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월)
(백)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아버지께서 보내실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수도 ㅣ 봉헌생활

봉헌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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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8-18 ㅣ No.537

봉헌생활 (1) 봉헌, 그 아름다운 드림(dream)의 삶



지난 11월 30일부터 돌아오는 주님 봉헌 축일인 2016년 2월 2일까지 우리는 “봉헌생활의 해”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 봉헌생활의 해를 맞이하며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모든 봉헌생활자들에게 겸손하게 그리고 사랑이신 하느님께 대한 커다란 신뢰로써 자신의 허약함을 고백하는 기회가 되고 그 허약함을 주님의 자비로우신 사랑의 체험으로 살아갈 기회가 되기를 바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특별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인류의 빛 Lumen gentium” 중에서 수도자에 대해 다루고 있는 제6장과 수도생활의 쇄신과 적응에 관한 교령인 “완전한 사랑 Perfectae caritatis” 반포 50주년을 기념하여 선포된 “봉헌생활의 해”는 그리스도에 대한 진정한 증거자를 찾고 있는 세상과 교회에 “필요한 것 한 가지”(루카 10,42)를 알아볼 수 있는 표징이 되기 위해 기꺼이 하느님께 자기 자신을 바치기로 약속한 교회의 공적 서원자들의 희년을 선포하는 “수도 생활의 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공언하는 수도 생활은 “성령의 감도 아래 그리스도를 더욱 가까이 따르는 신자들이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의 건설과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새로운 특별한 명의로 헌신하여 하느님 나라에 봉사함으로써 애덕의 완성을 추구하고 교회 안에서 빛나는 표징이 되어 천상적 영광을 예고하려고 최상으로 사랑하는 하느님께 전적으로 봉헌되는 고정된 생활 형식”(교회법 573조 1항)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께로부터 복음적 권고를 실천하도록 불리고 이를 따를 것을 충실히 서약”(수도 교령 1항) 하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함으로써 그리스도와 그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사는 삶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께 대한 열렬한 사랑으로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듯이 자기 자신을 참된 제사가 되도록 하느님께 바치는 삶을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하느님과 거룩한 친교를 이루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의 삶이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축성되고 자기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사람도 하느님을 위해 살고자 세상에 대해 죽는 사람인 한 하나의 제사”(신국론 10,6. 성무일도 연중 28주간 독서의 기도)라고 수도 생활의 본질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아름답고 신비로운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하나가 되고자 하는 열망을 지닌 그리스도인의 보다 더 열심한(교회 헌장 44항 참조) 삶인 봉헌 생활은 매일 미사 중에 듣게 되는 말씀처럼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되어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이 되도록 우리의 삶(vita)이 친교(con)의 거룩한(secrata) 모범이 되기 위해 자신을 드리는 dream을 품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것은, 교황님께서(2014.11.21) 이 “봉헌 생활의 해”를 수도자뿐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받은 은총의 선물을 더 잘 알아차리게 할 수 있는 하나의 은총으로” 살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참된 신앙으로 봉헌의 역사를 새롭게 펼쳐 나가기를 바라신다는 점입니다. 이 세상 곳곳에서 살아있는 복음의 기쁨이 되어 말입니다. [2015년 8월 9일 연중 제19주일 대전주보 3면, 윤진 니꼴라 수녀(거룩한 말씀의 회)]

 

 

봉헌생활 (2) 응답, 세례 성사로 받은 은총의 보다 풍부한 결실



지난주 말미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 “봉헌 생활의 해”가 봉헌 생활자들인 수도자뿐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뜻깊은 은총으로 기억해야 하는 “받은 은총의 선물”을 다 함께 기뻐하며 나누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이 나눔의 장을 펼쳐내며 세상의 수많은 모순된 요구들에 지쳐, 살아가는 입맛마저 떨어져 있는지 모를 누군가를 다시 살맛 나게 하고 기운 차리게 할 사명을 수도자들에게 부여하십니다.

