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일 (목)
(백)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너희 기쁨이 충만하도록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예화ㅣ우화

[화해] 내 가족의 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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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우 세자요한 신부 [john1004] 쪽지 캡슐

1999-06-12 ㅣ No.76

[부산주보에서 옮겼습니다]

 

 내  가족의  화해

윤규식(스테파노)/민락성당

 

  지난 해 7월, 서울에 계신 어머니께서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았다. 누이동생의 울부짓는 목소리로 전해들은 급박한 병세 때문에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승용차로 나선 것을 후회하면서 급하게 차를 몰았다. 병원에 도착한 나는 여섯 시간 동안의 긴 뇌수술을 마친 어머니를 뵐 수 있었고, 생각보다 절박한 상황임을 알 수 있었다. 거기다가 의사의 미심쩍은 대답에 더욱 불안했던 나는 병원의 후미진 곳에서 주님만을 찾았다.

 

  어머니는 열심히 절을 찾는 불교신자였다. 천주교 신자로 시집온 며느리가 못마땅해 한 집에 종교가 두 개면 망한다고 하시면서 신앙생활을 반대하셨고, 집안 대대로 불교를 믿어왔음을 공공연히 강조하셨다. 그런데 며느리가 시집온 지 십여 년이 지난 어느 날, 마음을 바꾸고 성당에 다니겠다는 의사를 내비쳤고, 나의 추천에 의해 '로사'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으셨다.

 

이러한 어머니는 아파트의 이웃사람들에게 '맘씨 좋은 로사 할머니'로 통했다. 어쩌다 부산에

오시면 가족들에게 기도생활을 열심히 하라고 독려하며, 며느리에게 궁금한 교리에 대해 묻기도 하셨다. 그러면 아내는 신이 나서 가르쳐 드리고는 덧붙여 많은 얘기를 나누곤 했다. 이런 정겨운 모습에 나는 늘 자식을 위해 자신의 생각을 굽혀주시는 어머니가 고마웠고, 이를 주관해 주시는 주님께 감사를 드려왔다.

 

  그런 어머니가 예기치도 못한 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지신 것이다. 이후 아내는 근 삼 개월 동안 어머니의 병시중을 위해 밤낮없이 헌신적으로 매달렸다. 병원에서 기거하며, 거동을 못하시는 어머니를 위해 살갑게 대하는 아내의 모습에 친가의 어른들은 무척 고마워하셨고 효부라는 칭찬을아끼지 않았다.

 

그 동안 손위 올캐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여동생도 우리 부부의 결혼 생활 20년만에 처음으로 아내에 대한 오해를 풀고, 눈물을 글썽이며 '언니'라고 부르며 다가섰다. 이러한 우리 가족의 화해분위기 속에 어머니의 병세도 하루가 다르게 호전되어 갔고, 이젠 당시의 사고 휴유증에서 벗어나 건강을 되찾으셨다.

 

  지금 그때를 기억하면, 비록 어머니의 사고가 우리 가족 모두를 힘들게 하였지만 쌓고 살았던보이지 않는 벽을 허물도록 했다. 주님께서 어머니를 통하여 우리 가족의 또 다른 화해를 주선하신것이다. 진정 주님께서는 역경을 통하여 새로운 희망을 주신다. 어려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형제들에게도 머지않아 희망이 있음을 전하며, 용기를 잃지 말라고 당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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