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6일 (목)
(백)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이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선교ㅣ복음화

교회의 선교에 있어서 사제와 평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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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9-23 ㅣ No.336

[레지오 영성] 교회의 선교에 있어서 사제와 평신도 (1)

 

 

복음화란 무엇인가?

 

“복음화(evangelization)”라는 단어를 다함께 한번 살펴봅시다. 복음화는 그리스어로 “복음”을 뜻하는 ‘euangelion’으로 부터 나온 것이며, 글자 그대로의 의미는 “기쁜 소식” 또는 “희소식” 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복음화”의 의미는 바로 이 희소식이 알려지게 하는 것입니다. Euangelion 이라는 용어는 그리스도교 이전에 있었던 두 가지 기원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으로서, 예수님의 행동을 통해 두 가지가 합해져 그리스도교에서 어떤 특정한 의미로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그 첫 번째 기원은 예언자 이사야가 선포한 기쁜 소식의 전달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이사 61.1). 여기서 말하는 가난한 이들은 하느님을 위해 고난을 겪으면서도 모든 역사적인 대재앙 속에서도 견실하게 남아있어온 믿음이 충실한 이스라엘 백성들 입니다.  

 

두 번째 기원은 비유대민족적인 요소입니다. 동양의 왕국들과 후기 로마제국에서 Euangelion은 새로운 황제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알리는 소식이라는 의미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평화, 정의와 웰빙의 새 시대가 도래한다는 것을 알리는 분이였으며, 그 분의 존재와 행동이 세상과 역사를 새롭게 하는 “기쁜소식”인 것입니다. 황제의 포고가 Euangelion이었으며, 그것은 자신들과 함께 세상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전해지는 소식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기쁨의 소리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복음은 이런 정치적인 이론들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예수님은 명확하게 회개와 믿음을 촉구하는 것으로 당신의 복음전파를 시작하셨습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코 1.15) 그분의 선포에서 “복음”의 나라와 “하느님의 나라”는 아주 가까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시다는 확신을 주셨는데, 그분은 현존하시며, 소리로 부를 수 있는 거리에 계시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이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전파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인데, 바로 하느님과 직접 친구관계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는데 있어 핵심은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예수님 그 자체와 결합되도록 하셨다는 소식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이시며, 현존하는 하느님의 구원인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복음이며, 복음은 예수님 그 자체, 즉 그분의 말씀과 행동 모두를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전파는 부활의 위대한 신비, 즉 우리로 하여금 구원을 받고, 또 하느님과 친구이며 자녀로서의 분명한 관계에 놓이게 해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신비 속에서 완성된 것입니다. 부활 이후,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복음서들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원 활동에 대한 것들을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것이 필수적인 복음화의 수단이 되어왔습니다. 복음화 한다는 것은 복음서들을 통해 우리가 그분에 대해 알게 된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황께서는 라칭거 추기경이셨던 2003년 12월 교리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대화에서 새로운 복음화에 대한 가능한 접근방안 한 가지를 제시하셨습니다. 교황께서는 우리 모두가 직면하는 삶에 대한 기본적인 질문을 언급하면서 이를 제시하셨습니다. 즉, 내 삶의 잠재적인 부분들이 어떻게 완전하게 깨우쳐지게 될 수 있는가? 사람이 어떻게 삶의 방법을 배우게 될까? 진실 된 행복에 이르는 통로는 무엇인가? 그러고 나서 교황께서는, “복음화를 한다는 것은 이 통로, 즉 완전한 삶의 방법을 가르치는 방법을 보여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하셨습니다.

