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1일 (토)
(백)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아버지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믿었기 때문이다.

종교철학ㅣ사상

뜨겁게 만나다: 리처드 하디의 무에의 추구 - 십자가의 성 요한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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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5-04 ㅣ No.162

[뜨겁게 만나다] 주님! 저는 사랑밖에 아무것도 몰랐나이다

리처드 하디, 「無에의 추구 - 십자가의 성 요한의 생애」


어느 인간이든 내면 깊숙이 들여다보면 상처 없는 영혼이 없습니다. 어떤 이는 그의 이름만 떠올려도 살얼음 조각에 베인 듯 싸한 아픔이 전해오는 이가 있습니다. 저에게는 이번에 소개할 책 「無에의 추구」 주인공인 ‘십자가의 요한’ 성인이 그렇습니다.


사순 피정에서 시 한 편을 만나다

어느 해 봄 사순시기에 전교가르멜수도원에서 피정을 했습니다. 그때 수녀님께서 읽어주신 시 한 편이 제 가슴을 긋고 지나갔습니다. 처음엔 눈을 감고 수녀님의 낭랑한 음성에 끌려 시 속으로 빠져들었는데 점점 가슴에 통증이 느껴졌습니다. 얼음 조각에 베인 듯 싸하고 아린 통증이. 어느 순간부터는 눈물샘이 터져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렸습니다.

저를 울린 시는 최민순 신부님께서 번역하신 십자가의 성 요한의 ‘어두운 밤’이었습니다.

그 광경을 조용히 지켜본 수녀님이 피정이 끝날 무렵 저에게 책 한 권을 건넸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의 생애를 다룬 「無에의 추구」란 문고판형 책자였지요. 저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그분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그저 스페인의 ‘신비주의 수도사’라는 정도밖에….

여느 해 사순시기 같았으면 커피를 끊거나 금요일 아침을 굶는 것으로 금욕적인 실천 한 가지를 행하며 지냈을 터인데 그해는 그냥 책만 읽기로 했습니다. 하루에 많은 분량을 읽지 않고 묵상할 수 있을 만큼만 조금씩 읽어갔지요. 대개의 평전이나 전기문이 그렇듯이 출생에서부터 성장, 죽음까지를 한 권에 망라한 책이었습니다.


교회 개혁운동과 시련 속에서

요한 예페스는 여덟 살에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그는 어려운 가정형편(그의 집안은 개종자로서 유다계 혈통이 들통 날까 봐 유랑생활을 하였다.) 때문에 열세 살 때부터 빈민들을 위한 특수병원 ‘라 부바’에서 간호조무사로 일하며 근근이 학업을 이어갔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살라망카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곧바로 예수의 성녀 데레사 수녀와 손잡고 교회의 개혁운동에 뛰어듭니다.

그동안 호의호식하며 온갖 특권을 누렸던 성직자와 수도자들에게 거친 베옷을 입고 맨발로 고행의 삶을 살자고 외치니 사달이 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일 먼저 그가 속했던 공동체에서 반발과 비난이 빗발쳤습니다. 급기야는 동료수사에게 보쌈을 당해 톨레도수도원으로 끌려가 종탑 꼭대기 방에 갇혔습니다.

온갖 모욕과 폭력이 쏟아졌습니다. 식사 때마다 식당 입구에 꿇어앉게 하고 동료수사들이 지나가며 가죽 회초리로 등짝을 치거나 빵 부스러기를 바닥에 던져주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널빤지 몇 조각을 이어붙인 다락방에서의 감금생활이 길어지자 등짝 상처에서 피고름이 묻어나고 추위와 배고픔으로 인한 육신의 고통이 극에 달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고 긴긴 밤 상처를 감싸고 오직 ‘임(하느님)’만 생각하며 시를 지었습니다. 이때 주옥같은 신비주의 시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어둔 밤’, ‘영혼의 노래’ 등 스페인 전통시의 최고봉 걸작들이.

육체의 고통이 깊어갈수록 임과의 긴밀한 대화에 빠져든 요한 사제. 교회 개혁의 선구자였던 그가 보여준 무구한 신앙심에 저는 그만 책장을 덮을 때가 많았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깊어지면 저토록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는 백오십 센티미터도 안 되는 작은 체구로 모진 시련을 견디다 1591년 12월 13일 자정을 넘기고, 조과경을 바치는 새벽 종소리를 기다리며 평온하게 숨을 놓습니다. 마흔아홉의 생애를 다락방에서 마친 것입니다.


성인의 고행을 좇아

저는 이 책을 읽고 그 봄 내내 몸살과 어지럼증을 앓았습니다. 그때는 몰랐지만 몸이 회복되면서 어렴풋이 하느님 곁에 가까이 갔었던 느낌이 들었습니다. 성인의 고행을 좇으며 특별한 체험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 뒤 ‘십자가의 성 요한’에 관한 책들을 모조리 찾아 읽었습니다. 책 속에서 우연찮게 만난 그가 지금은 나의 사표로서 영감을 주고 신앙의 길잡이 노릇을 해줍니다.

제 책상 앞에는 엽서 크기만 한 노란색 이콘 하나가 걸려있습니다. 제가 십자가의 성 요한을 존경하는 것을 알고 스페인 여행을 다녀온 친구가 사다준 그림입니다. 당신이 감금되어 있던 톨레도수도원 벽에 나타나셨던 예수님의 형상을 직접 그린 것으로 그때 받아 적은 “생의 황혼녘에 너를 사랑으로서 심판할 것이다(A la tarde te examinaran en el amor).”라는 글귀가 새겨진….

제겐 고약한 버릇이 있습니다. 좋아하는 인물이 생기면 집요하게 파고드는 습관. 처음엔 그의 사상을 좇다가 나중엔 내밀한 사생활까지. 그리고 그의 영혼의 실핏줄까지도 캐어보고 싶은 욕망이 발동합니다.

이렇듯 요한 예페스에 대한 관심도 깊어져 그의 성장기를 추적하다 부모를 알게 되었고 집안의 가계와 민족의 역사까지도 거슬러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시를 원문으로 읽고 싶어 스페인어 공부를 시작했는데 어쩌다 보니 스페인 역사와 문화에도 빠져버렸습니다.

이 세상 마지막 날, “예, 예, 주님! 저는 사랑밖에 아무것도 몰랐나이다.” 하고 대답할 수 있었으면….

* 유경숙 로사 - 소설가. 1997년 「창작수필」에 ‘기우도(騎牛圖)’가 신인상으로 당선되었고, 2001년 ‘농민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적화(摘花)’로 등단했다. 소설집 「청어남자」가 있으며 미니픽션소설집 6권을 공저로 펴냈다. 소설가협회. 한국작가회의, 한국가톨릭문인회 회원이다.

[경향잡지, 2013년 4월호,
글 유경숙 · 그림 박순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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