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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70주년 특집: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수도자에게 듣는 분단의 아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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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10-17 ㅣ No.544

[분단 70주년 특집]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수도자에게 듣는 분단의 아픔



지난 추석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의 한 수도자가 창마 천주교 묘지에서 기도하는 모습. 이곳에는 덕원수도원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하고 왜관수도원에서 수도생활을 했던 이들이 다수 묻혀 있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제공)


올해 102세.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생존 수도자 가운데 최고령으로 왜관수도원 역사 그 자체나 다름없는 이석철 수사, 또 한 명의 왜관수도원 원로인 노규채 신부(93)가 10월 7일 ‘하느님의 종 덕원의 순교자 38위’ 그림을 지긋이 바라보고 서 있었다.

왜관수도원 본관 성당 입구 쪽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은 성미술의 대가 김형주(이멜다·68) 화백이 지난해 4월 그린 작품. 그림 제목처럼 한국교회가 시복을 추진하고 있는 신상원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와 김치호 베네딕도 신부와 동료 순교자 36위의 신앙과 인격이 가감 없이 드러나 있다. 화폭에는 왜관수도원이 회복해야 할 ‘과거’인 덕원수도원과 덕원신학교도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다. 덕원의 순교자 38위는 두 수도자가 덕원수도원에서 함께 수도생활을 했던 형제들. 지금은 그림이나 사진으로만 만날 수 있는 수도 형제들을 생각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덕원에서의 시간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순교자들과 함께 그려진 덕원 인근 원산 앞바다의 모습을 바라보는 두 노 수도자의 눈에는 70년 전이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다’는 시편 구절처럼 떠오른다. 세월의 흐름에 크고 작은 병고를 겪으며 귀가 잘 들리지 않고 허리가 굽은 몸이 됐지만 원산 앞바다의 파도 소리가 70년 세월과 휴전선을 뛰어 넘어 왜관수도원까지 물방울을 튀기며 들려오는 것만 같다.


광복과 분단 70년 역사 중심에 서다

한국사회 곳곳에는 광복과 분단 70년을 살아온 이들이 적잖이 남아 있다. 교회도 예외는 아니어서 여러 수도회와 본당, 성직·수도자, 평신도들이 분단 70년 역사의 산증인이다. 그 중심에 서 있는 곳 가운데 하나가 왜관수도원.

광복의 기쁨과 분단의 아픔이 교차하던 1945년, 왜관수도원의 전신인 덕원수도원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1909년 11월, 서울 백동(현 혜화동)에 최초의 성 베네딕도 수도원이 설립됨으로써 이 땅에서 성 베네딕도회 역사가 비롯됐다. 1922년 12월 만주 연길에 성 십자가 수도원을 설립한 후 1927년 11월 함경남도 덕원으로 이전하면서 덕원 시대가 새롭게 시작됐던 것.

1945년 8월 광복 당시를 회상하는 노 신부는 어느 새 23세의 유기서원을 한 신학생으로 돌아가 있었다.

“덕원수도원은 민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수도원 안에는 신문이나 라디오 같은 통신 수단이 전혀 없어 외부와 단절된 채로 수도 형제들과만 살았습니다. 수도원 안에서도 지원자, 수련자, 유기서원자, 종신서원자, 독일인 수도자와 한국인 수도자가 각자 맡은 영역에서 생활을 했고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일이 드물었지요. 기도와 식사 때만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저는 아직 양성 중인 어린 수도자였기에 수도원 안에 있으면서 외부 소식을 알기 어려웠습니다.”

그의 기억 속 덕원 시절에는 엄격한 규율이 자리 잡고 있다. 외출이 일절 없었을 뿐 아니라 부모가 선종했을 때만 1주일 휴가를 나갈 수 있었다. 부모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일단 휴가를 나가면 병세가 회복돼 나중에 선종하더라도 장례 참석을 위해 다시 휴가를 나갈 수 없을 정도로 엄격했다.


