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1일 (토)
(백)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아버지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믿었기 때문이다.

종교철학ㅣ사상

뜨겁게 만나다: 차동엽 신부 엮음, 김수환 추기경의 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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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8-16 ㅣ No.182

[뜨겁게 만나다] 날마다 뜨겁게 받아 읽는 추기경의 편지

차동엽 신부 엮음, 「김수환 추기경의 친전」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이 말씀을 끝으로 선종하신 날, 수많은 사람들이 명동성당으로 질서정연하게 걸어 들어가는 모습을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보면서 나도 모르게 복받쳐 오르는 뜨거운 눈물에 나의 영혼이 홍건하게 젖어가고 있음을, 그리고 나의 육신은 그분의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의해 꼼짝도 할 수 없었음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내가 뜨겁게 만난 「김수환 추기경의 친전」은 추기경님께서 살아 생전에 하셨던 ‘말씀’을 차동엽 신부님이 배달해 준 편지이다. 나는 추기경님의 ‘말씀’을 편지로 받을 때마다 ‘허형만 가브리엘 형제 친전’이라는 겉봉을 먼저 읽게 된다. 국어사전에는 ‘친전(親展)’을 “편지를 받는 분이 몸소 펴 보아주기를 원하는 말”로 풀이하고 있다. 어쩌다 나에게까지 이런 귀한 편지가 ‘친전’으로 배달되고 있을까, 감사할 따름이다.

추기경님께서 평화신문 기자의 요청에 따라 애송시로 읊으셨다는 고은 시인의 ‘가을 편지’ 가운데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에서처럼 ‘그대’ 속에 나도 포함되었다는 이 고맙고 감사할 일이 나는 말씀의 편지를 읽을 때마다 경이로움으로 다가오곤 한다. 이제부터 이 글을 읽는 당신도 “그대가 되어” 받으셨을, 나도 받은 편지를 몇 대목만 공개한다.


제1신.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데 칠십 년 걸렸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긴 여행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것입니다. 머리에서 마음에 이르는 것. 머리에서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마음에까지 도달하게 하여 마음이 움직여야 하는데 그것을 우리는 모두 잘 못합니다.”


나도 내년이면 우리 나이로 칠십이 된다. 그런데 그 ‘사랑’이 아직도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려 하질 않는다. 인생에서 가장 긴 여행이 “머리에서 마음에 이르는 것”임을 미처 깨닫지 못한 우매함 때문인가.

추기경님은 내게 말씀하신다. “마음을 움직여라!” 이것이 곧 지금까지 잘못 살아온 나의 삶과 신앙을 바로잡는 길일 터. 그러니 추기경님이 칠십 년 걸린 그 길을 나도 앞으로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이 얼마가 걸리더라도 사랑을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게 해야 하리.


제2신.
“세상을 어둡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전기가 다 나간 뒤 불을 밝힐 것이 없으면 어두울 것인가? 아니다. 습관이 들면 태양만으로도 족하다. 달도 없으면 별빛만으로도 족하다. 그것마저 없어도 관계없다. 마음만 편하다면! 가장 어두운 것은 삶의 희망이 완전히 없어졌을 때이다. 삶의 의미가 없고, 보람이 없고, 미래가 전혀 없을 때이다. 그것은 곧 죽음이다.”

신앙인에게 희망은 곧 그리스도의 빛이리라. 나는 그 빛을 찾아 1988년 광주 피정센터에서 제28차 매리지 엔카운터(ME)에 참여하여 눈물로 기도했었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수상집인 「희망의 문턱을 넘어」를 탐독했었다. 요즘에는 추기경님의 이 편지를 나에게 보내준 차동엽 신부의 「희망의 귀환」을 다 읽고 나서 차 신부가 추기경님의 희망철학의 배달부로서 적임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 편지 마지막을 “삶의 의미가 있고, 보람이 있고, 미래가 있을 때, 그것이 곧 희망이다.” 이렇게 바꾸어 며칠 전 초청강연에서 써먹었다. 써먹다니, 아니다. 희망 없는 곳에도 희망이 있다 하시던 추기경님의 편지를 나도 배달했다. 아울러 차 신부의 희망 메시지도 함께 덤으로 배달했다. “나도 희망한다. 너도 희망하라(Spero, Spera).”


제3신.
“윤동주의 ‘별 헤는 밤’, 특히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구절을 좋아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이렇게 시작되는 ‘서시(序詩)’도 매우 좋아하지만 감히 읊어볼 생각을 못했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운 게 많아서 그런 것 같다.”

추기경님의 편지를 읽고 나는 내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운 존재인가를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명색이 시인이랍시고 40년 동안 시를 써오며 13권의 시집을 겁도 없이 출간했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추기경님께서 나를 모르셨던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르겠다.

“서시(序詩)도 매우 좋아하지만 감히 읊어볼 생각을 못했다.”고 하신 추기경님께, 선생 노릇 40년 동안 너무 함부로 이 시를 가르치고 읊고, 심지어 중국 용정에 갔을 때 윤동주 무덤 앞에서 이 시를 읊었던 점을 용서받고 싶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운 게 많아서”라고 말씀하시는 추기경님은 진정한 시인이시다.

마지막으로 추기경님의 부임지 김천 성의여고 시절부터 알고 지냈다는 신치구 장군의 회고담이 오늘 아침 배달된 편지 속에 덤으로 전해졌다. “내가 김 추기경님을 가장 존경하는 이유는 따로 있어요. 다른 게 아니라, 김 추기경님은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의 험담을 한 적이 없어요.” 알렐루야!

* 허형만 가브리엘 - 1945년 전남 순천에서 태어나 「그늘이라는 말」, 「첫차」, 「영혼의 눈」 등 13권의 시집과 여러 권의 수필집, 평론집을 냈으며, 한국시인협회상, 영랑시문학상, 월간문학동리상 등을 수상했다. 한국시인협회 심의위원장을 지냈고, 지금은 목포대학교 명예교수이며 국제펜한국본부 심의위원장이다.

[경향잡지, 2013년 8월호,
글 허형만 · 그림 박순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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