왜냐하면, 세례 성사의 은총이 보다 풍부한 결실을 얻기 위하여 정결, 청빈, 순명의 복음적 권고를 신자 자신이 스스로 받아들여, 지극한 사랑의 열정으로 하느님께 봉헌 되어 신부(新婦)인 교회와 불가분의 관계로 결합되신 그리스도를 더 잘 드러내는 봉헌의 삶을 통하여, 수도자는 성직자와 평신도의 중간 신분이 아니라 교회의 생명과 성화에 속하는 신분으로서 교회 안에서 기묘히 활동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모든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몫으로 불리웠고 기꺼이 이 부르심에 응답했기 때문입니다(교회 헌장 43-45 참조).

그러나 이렇게 멋진 신분과 사명을 부여받은 수도자의 봉헌 생활은 결코 녹녹하지 않습니다. 언뜻 보면 그렇게나 이상적인 삶이니 그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이상을 눈에 보이도록 증거하는, 너무나 막막한 과제를 풀어보겠다고 손들고 나섰으니 당연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만, 더 중요한 건 스스로 내가 엉겁결에 손들고 나선 건 아닌지 불러주신 분의 부르심에 응답한 진실에 대한 의심이 문제가 될 때가 많습니다. 성인들과 신학자들이 고백하듯 신앙이란 하느님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생 동안 견뎌내는 일이기에, 정말 이해하고 싶어 못 견뎌 하면 할수록 더욱 어려워지고 맙니다. 신앙의 신비를 어떻게 다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때문에 교회는 수도생활을 일컬어 “교회의 신비에서 나오는 것이며, 교회가 주님께 받은 선물”(가톨릭교회 교리서 926항)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교회의 신비이며 선물인 수도생활은 다른 모든 삶의 성소와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 주도하신다는 자신의 삶에 대한 신뢰와 함께 예수님께서 자신을 뽑아 세우셨다는(요한 15,16 참조) 확신에 찬 응답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수도자에게 있어 이 응답의 구체적인 모습은, 교회와 세상의 선익을 위하여 하느님께 받은 은총에 따라 서로 다른 선물(카리스마)을 받은 다양한 형태의 수도회를 통하여 “교회의 생활에 참여하며 성서, 전례, 교의, 사목, 그리스도 교회의 일치, 선교 및 사회문제 등 제 분야에 있어서의 교회의 활동과 의도를 각 회의 고유한 성격을 따라 자기 것으로 하여 힘써”(수도 교령 2항) 살아감으로써 드러나게 됩니다. 다음에는 봉헌 생활의 역사와 형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2015년 8월 16일 연중 제20주일 대전주보 3면, 윤진 니꼴라 수녀(거룩한 말씀의 회)]

 

 