 

당신의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러 왔다”(루카 4.18)고 하셨는데, 교황께서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나는 존재에 대한 너희들의 근본적인 질문에 응답하고자 왔다. 나는 너희에게 삶의 통로, 즉 행복으로 가는 통로를 보여주기 위해 왔다. 사실, 내가 그 통로다.”라는 의미라고 말하였습니다. 교황께서는 계속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절망적인 빈곤은 물질적인 빈곤이 아니라 영적 빈곤입니다. 영적인 빈곤은 기뻐할 줄 모르는 것, 삶은 부조리한 것이며 모순된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 빈곤은 지금까지 없었던 물질적 풍요로움이 있는 이 시대에 있어 아주 흔한 것이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많은 폐해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기뻐할 줄 모르는 현상이 일어나면서 사랑할 줄 모르는 현상으로도 전이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삶에 대한 불만족, 질투와 탐욕이 발생되고 있으며, 이러한 것들은 모두 개인의 삶과 세상을 황폐화 시키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는 새로운 복음화를 필요로 하는 것 입니다. 교황께서는, “삶의 방법을 알지 못하면, 그 어떤 것도 올바르게 기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복음화 활동에 대한 도전

 

우리가 효과적이며 설득력 있는 복음화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바로 삶의 진실 된 통로, 즉 빛과 기쁨을 가져다주는 통로라는 인식을 다시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중대한 장애물들에 봉착하고 있는데,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1) 그리스도교 교리가 요구하고 있는 것과 의무사항들로 인해 종종 그리스도교는 기쁨으로 가는 통로가 아니라, 오히려 장애물이라는 인식을 가지며 (2) 그리스도 교리는 인간의 존재에 대하여 주관적인 진리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는 반면, 많은 사람들은 완전한 진리는 없다고 믿으며, 혹시 그렇다고 하더라도 믿기 어렵다고 생각하며 (3) 그리스도교 교리는 구원의 소식을 선포하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구원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구원받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교의 메시지에 무관심하다.* 이 글은 지난 2007년 5월 22일부터 24일까지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꼰칠리움 레지오 마리애가 ‘새로운 복음화 : 사제와 평신도 ? 새로운 천년기의 거대한 도전’을 주제로 개최한 대회에서 조셉 머피 몬시뇰(바티칸 국무성, 크로인교구 사제)이 연설한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3년 4월호, 글 조셉 머피(몬시뇰, 바티칸 국무성, 크로인교구 사제), 역 이재호 스테파노(대구 Se. 국제서기)]

 

 

[레지오 영성] 교회의 선교에 있어서 사제와 평신도 (2)

 

 

1. 즐거움(기쁨)

 

그리스도교를 즐거움의 적으로 치부하는 사람들 중에서, 독일의 철학자인 프리드리히 니체는 특별히 주목할 만합니다.  니체는 자신의 저서 ‘권력에 대한 의지’에서 삶의 가치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실체를 규정하면서, 천상 왕국과 금지사항들을 강조하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윤리를 이 세상에서의 즐거움을 거부하는 것으로서, “삶에 대한 중대한 범죄”라고 비난하였습니다. 니체는 그리스도교의 윤리를 거부하였는데, 그는 이 윤리를 구속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행동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적개심의 표현이며, 따라서 사람에게 필수적인 권력과 즐거움에 방해가 되는 “경멸적인 윤리”로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몇 년 전, 아직 로젠버그 대학교에서 현직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던 당시에, 고위 성직자 한 분이 니체의 오류들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리스도 교리는 진리와 진정한 즐거움에 이르는 유일한 통로며, 즐거움의 적과는 아주 거리가 먼 것이라고 주장했었습니다.

 

사람은 완전한 내적인 평온을 즐길 때 비로소 기쁨을 느끼게 되는데, 이러한 내적인 평온은 그가 누군가에 의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에만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물질적인 필요가 충족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기본적인 갈망도 충족되고, 사랑받을 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람은 사랑받고, 그렇게 자신이 사랑받는다는 것을 알게 될 때에만 한결같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경험을 통해 우리는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압니다. 엄마 품속에 안겨있는 아기는 엄마의 미소에 반응하면서 행복해집니다. 엄마의 사랑이 없다면, 그 아기는 초췌한 모습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한 인간적인 사랑은 종종 스스로의 이기심과 혼합되어 결과적으로 지속되지 못하곤 합니다. 아무리 가장 완벽한 사랑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죽음으로 인한 결별에 의해 끝나게 됩니다. 인간적인 사랑 그 자체로만으로는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 얻게 되는 지속적인 내적 기쁨을 만들어 주기엔 불충분 합니다.