광복 후 덕원수도원 뒤흔든 종교 탄압

광복과 분단이 됐지만 덕원수도원은 한동안 ‘조용했다’는 것이 노 신부의 증언이다. 라틴어를 할 줄 알았던 그는 외부 정세를 파악할 수 있었던 독일인 수도자들의 대화를 곁에서 들으며 ‘김일성이 정권을 잡았다’는 상황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됐다. 분단 후 덕원수도원을 감쌌던 조용함은 ‘폭풍 전야의 고요’였던 것이다. 덕원수도원 장상과 사제 수도자들은 해방 후부터 변화하는 북한 정세를 노심초사 주시하고 있었다.

1948년 북한에 공산정권이 수립된 뒤 상황은 급변했다. 토지개혁과 종교 탄압이 이뤄졌고 덕원수도원도 이 광풍을 피해갈 수 없었다. 급기야 1949년 5월 덕원수도원과 신학교 건물을 몰수당했다. 수도자들이 겨우 연명할 수 있는 넓이의 밭만 남겨 놓고 토지도 국유화되고 말았다. 덕원수도원을 방문하는 외부 손님들을 안내하는 역할을 하던 이 수사(당시 36세)에게는 수도원 재산이 몰수당하고 수도자들이 납치되던 상황 등이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1949년 5월 어느 날 밤 1시 덕원수도원에 트럭 한 대가 들이닥쳤습니다. 수도자들을 분류해 독일인은 신부와 수사 모두를 체포했고 한국인 수도자는 신부만을 잡아갔습니다. 저는 수사였기 때문에 체포되지 않았지만 ‘나도 순교하겠으니 잡아가라’고 달려들었습니다. 북한 기관원들은 한국인 수사들을 세워놓고 ‘독일인에게 노예가 됐던 당신들을 해방시켜준다’고 연설을 하고는 떠났습니다.”

노 신부는 당시 사제품을 받기 전이라 끌려가지 않았다. “그 때 체포되신 수도 형제들과 함께 끌려가 순교하지 못한 것이 지금도 한스럽습니다.”

사람의 혈연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 질긴 하느님의 혈연으로 맺어진 수도 형제들이 공산정권에 끌려가는 참담한 장면을 보고도 막지 못했던 그 심정이 오죽했을까.


왜관에 새 수도공동체를 만들다


북한 당국에 의해 덕원수도원이 폐쇄되자 체포되지 않은 수도자들은 새로운 수도 공동체가 세워질 날을 기약하며 뿔뿔이 흩어져 남한 행을 택했다.

1952년 6월 경북 칠곡군 왜관성당(현 구 왜관성당)을 중심으로 새로운 수도공동체를 만들기까지 3년간의 여정은 성 베네딕도회 100년사에서 1909년 한국진출, 1927년 덕원으로의 수도원 이전만큼이나 중요한 시기다.

이 수사는 덕원수도원 폐쇄 후 왜관에 수도공동체가 자리 잡기까지의 과정을 마치 일기에 적어놓은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렸다. “덕원수도원이 폐쇄되고 먼저 강원도로 내려갔다가 숨어서 임진강을 건너, 그 때는 38선 이남이던 개성본당에서 여비를 얻어 다른 유기서원자 형제와 서울 혜화동 본가에 찾아갔습니다.”

이 수사는 ‘서울시 명륜동 2가 166번지’라는 본가 주소를 100세가 넘은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한국전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1·4후퇴를 맞아 걸어서 부산 중앙성당까지 내려갔습니다. 다른 수도 형제 15명 정도가 먼저 중앙성당에 내려와 있었고 제가 가장 늦게 합류했습니다. 서로 연락을 주고받을 길이 없던 상황에서도 다들 중앙성당에 모인 것이 놀랍기만 했습니다.”

부산 중앙성당은 수도 공동체가 1951년 7월 대구 주교관으로 옮길 때까지 약 1년 간 보금자리가 됐다.

왜관수도원 인근 창마 천주교 묘지에는 ‘북한에서 억류 중 돌아가신 형제들의 추모비’가 서있다.