봉헌생활 (3) 따름, 더 자유롭게 더 가까이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교회에는 초기부터 복음적 권고의 실천으로 말미암아 더 자유롭게 그리스도를 따르고, 더 가까이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하여 각각 자기에게 적합한 방법으로 하느님께 봉헌된 생활을 한 남녀들이 있었다.”(수도 교령 1항) 이렇게 교회 역사의 초기부터 이미 열심한 신자들의 자발적인 희생을 통한 복음적 권고를 살고자 하는 삶의 형태는 있어 왔습니다. 특히 가난과 공동 생활에 있어서는,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씩 나누어 받으며, 사도들의 지도를 받는(사도 2,44; 4,35 참조) 신자 공동체와 예언의 능력을 지니고 동정을 서약한 처녀들도 있었습니다.(사도 21,9) 이러한 봉헌의 형태는 3세기에 접어들면서 교회 안에서 공적으로 천국을 위한 동정을 약속하는 관례가 생겨나면서 자연스럽게 교회 앞에서 서약을 하는 한 형태가 되어 왔습니다. 이는 점차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 살고자 하는 열망에서 비롯된 신앙 고백의 적극적인 모습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끊이지 않았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에 대한 최상의 신앙 고백은 순교의 화관을 받는 것이었는데,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13년 신앙의 자유를 선포함으로써 박해시대가 지나가고 평온한 시대가 오자, 세상이 주는 평화에 젖어드는 느슨한 신앙 생활도 더불어 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세속적 평화의 상태에서 벗어나 하느님만을 섬기고 주님의 평화 안에 깊이 머물기 원했던 신앙인들이 세속을 떠나 광야에서 살며, 천상의 일을 위해 세상일로부터 자신을 떼어놓고자 열망하는 삶의 형태가 새롭게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6세기까지를 수도 생활의 역사가 태동되는 사막 교부들의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4세기 초 안토니오 성인(251-356)은 수도 생활의 근본이 되는 분명한 동기를 가지고 현재 우리가 일컫는 수도 생활의 역사를 열게 됩니다. 안토니오 성인은, 어느 날 미사 중에 듣게 된 마태오 복음 19장 21절에 나오는 부자 청년의 비유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주님께서 자신에게 직접 하신 부르심의 말씀으로 알아듣습니다. 그리고 자기 삶을 완전히 바꾸는 “복음적 회개”를 통해 자기에게 주어진 말씀을 굳게 믿고 따르게 됩니다. 또한 그의 복음적 회개는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교회와 세상의 복음화를 위한 끊임없는 기도와 보속을 바치는 지향과 함께 사막으로 찾아오는 이들에게 영적 도움을 줌으로써 은수자들의 삶의 형태에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됩니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영적 도움과 필요 외에는 공동체가 함께 살아가는 공수(共修)의 생활 형태는 아니었습니다. 이제, 보다 더 적극적인 신앙 고백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노력의 한 형태로서의 수도 생활의 역사는 점차적으로 공동체적인 회(會) 수도 생활로 발전해 가기 시작합니다. [2015년 8월 23일 연중 제21주일 대전주보 3면, 윤진 니꼴라 수녀(거룩한 말씀의 회)]

 

 

봉헌생활 (4) 수도 공동체, 주님의 이름 아래 집합된 참된 가족



“어느 시대에나 하느님 아버지의 부르심과 성령의 이끄심에 순종하며 갈라지지 않은 마음으로 자신을 그리스도께 봉헌하려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 특별한 길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어 왔습니다.”(봉헌 1) 이 길을 걷는다는 것은, 순수한 복음 정신인 자기 포기와 그리스도를 보다 더 가까이 따르고자 하는 열망으로 하느님만을 찾기 위해 속세를 떠나는 “포기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하여 세상의 평화를 등진 사막의 은수자들이 3세기부터 있어 왔고, 이는 점차 초기 교회를 모범으로 하여 한마음 한뜻으로 주님의 이름 아래 참된 가족을 이루는 공동체적인 형태로 발전하게 됩니다.(수도 15 참조)

수도 공동체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공수(共修) 생활은 은수자였던 성 빠꼬미오(290-346)가 자신에게 찾아오는 이들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읽고 혼자 사는 사람들이란 뜻의 “수도승(monachus)”이라는 표현대신 “형제”라는 표현을 주로 쓰며, 수도 생활의 역사에 있어서 첫 번째 회칙이라 할 수 있는 공동체의 규칙이 작성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형태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영적 지도가 이루어지던 은수 생활이 형제적 상호관계로 발전한 것으로, 이 두 가지의 형태는 450년 경에 접어들면서 장상과 수하 그리고 상호적 친교 관계가 조화를 이루는 공동체 생활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러한 수도 생활의 형태는 성 아우구스티노와 성 베네딕도에 이르러 사도 행전에 나오는 그리스도인들의 이상인 하느님 안에서의 완전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쓰여진 규칙(회칙)들이 발전되면서 현대 수도 생활의 기틀을 잡게 됩니다.