 

우리는 인생의 모든 굴곡들을 견디어 낼 수 있게 해주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이 사랑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거나, 또는 무엇인가를 줄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우리라는 존재에게 조건 없이 주어지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떠오릅니다. 즉, 사랑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 인가? 라는 것입니다. 교황께서는 추기경 시절에,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단순히 말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으로 표현하는 것 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그래, 네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좋은 거야.”라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내게 살아 갈 용기를 주는 사랑은 진리에 근거하고 있을 때만 완전한 만족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정말로 좋아?”라는 질문에 명료하게 답변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그 사랑은 단지 하나의 비극적인 기만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아주 분명한 것 한 가지는, 나와 하나가 되는 것과 같은 내 취향 위주의 행동은 모든 사람들에게 의구심을 던져 줄 것 입니다. 사랑 그 한 가지 만으로는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짝을 이루어야 합니다. “사람은 사랑과 진리가 조화를 이룰 때만 즐거움을 알게 되는 것 입니다.”  

 

오직 하느님께서만 우리에게 이런 종류의 확신을 주실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다시 한 번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존재할 수 있도록 해 주셨는데, 그분께서 우리가 필요하거나, 아니면 우리가 그분께 무엇인가를 드릴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단지 사랑으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베네딕토 교황께서는 당신의 착좌 미사에서 하신 강론 중에 이러한 진리에 대해 강조하셨습니다. “우리는 진화의 결과로 태어난 일상적이거나 또는 의미없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 한 명 한 명은 모두 하느님의 생각의 결과물인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대로, 사랑으로, 그리고 필요하기 때문에 창조된 존재인 것 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에 조차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셨는데,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합니까? 십자가상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최상의 표현이며, 그 분의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진실 된 사랑은 죽음도 극복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교황께서 말씀 하신 것처럼, “하느님은 인간을 아주 귀하게 여기시어, 당신 스스로 인간을 위해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십자가는 복음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으며, 그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존재를 분명하게 인정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십자가 상 죽음의 단계에 이르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사랑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믿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기쁜 소식은 이것입니다. “복음은 모든 다른 즐거움의 모호성을 없애주고, 그것을 기꺼운 즐거움으로 바꾸어 주는 유일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의 그 깊은 본질은 바로 기쁨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를 믿는 사람들은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형태의 복음화는 그리스도를 믿게 됨으로서 발견할 수 있는 기쁨, 즉 우리 신앙의 기쁨을 발견하도록 이끄는데 목표를 맞추어야 합니다. 많은 현대인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 영적인 빈곤과 모든 사람들이 당면하게 되는 가장 기본적인 의문, 즉 삶과 행복의 의미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위해 사람들이 진실 된 기쁨은 어느 곳에 있는지 발견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복음화의 목표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진실 된 기쁨을 발견할 수 있으며, 오직 그분 안에서만 삶에 가치를 부여하고, 또 그 삶이 살아갈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 주는 진리와 사랑을 발견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데 맞추어야 합니다. 

 

교황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나 복음을 알게 되면서 놀라움을 표하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은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와 우리의 친분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주는 것 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를 행함으로써, “세상 모든 곳으로 전해지기를 열망하고 있는 하느님의 기쁨”을 전하는 기쁜 활동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3년 5월호, 글 조셉 머피(몬시뇰, 바티칸 국무성, 크로인교구 사제), 역 이재호 스테파노(대구 Se. 국제서기)]

 

 

[레지오 영성] 교회의 선교에 있어서 사제와 평신도 (3)

 

 

2. 진리

 

기쁨과 진리에 대한 질문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진리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인간의 능력을 실질적으로 지켜주는 근본적인 방안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상대주의에서 오는 절망감, 즉 근원적인 진리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없다고 믿거나, 삶에 있어서 궁극적인 실질적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절망의 나락에 떨어질 필요가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복음은 완전한 진리가 존재하고 있으며, 삶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로써 분명한 실질적 의미와 의도를 가지고 행하신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도덕적 지침을 제공함과 동시에, 하느님과 세상의 조화, 그리고 이성과 신비간의 조화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교는 진리와 사랑의 가치의 일치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과거 추기경 시절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는 그리스도교의 소개라는 책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궁극적인 가치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를 알고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나 자신을 그 분께 의탁할 때 생기는 것 입니다. 이러한 의탁은 자신이 걱정하는 모든 것들은 엄마의 ‘아이’로 있을 때는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아이의 그것과 같은 것 입니다.”

