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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교회의 도전들1: 무신론 - 그리스도교를 위한 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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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8-16 ㅣ No.180

21세기 교회의 도전들 (1) 무신론 - 그리스도교를 위한 변호?


통상 ‘무신론’은 신을 부정하는 다양한 현상, 태도, 이해의 방법만이 아니라 신앙 또는 종교를 비판하는 생각까지도 포함한다. 그런데 그 뿌리와 동기가 각양각색이고 중첩되어 있어 일목요연하게 규정하기가 어렵다. 그러기에 몇 가지 인위적으로 전제를 정하고 접근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무신론은 그리스도교의 귀결현상이요, 그리스도교의 분해현상이었다. 그리스도교 이전과 그리스도교 밖에서는 신적인 것을 일체 부정하는 철저한 의미의 무신론이 관찰되거나 증명되지 않는다. 거기서 무신론은 기껏해야 개별적으로 나타났을 뿐 집단운동으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그 철저성과 집단성으로 인해 단연 구별되는 근대적 무신론은 경험론과 실증주의, 진보주의와 계몽주의, 유물론과 진화론 등 다방면에 걸쳐 준비되다가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유럽에서 만개한 사상 현상이었다. 그러기에 우리는 무신론이 그리스도교 문명 이후에 그리고 그리스도교 문명권 안에서 발생한 현상이라고 단언하게 된다. 무신론이 그리스도교와 함께 등장한 독특한 현상이라는 점에서 교회의 책임감이 남다르다고 하겠다.


신학과 무신론, 빛과 그림자

고대와 중세의 학문은 일반적으로 우주의 최고 존재, 초월적인 존재를 탐구하고 그로부터 세계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숱한 어려움과 갈등 중에도 중세 전성기의 유럽이 하나의 문화적 사회적 질서체계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 것은 통일성의 최종 정점으로서의 신을 전제하는 그 세계관이 확고부동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세말기의 새로운 자연과학적 발견과 이성에 대한 재평가는 전통질서의 붕괴를 초래하고 새로운 사상의 발생을 재촉하였다.

근대의 무신론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조짐들은 16세기의 교회분열에까지 소급된다. 교회 내부의 불일치, 종파 간의 전쟁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신성(可信性)을 온통 뒤흔들어놓았고, 타종교의 발견과 그 이해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상대화 또는 무관심을 불러왔다.

이 밖에 근대를 특징짓는 지리상의 발견, 새로운 천체우주관의 수립, 계몽주의적 인간관, 세속화 등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무신론은 먼저 지식인들 사이에 나타났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스스로를 진보된 자, 인류의 종교적 유아기를 극복한 자로 자부하였다.

사실 하느님은 객관적으로 명상하기에는 너무나 가까이 계시고, 주관적으로 관찰하기에는 너무나 멀리 계시다. 그 때문에 신학과 무신론은 빛과 그림자처럼 늘 묶여왔고, 또 그 때문에 신학자가 된 무신론자가 있는가 하면 무신론자가 되어버린 신학자도 있었다.

신학과 아름다운 관계를 맺는 이가 있는가 하면 악연의 관계를 갖는 이도 있었다. “철학자는 철학과 함께 이성을 잃고, 신학자는 신학과 함께 신을 잃으며, 수도자는 수도생활과 함께 신앙을 잃는다.”는 서양격언이 있다. 포이에르바흐, 니체야말로 신학으로부터 출발하여 무신론자가 된 전형적인 인물들이었고,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는 또 이들로부터 영감을 얻고 영향을 받은 인사들이었다.

그 결과 한때 소수의 사람 사이에 이야기되던 무신론이 점차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더니 19세기에 들어와서는 일반현상이 되기에 이르렀다. 20세기 중반 동유럽에서는 급기야 ‘정치적 무신론’이 국가 이데올로기로 장려되기도 했다.


관찰과 증명, 결단과 고백

지난 세기 1960-70년대에 신을 부정하는 것은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신의 도움을 간구해 오던 신앙인들이 오히려 정처 없는 신세가 된 신을 걱정하고 변호해야 했다. 무신론이 도처에서 동의를 얻고 만연하던 이때, 신앙은 자기 언어를 잃어버리고 교제능력을 상실한 듯 보였다. 신학은 본연의 위기를 맞이했고, 신앙인들은 초조하게 그 귀추를 기다려야 했다.

무신론자들의 웅변은 빛나고 논리는 매서웠다. 그들이 제기하는 물음이 고통을 주건만 피할 수가 없었다. 사실 주요 무신론의 논증들은 신의 존재를 의문시하게 만들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신의 비-존재를 의심할 나위 없이 만들기에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 포이에르바흐의 투사이론, 마르크스의 아편이론, 그리고 프로이트의 환영이론이, 하느님이 다만 인간의 투사, 또는 다만 다른 관심사에 의한 위로, 또는 다만 유아기적 환영이라는 주장을 증명해 낸 것은 아니다.

