당의 본당 신부를 역임한 유 가롤로(Rue Charles) 신부는 제대와 강론대를 한국 전통 문양의 자개로 장식하고, 성당 외벽 전면에는 타일을 이용하여 ‘십장생도’(十長生圖) 모자이크를 설치하여 우리나라 전통 예술과 문양을 통해 신앙을 표현하려 하였다.

 

처음 박해를 피해 이주한 신자들이 바닷가에서 다시 교우촌을 형성하며 생활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고향과 가족을 떠난 어려움도 컸고 옹기를 구워 팔며 생활하는 가난도 큰 시련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어려움은 새롭게 자리 잡은 바닷가 마을이나 산속의 마을들에 오랫동안 뿌리를 내린 미신 신앙이었다. 그러나 신자들은 새로운 자리에서 새로 만난 교우들을 형제와 부모로 삼고, 기도와 나눔을 통해 가난 속에서도 신앙의 기쁨과 보람을 찾았다. 또 서낭당 마을은 신앙의 집으로, 고목에게 제사 지내던 땅은 하느님께 찬미를 올리는 새로운 터전으로 닦아나갔다.

 

박해와 가난 속에서 모진 고생을 하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품고 대관령의 동쪽, 바닷가에 다다른 신자들은, 그곳에서 다시 커다란 바다 같은 하느님을 새롭게 만나고, 그 바다에서 떠오르는 기쁨으로 영동지역의 신앙 공동체를 일구어 나온 것이다. [2020년 8월 9일 연중 제19주일 원주주보 들빛 3면, 문화영성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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