 

사람은 살아가는데 있어 가치와 사랑 모두를 필요로 합니다. 궁극적으로 가치와 사랑은 동일한 것이며, 진리이시며 사랑이신 하느님 안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가치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본질적인 부분이며, 그것으로 사람이 살아가게 해주는 빵입니다. 아무리 풍요로운 속세의 안락함이 주어지더라도, 말씀, 가치, 그리고 사랑이 없다면 사람은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는 상태에 떨어지게 됩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으로 여겨지기 위해서는 나와 세상을 지탱해 주고 있는 가치에 나 자신을 의탁하고, 그 가치를 내가 아무 걱정 없이 살아 갈 수 있도록 해주는 굳건한 토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을 볼 때, 만일 그리스도교가 당면하고 있는 현세의 위기 속에 놓여있는 사람들을 설득시킬 수 있는 힘을 되찾고자 한다면, 그리스도교가 진리의 종교이며, 사랑의 종교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환기 시켜주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그리스도 신앙은 상대론자들이나, 개인의 감정에서 나온 질문으로 격하시키는 사람들, 또는 진리로부터 괴리된 개인적인 의견으로 치부하는 사람들의 쓸데없는 의견이 아니라, “새로운 복음과 세대를 이어가는 교회의 완전하고 기쁜 믿음”으로써 현대 사회에서 아직까지 기회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신앙이 무한함, 진리, 그리고 사랑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갈망을 지니고 있는 인간의 본질과 교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복음화는 모든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이러한 변함없는 진리와 사랑을 널리 퍼트리는 것과 관련된 사항인 것입니다. 진리는 모두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며, 그 어느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습니다.  진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에게 주어지는 순수한 선물이며, 사제이든 평신도이든 관계없이 다른 사람들과 대가없이 이 선물을 서로 나누도록 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3. 구원

 

현대인들이 구원을 필요로 할까요? 자신들의 능력과 이룬 업적들을 바탕으로 그들은 자신을 믿으며 자만에 빠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의 기본적인 욕구들은 충족되었고, 예전에는 단지 꿈에 불과했던 삶의 기준도 충족시킬 능력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본 욕구들이 충족되고 있는 것에 대해 스스로 만족하고, 갈망이 없는 목표를 지닌 채 현세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가 보여주고 있는 인간 존재에 관한 극적인 요소에 무관심하고, 따라서 그리스도교가 제시하고 있는 위대한 희망에 대해 마음을 닫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 이러한 상황에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임무는 주눅이 들기 십상인 것처럼 보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구원이라는 것을 필요로 조차 하지 않는 것처럼 느끼고 있는 사람들과 구원의 기쁜 소식에 대해 대화를 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사실은 그 어느 누구도 ‘존재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일까?’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내 삶이 성공적인 것이 될 수 있을까?’라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인간들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 풍요로운 세상에서 아직까지 질병, 굶주림, 학대, 폭력과 빈곤, 아무도 어쩔 수 없는 외로움, 알코올과 마약의 노예, 매일 살아가면서 직면하는 모든 위협에서 오는 공포, 그리고 존재감의 상실 등에서 오는 괴로움으로 인해 지속적인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인간은 자기 스스로 또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파생되는 모든 종류의 파벌과 긴장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비로워지려고 하는 것, 그리고 자유 속에서 참된 존재감을 구축하는 것 등과 같은 선한 일들을 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능력의 한계와 타고난 나쁜 습관으로부터 진정으로 선한 것과 고귀한 것을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함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장애물에 봉착하게 됩니다. 결국, 어떤 면에서 보면, 모든 사람은 우리가 그것을 무엇이라고 명명하든 관계없이 무엇인가 절대적인 것을 찾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행복, 충만함과 사랑을 추구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확신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러한 것을 우리 스스로 달성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 처해있는 조건은 소외, 고통, 악행, 한계, 유한성, 불확실성과 죄로 묘사될 수 있으며, 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는 구원을 통한 해방과 화해를 급박하면서도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있는 것 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3년 6월호, 글 조셉 머피(몬시뇰, 바티칸 국무성, 크로인교구 사제), 역 이재호 스테파노(대구 Se. 국제서기)]