그러나 수도 생활의 형태에 있어서 다양한 역사적 변천이나 발전 과정보다 중요하게 기억할 것은, 이러한 모든 형태의 수도 생활의 기원과 동기로, 순수한 복음정신으로 자기 포기와 그리스도를 따름을 자신들의 삶으로 선택하고 살기 시작하였다는 점입니다. 이 정신으로 수도 생활은 교회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신앙 쇄신의 원동력이 되고, 복음 선교를 위한 교회의 부르심에 충실하려 부단히 노력하며 주님께서 주신 복음 선포의 사명에 자신의 삶을 기꺼이 봉헌하여 왔습니다. 이러한 노력이 수도 생활 역사에 있어서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되었던 것입니다. 지난주에 본 것처럼 313년 이후, 신앙의 자유를 얻어 세속 권력과 얽히게 되었을 때는 세상을 떠나 하느님만을 찾았고, 개별적 신앙의 열성으로 치우칠 때는 공동체 생활로써 그리스도교 본연의 모습을 증거했으며, 귀족 중심의 중세시대에는 가난의 실천과 설교를 통해(성 프란치스코와 도미니코)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께로 시선을 돌리는 경종이 되어 왔습니다. 이 밖에도 성령께서는 수많은 수도회 창립자들을 통해 그 시대에 필요한 복음적 쇄신의 카리스마(은사)를 주심으로써 교회와 세상에 신앙의 증거가 끊이지 않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또한 수도 공동체가 하느님 아버지 안에 모두가 한가족, 형제 자매임을 상기시키는 예표가 되고, 하늘 나라의 기쁨을 살아가는 표징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2015년 8월 30일 연중 제22주일 대전주보 3면, 윤진 니꼴라 수녀(거룩한 말씀의 회)]

 

 

봉헌생활 (5) 카리스마, 성령께서 주시는 다양한 선물



“봉헌 생활은 복음에 뿌리를 박고 교회 생활이 모든 계절에 풍성한 열매를 맺는 수없이 많은 가지를 지닌 나무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봉헌 5)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는 더욱이나 새롭고 쇄신된 형태의 봉헌 생활이 교회의 영성과 사도적 열정에 큰 힘이 되어왔습니다. 이러한 다양성은 주님이신 예수님의 신비체를 이루며, 교회의 선교 사명에 자신들이 받은 선물로써 크게 공헌하면서(수도 8 참조), 하나인 그리스도 신비의 여러 면모들을 드러내는 성령의 거룩한 도구가 됩니다.

평신도의 특별한 사명이 세속에서 복음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이라면, 성품을 받은 신부님들, 특히 주교님들은 말씀을 가르치고 성사들을 집행하며 성스러운 권한을 통해 교회의 친교에 봉사함으로써 하느님의 백성을 인도할 임무를 갖습니다. 반면, 봉헌된 사람들은 복음 권고의 서약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권고하셨던 생활 방식에 따라 생활함으로써 하늘 나라의 예언적 존재가 되라는 소명을 지니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존재적 차원은 현대에 있어 종종 “왜 이러한 생활을 해야 하는가? 봉헌 생활은 더 큰 선익을 위하여, 인류와 교회를 위하여 더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인력의 낭비가 아닌가?”(봉헌 104)하는 질문을 받게 됩니다. 교회는 이에 대하여 분명한 어조로 같은 문헌에서 “모든 실용주의적 사고를 초월하는 가없는 헌신의 표징이며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봉헌으로 주님과 그분의 신비체에 헌신하는” 삶에 대해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 향유를 남김없이 쏟아부은 여인의 행위에 비유하며, “사람들의 눈에 낭비로 보일 수 있는 것이 주님의 아름다움과 좋으심에 마음 깊이 사로잡힌 이들에게는” 더없는 사랑의 표현이라고 공언해 줍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표현은 봉헌 생활자인 수도자에게 있어 자신이 속한 수도 공동체의 창립자가 성령께 받은 은총의 선물인 카리스마 안에서 피어나 하나의 꽃밭(수도회 congregazione의 어원은 같은 밭을 일군다는 뜻)을 이루게 됩니다. 이 꽃밭은 그 특성에 따라 크게는 산 위에서 기도하시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관상-봉쇄 수도회”와 하느님 백성에게 여러 가지 형태의 사도적 봉사를 하는 “활동 수도회”로 나뉩니다. 또한 세상에서 하느님께 봉헌된 삶을 추구하는 “재속회”와 특수한 사도직과 선교 목적을 지닌 “사도 생활단”들도 봉헌의 꽃밭에서 저마다의 모습과 향기를 가지고 카리스마를 꽃피웁니다.(봉헌 8-11 참조) 이 모두는 봉헌 생활 안에서 “수많은 카리스마들을 통하여 복음적 권고의 풍요로운 실천을 모든 시대에 보여 주며, 이러한 활동으로 그리스도의 신비를 시간과 공간, 교회와 세계 안에 항구히 현존케 하는 성령의 끊임없는 활동”(봉헌 5)입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봉헌 생활을 “완전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그 모든 활동이 성령께서 교회와 세상 성화를 위해 주신 하느님으로부터 와서 하느님께로 향하는 사랑의 증거라는 봉헌된 삶의 의미를 기억시킵니다. [2015년 9월 6일 연중 제23주일 대전주보 3면, 윤진 니꼴라 수녀(거룩한 말씀의 회)]

