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일)
(백) 부활 제5주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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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얼마만한 고비를 넘겨왔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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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규 [mugeoul] 쪽지 캡슐

2001-03-05 ㅣ No.144

내 생각으로 봐선 ’이방인 선교’란

초대교회 곧 오순절교회에 내린 성령의 계시로 주어진 것이지,

공생활 때의 예수 자신으로부터 직접 내려진 것은 아니라고 여겨진다.

 

물론 생전의 예수 자신의 초율법적이고 고결한 정신은

이방인에 대한 구원을 굳이 반대하지 않으셨겠지만,

그렇더라도 전인류적(全人類的) 구원은

그렇게 그분의 가슴을 사로잡는 꿈이 아니었다고 느껴진다.

 

그것은 그분이 폐쇄적이셨다는 뜻이 아니고,

그분께서 유대적 세계의 모든 것,

특히 외형적인 것은 모두 그대로 받아들이셨다는

사실에서 추찰(推察)해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분은

율법의 파괴가 아니라 율법의 완성을 목적했고,

그분의 선교에 대한 생각 역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내는 것이었고,

그분의 종말론은

그 시대 유대의 다니엘적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새롭게 세우셨다는

윤리 구절조차 탈무드나 ’시락의 예수’의 그것과 얼마나 비슷한가!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 곧 성령의 하느님은 이미 유대적일 순 없었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하느님의 그 뜻의 새로운 계시였고,

그것은 마르코적 표현을 빌자면

’인류 전체의 구원에 관한 복음의 시작’의 날이었다.

그 자리에서부터 바벨탑이 흩은 인류는

다시금 성령 안에서 모여들게 되었다.

 

이제부터 아브라함만의 종교는 아담의 종교로까지 확대되었고,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백성이란 의미도

인류공동체란 의미로까지 나아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아브람을 하란에서 불러낸 그 소명의 뜻이 보다 확실히 밝혀졌고,

그로부터 에덴은 잃어버린 낙원, 실낙원이 아니라

찾아야 하고 이루어야 할 세계, 복락원이 되었다.

 

어쨌든 ’이방인 선교’는 성령의 계시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했기에 베드로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을 때(사도 11장)

같은 그리스도인들로부터 그토록 격심한 반발을 쌓던 것이다.

또한 이것은 동시에 ’이방인 선교’가

사도 바울 개인의 인간적이고 독창적 생각이 아니었음을 나타내 준다.

 

물론 그때까지의 ’이방인 선교’란 것도

아직 인류보편적 차원의 것까지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기껏 유대인의 광범위한 해외진출, 곧 디아스포라 현상 때문에

이국에 거주하고 있는 유대인들에 대한 전교였을 뿐이었다.

 

그렇게 볼 때 전세계 인류에게로

우리 교회가 나아가게 된 지금의 현실 앞에 서면,

2천년 여정에서 얼마만한 고비를

우리 교회가 넘겨 왔던가 싶어 감회가 새롭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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