 

 

[레지오 영성] 교회의 선교에 있어서 사제와 평신도 (4)

 

 

그렇다면 구원은 무엇입니까? 구원을 뜻하는 그리스어 stria는 광범위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Stria는 육체적인 건강, 사회적인 웰빙, 정신적인 건강 또는 종교적인 구원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에서는 구원에 두 가지의 필수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고통과 악행으로부터 해방(Erlosung)이며, 또 다른 한 가지는 절대적인 선, 즉 삶의 완전성(Heil)을 허락하는 것 입니다. 완전하게 산다는 것은 자유와 사랑 속에서 사는 것을 의미하며, 그 삶이 분명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가장 깊은 소망들을 충족시키며, 행복을 발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 입니다. 구원에 대한 질문은 최종적으로 자신의 삶의 성공 또는 실패 여부에 관한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구원을 스스로 이룰 수 없다면, 우리는 어딘가 다른 곳으로부터 그것을 받아야 합니다.   

 

참된 구원의 소식은 현재 우리의 삶에 가치를 부여할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참된 구원의 소식은 또한 우리의 내적인 긴장을 해소시켜주고, 다른 사람들, 우리 주변의 세상, 그리고 하느님과의 화해를 이룩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또한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도 답변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이러한 조건들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그 구원의 소식은 사람을 미혹시키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구원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근본사상은 그리스도의 구원활동에 중심을 두고 있습니다. 그 구원의 근본사상은 우리로 하여금 만일 우리가 이러한 구원을 신앙으로 받아들일 의지가 있고, 또 우리 삶의 방식에 따라 구원이 결정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우리를 타락시킬 수 있는 악으로부터, 그리고 우리가 저지른 악행으로 부터 이미 원천적으로 구원 받았다는 것을 확신하게 해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선물들을 거부하거나, 인간의 자유를 남용하는 것과 같은 죄로부터도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이 구원의 메시지는 우리가 고통과 죽음을 벗어날 것이라고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가 이러한 고통스런 현상들을 변화시켜서 최종적으로 그것들이 아주 유용한 것이 되도록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구원은 현세에서 시작되지만, 그 속에는 다음 세상에서 완전하게 드러날 요소가 하나 숨겨져 있습니다.

 

물론 구원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 선물을 우리는 받아들이거나 또는 거부할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을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어, 우리를 당신과의 친구관계로 초대하시며, 구원의 선물을 받아들일 것을 권유하십니다. 그 구원은 소원해진 관계를 회복시켜 주고, 우리를 충족과 행복으로 이르는 통로 위에 설 수 있게 해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2천여 년이 지난 오늘에도 변함없이, 우리 모두가 물어보고 있는 가치, 구원, 그리고 궁극적인 행복에 대한 질문에 답변을 해주시고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의 가장 깊은 갈망에 대한 답변이며,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도록 해주시고, 우리 모두가 열망하는 진실, 사랑, 그리고 기쁨을 우리에게 주신” 바로 그 분이십니다. 그리스도의 구원활동은 진정한 기쁨의 근원입니다. 하느님의 진면목과 그리스도께서 드러내 보여주시는 궁극적인 삶의 가치를 알게 될 때 기쁨이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선하심, 그리고 그분의 사랑과 만나게 될 때 바로 그 기쁨이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흠숭하고 그 분의 사업에 동참할 때 우리는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교황께서, “누구든 그리스도를 알게 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이끌어야 합니다. 커다란 기쁨은 한 사람에게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 기쁨은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져야 합니다.”라고 강조하신 바와 같이, 이 기쁨은 모두가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사제와 평신도들에게 주어진 과제

 