한국전쟁 중 미군 하우스 보이로 일해

이 수사는 궁핍했던 전쟁 시기에 미군 하우스 보이로 일해 부산 중앙성당을 피난처 삼았던 수도 형제들과 신자들을 먹여 살렸던 이야기도 들려줬다. “부산 미군 부대에서 미군들이 음식을 해 놓으면 제가 큰 깡통 3개에 가득 담아 1개는 어깨에 메고 나머지는 손에 들고 중앙성당으로 가져가 나눠먹었습니다. 수도 형제들과 신자들이 300명은 됐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남북 분단의 소용돌이 속에 덕원수도원을 빼앗기고 사제품을 받을 길이 요원해진 노 신부가 사제가 되는 과정도 역경 속에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섭리를 느끼게 한다. 월남한 노 신부는 1950년 초 무렵 독일 오틸리엔 수도원 총아빠스에게 라틴어로 편지를 써 한국 상황을 전했고 한 달이 지나 ‘독일로 오라’는 답장을 받았다.

순명의 정신으로 독일에 가기로 결심했지만 세계 무대에서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던 시절에 비자를 발급받기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무모하다며 핀잔을 주는 이들도 있었다. “제가 라틴어를 잘 했기 때문에 고심 끝에 라틴어로 편지를 써서 초대 교황사절인 방 파트리치오 주교 서울 관저에 찾아갔습니다. 관저 입구에 수위가 서서 저를 못 들어가게 하면서 실랑이가 벌어졌고 밖에서 소란스런 소리가 들리자 관저 안에 있던 방 파트리치오 주교가 창문 틈으로 저를 보고는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습니다.” 편지를 읽은 방 파트리치오 주교는 교황청 인장을 찍은 문서를 노 신부에게 써주며 외무부에 제출하라고 했다. 그로부터 20여 일 만에 기적같이 비자가 나왔다. “스위스에 도착하고 두 달 후에 고국에서 전쟁이 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사제품은 1951년 8월 12일 독일에서 받았고 이듬해 한국에 있는 수도 형제들을 돌볼 책임을 부여받고 귀국했습니다.”


덕원수도원을 그리는 또 다른 실향민

두 수도자들이 들려주는 왜관수도원을 둘러싼 역사는 다시금 분단의 아픔과 ‘실향민’의 애환을 떠올리게 했다.

“처음에는 왜관 가실성당을 알아보다 왜관역이 바로 근처에 있는 왜관성당에 수도원 공동체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1952년에만 해도 다시 덕원수도원으로 돌아갈 줄 알았거든요. 그래서 교통편이 편리한 왜관성당에 ‘임시 수도원’을 마련했던 것이지요.”

임시 수도원은 결국 지금의 왜관수도원으로 성장, 발전했고 수도 형제들은 덕원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실향민이 되고 말았다. 한국전쟁 중 왜관성당에 생채기를 남긴 총탄 흔적들은 아물었을지라도 보이지 않는 분단의 슬픔은 여전히 가시지 않고 있다.

이 수사는 서울, 노 신부는 충북 제천이 고향이다. 가고 싶으면 갈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신앙의 고향’인 덕원에는 갈 수 없다. 덕원수도원이 1949년 폐쇄되고 한국인 수도자는 물론 독일인 수도자 누구도 덕원에 다시 가지 못한 채 66년 세월이 흘렀다. 덕원수도원 건물이 원산농과대학으로 사용되며 지금도 원형이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나마 위안거리다.

왜관수도원에서 멀지 않은 창마 천주교 묘지에는 ‘북한에서 억류 중 돌아가신 형제들의 추모비’가 서있고 덕원수도원을 그리워하며 세상을 떠난 수도자들이 누워 있다.

노 수도자들은 오늘도 덕원에서 함께 수도생활을 하다 먼저 하느님 품으로 돌아간 형제들의 안식과 남북통일을 위해 기도한다.

[가톨릭신문, 2015년 10월 18일, 
박지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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