무신론적 휴머니즘(포이에르바흐)을 통한 종교의 지양도, 무신론적 사회주의(마르크스)를 통한 종교의 고사(枯死)도, 그리고 무신론적 과학(프로이트)을 통한 종교의 해체도 참된 예언이 되지는 못했다.

결국 신앙에 대한 철학적-심리학적(포이에르바흐) 해석도, 사회비판적(마르크스) 해석도, 그리고 정신분석학적(프로이트) 해석도 하느님의 존재 또는 비-존재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때로 신의 존재가 의문스러운 경우가 있지만, 신의 비-존재 역시 그러한 것이다.

신의 존재가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무신론 역시 그러하다. 이러한 비김수 상황에서 남아있는 것은 결단의 문제이며, 신앙은 관찰과 증명보다는 결단과 고백에 의해 힘을 받는다는 것에 사람들은 동의하고 있다.


성찰과 권고, 정화와 심화

아무튼 무신론은 신학적 논의와 설명을, 그리고 교회의 입장표명을 요구하였다. 실제로 교회와 신학은 파문으로부터 개별화된 신학적 대응조치에 이르기까지 방법적으로 그리고 내용적으로 여러 길들을 모색하였으며, 특수하고도 첨예한 시각을 갖추고 위기들을 극복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많은 것을 고려할 때 전체적으로는 무신론이 상이한 전망에서 적극 수용되었다고 하겠다.

때로는 무신론 자체를 승인함으로써 신학에게는 의미심장한 해법이, 그러나 동시에 소요가 일어나는 경우도 있었다. 그로 말미암아 신학 내외에 새로운 위험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그러나 이로부터 현대에 하느님에 관하여 새롭게 말할 수 있는 가능성들도 개진되었음은 환영할 일이었다. 근대의 무신론은 그리스도교가 이원론의 전통에 머물러 세상과 차안 그리고 육신을 억압해 왔으며, 신에 관하여 너무나 순진하게 속단해 왔음을 올바로 폭로하였다.

무신론자들의 비판은 관념주의, 개인주의에 치우치기 쉬운 그리스도교 신학과 교회가 실제적, 심리적, 사회적 차원을 간과하지 않도록 강력하게 일깨웠고, 인간존재의 육신성과 역사성을 잊지 않도록 경종을 울려주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의 본래적인 것을 성찰하도록 권고하고, 교회의 선포와 프로그램의 정화 및 심화를 요구하였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신학에 공헌도 했다. 실제로 지난 세기 그리스도교 신학계를 강타하고 있는 탈신화화의 노력과 세속화 신학들에서, 초월신학 안의 인간학적 전환의 추세에서 그들의 발자국이 남긴 여운은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그들의 비판 역시 교회의 자산이 된 것이다.


거룩한 교회, 죄 많은 교회

교회는 자신이 역사를 형성하고 함께해온 전체 과정에서 오히려 역사에 유혹되고 굴복해 온 모습과 스캔들이 될 만한 외모를 지녔음을, 그래서 스스로는 거룩하고도 죄 많은 교회임을 자각하고 있다. 교회는 ‘신자들의 불신앙’ (마르 9,24 참조)을 신중히 고려하고, 동시에 “무신론적 사고방식에 숨어있는 더욱 깊은 이유들을”(사목헌장, 21항 참조)찾고 대화하고자 하였다. “무신론 역시 실제로는 인간이 신에 대한 물음을 대하는 하나의 형태이며, 심지어는 이 문제에 대한 정열의 표현”(요제프 라칭거)일 수 있다.

교회는 비판적으로 자기 입장을 피력하는 무신론자들이 정당한 취지도 지니고 있음과 아울러 이러한 무신론에 올바로 대처하려고 교회의 존재방식이 제도적 규약에 이르기까지 인격적 그리고 실제적으로 변화되어야 함을 절실히 깨닫고 있다. 무신론은 이처럼 이론적으로는 극복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실제로 발생하고 있는 무관심과 증가하는 냉담, 이른바 실천적 무신론이 해소된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한스 큉 신부의 다음과 같은 말은 호소력이 높다. “이 세계가 별로 변하지 않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가장 강한 논박은 그리스도교적이 아닌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리스도교를 위한 가장 강한 변호는 그리스도교적으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이다!”

* 배영호 베드로 - 수원교구 신부. 교구에서 운영하는 경기도 평택의 효명고등학교 교장을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3년 8월호, 배영호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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