사제이든 평신도이든 관계없이 복음화 임무를 행한다는 것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그들이 그리스도에 속한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게 해주는 활동을 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제들은 서품을 받을 때 보통 성화와 함께 자신들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성경에서 인용한 문구를 수록한 작은 카드를 나누어 줍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 1951년 6월29일 프레이징 주교좌성당에서 서품을 받을 때, 교황께서는 다음 문구를 선택하셨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의 믿음을 좌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기쁨을 위하여 여러분과 함께 일하는 것입니다.”(2고린 1,24) 교황께서는 당신의 교황 착좌 미사에서 이 주제로 다시 돌아가서, 사제들 삶의 목적은 바로,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라고 지적하시면서, 사목은 궁극적으로, “기쁨을 위한 활동이며, 이 세상에 스며들기를 갈망하는 하느님의 기쁨을 위한 활동”이라고 하셨습니다.         

 

교황께서는 추기경이던 1988년 당시에 사제들의 영성에 관한 당신의 강론 모음집인 “기쁨의 성직자들” 이라는 제목의 책자를 출간하였습니다. 사제는 먼저 자신을 위한 기쁨을 발견해야 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와 친밀한 친구관계를 이루는 속에서 복음의 근본정신을 완전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사제는 자신이 감내해 내어야 할 시련과 고통에 상관하지 않고 주님을 신뢰하게 될 때에만 사제로서 기쁨을 얻게 되며, 비록 겉으로 나타난 결과는 그리 많은 것처럼 보이더라도, 주님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행하는 그의 활동은 하느님의 왕국을 성장시키는데 있어 많은 기여를 하게 될 것 입니다.

 

물론 복음화는 사제들만의 임무가 아닙니다. 그들이 처해있는 현실, 실현 가능성과 개개인의 능력에 따라 크게 좌우되기는 하지만, 평신도들 역시 복음화에서 자신들이 담당하기에 적절한 분야를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현대인들은 행복과 가치를 갈망하고 있지만, 어디서 그것들을 찾을 수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복음화 활동에 대한 평신도들의 참여는 점점 더 그 긴요성이 증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제는 평신도들이 이러한 도전을 받아들여 수행하도록 용기를 주고, 또 그들을 도와줄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평신도들은 독서자, 교회법에 따라 승인된 성체 분배자, 또는 성가대 단원과 같이 전례에서 눈에 보이는 중요한 활동들을 하고 있는데, 이러한 활동들은 적절한 교육을 받아야 가능한 것 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 외에도, 모든 평신도들은 복음의 기쁨을 이 세상에 증언하는 임무를 부여받고 있습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3년 7월호, 글 조셉 머피(몬시뇰, 바티칸 국무성, 크로인교구 사제), 역 이재호 스테파노(대구 Se. 국제서기)]

 

 

[레지오 영성] 교회의 선교에 있어서 사제와 평신도 (5)

 

 

이를 위해 평신도들은 아주 광범위한 영역에 걸친 사도직 활동을 수행하게 되는데, 가정과 주일학교에서 신앙에 대해 지도를 하는 것으로 부터 다양한 형태의 자원봉사 활동, 지적이며 예술적인 활동으로부터 생명의 수호, 건강 돌봄으로부터 마약 남용자, 가난한 이들, 그리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한 활동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합니다. 사람들은 각자 여러 가지 특별한 방식으로 복음화에 참여할 수 있는데, 그 중 한 가지가 사람들 사이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복음의 기쁨을 나누는 것입니다. 최근에 많은 젊은이들과 여성들이 보다 창조적인 방법으로 이러한 도전을 수행하고 있는데, 그들의 역할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을 복음화 하는데 있어 젊은이들보다 더 좋은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복음화는 사제이든 평신도이든 관계없이 우리 모두가 각자 책임을 지고 해야 할 활동입니다. 그러나 이 임무를 우리가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 즉 우리가 먼저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부터 우선 실천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선입관, 편견과 자만을 버리고 우리 자신을 진정으로 주님께 바쳐야 합니다. 그분을 믿고, 그분께 우리 자신을 의탁하고, 또 그분을 신뢰하면서 그분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사랑을 바탕으로 우리를 성장시켜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복음화 활동을 할 것인가?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것에 대한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것,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에 응답하는 것이 바로 복음화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느님 당신의 형상 안에서 사랑을 간직한 사람, 기뻐하는 사람이 되어, 그 사랑과 기쁨의 밝은 빛을 주변의 사람들에게 퍼트리는 것입니다.

 

 

환성을 울려라, 시온의 딸아!

 

베네딕토 교황께서는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기뻐하여라!”라는 말과 함께 시작되었다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이 말은 대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오랫동안 기다려온 구세주의 어머니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줄 때 사용했던 인사말(루카 1:28)이었습니다. 헬레니즘 시대에 통상적인 형태의 간단한 인사말로 사용되었던 단어인 “chaire”는 표면적인 의미 외에, 기쁨으로의 초대라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루카 성인은 “chaire”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스바니아와 즈카르야 예언서에서 나오는 시온의 딸에 대한 신탁에서 선포된 구세주와 관련된 기쁨에 대해 의도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시온의 딸은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인물로서,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신비인 계약과 선택의 신비에 대해 고지를 하는 예언과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시온의 딸아 환성을 울려라, 하느님께서 그녀의 원수들을 쫒아내시고, 그녀의 한가운데에 계신다(스바 3:14-15, 즈카 2:10). 시온의 딸아 한껏 기뻐하고, 환성을 울려라. 네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 분은 의로우시며, 승리하시는 분, “겸손하시어 나귀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시는 분”이다(즈카 9:9). 이렇게, 예언서들은 기쁨이 어린 기대를 하도록 용기를 북돋아주고 있습니다. 그녀의 기쁨은 지난동안 그분께서 행하신 구원의 활동, 시련의 한 가운데서 위로를 주시는 모습, 그리고 미래에 대한 약속을 통해 굳건해진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희망은 천사가 마리아에게 전한 말로써 충족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시온의 딸이며,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살기 위해 마리아를 통해 오시도록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간직해온 모든 희망 속에서 염원되었던 진실된 시온이며, 진실된 이스라엘로서, 마리아 안에서 구약과 신약, 이스라엘과 교회가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마리아가 어떤 분인지, 또 마리아라는 존재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마리아에 주목해야 합니다.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머무르고 계시는 장소이며, 바로 우리 교회가 반드시 이룩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마리아는 인류의 기대를 담은 표지입니다.

 

진실된 “시온의 딸”인 마리아는 교회의 표지이며, 구원에 이를 수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표지입니다. 그들은 오로지 사랑의 선물과 은총을 통해서만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 마리아는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진리를 혼란스럽게 하거나 위험에 빠트리지 않고, 오히려 그 진리를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기다림 속에 있는 인간들을 위한 표지입니다. 사람들은 기다림을 포기할 위험에 처해있을 때에 이러한 표지를 더더욱 필요로 합니다. 사람들은 살아가는데 있어 반드시 필요한 것들, 즉 삶에 가치를 부여해 주는 절대적인 사랑이나 구원과 같은 것들을 발견하지 못할 때 불안해하며, 이러한 불안감은 사람들에게 절대 충족될 수 없는 공허함을 가져다줍니다. 이러한 공허감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에 대한 신뢰를 포기하는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있는데, 이때에도 이러한 표지는 더더욱 필요한 것입니다.

 

다수의 구약의 구절들, 그 중에서도 특히 사무엘 상권 2장 1-10절에 있는 한나의 노래로부터 영감을 받은 성모님의 위대한 환희의 송가인 마니피캇은 개개인과 모든 이스라엘을 향안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를 노래하는 것으로, 하느님께서는 만족한 사람들이나 자만한 사람들이 아니라 가난하고 소박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가 정한 저녁기도(성무일도)를 바칠 때, 이 마니피캇을 바치면서, 성모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 역시 하느님께서 그동안 하신 크신 업적과 우리를 위해 해 주신 일들을 찬양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것들을 우리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한다면, 우리도 성모님처럼 우리가 지니고 있는 희망과 기쁨을 모든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전해줄 수 있게 해주는 영감을 얻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3년 8월호, 글 조셉 머피(몬시뇰, 바티칸 국무성, 크로인교구 사제), 역 이재호 스테파노(대구 Se. 국제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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