 

 

봉헌생활 (6 · 끝) 복음, 순교자가 될 만큼 넘치는 기쁨



하느님의 뜻으로 자신을 온전히 채우기 위한 자기 비움의 시작인 하느님께 응답의 삶을 시작한 사람은 사랑에 빠진 사람 특유의 바쳐짐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그를 기쁘게 할까(1코린 7,32 참조) 하는 행복한 고민을 하며, ‘죽어도 좋다!’고 할 만큼 제 목숨조차 아깝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사랑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사랑의 근원이시며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을 알고자 부단히 노력하지만 우리의 “앎”에는 언제나 한계가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삶”일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시간을 정성껏 살아가며 사랑을 배우고자 열려 있는 마음으로 날마다 또 매 순간 우리 자신으로서는 미처 알지도 알 수도 없는 사랑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 참 멋진 인생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느님을 말씀과 성사 안에서 고백하며, 주님을 뵈올 때까지 믿고 따라가는 여정이 우리의 거룩한 부르심, 삶의 성소입니다.

그 중에서 사제와 수도자는 주님을 더욱 가까이 따르는 교회의 공적 부르심에 응답한 삶입니다. 이 성소의 증거는 교회 역사 안에서 한 번도 끊어진 적이 없습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러니 매 순간 ‘내가 안다’고 하는 선택들이 진정한 앎, 주님의 진리로 채워지도록 주님만 바라고 살아갈 용기를 잃지 않도록 부단히 서로를 도와주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서로를 믿어주는 대단히 용기 있는 순교자적인 결단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지순한 기다림과 인내가 아니고서는 ‘내 뜻’에 맞지 않는 ‘너’를 견딜 재간이 우리에게는 없기에 주님을 따르는 열정으로 매 순간 사랑이신 하느님을 선택해야 합니다.

세례성사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주님의 복음, 그 참된 기쁨을 살기로 작정한 사람은 그만큼이나 결연한 의지로 따라나서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와 세상의 성화와 생명에 속하는 신분으로 “예, 주님께서 저를 불러주셨습니다!” 하고 따라나선 봉헌된 사람들은 더욱이나 그러합니다. 날마다 조금씩 사랑이신 하느님으로 채워져 가는 열망으로 자신의 몸과 소유욕 그리고 의지까지 비워 내려 정결, 청빈, 순명의 서원을 지켜나가는 쉼 없는 노력으로 말입니다. “세상에 대해 순교”한다는 각오가 아니고서는 도무지 주님의 참된 기쁨(복음)을 증거할 수 없는 풍요롭기 그지없는 이 세상에는 신앙에 대한 앎을 삶으로 증거하는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들이 절실합니다. 십자가 아래 묵묵히 당신 자신의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참아 받으시며, 세상 안에, 인류 역사 안에, 우리의 일상생활 안에 깃든 하느님의 신비를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시는 성모님께 의탁하고 교회의 복음화 활동에는 마리아 방식 외에는 없다는 온유한 사랑의 혁명만을(복음의 기쁨 288 참조) 꿈꾸는 그리스도인의 살아있는 증거 말입니다. 자랑스러운 순교자의 후손들인 우리를 순교 선조들께서도 자랑스러워하시도록 이 세상을 복음으로 깨우고 기쁨으로 살맛 나게 만드는 참된 봉헌 생활자가 많아지기를 기도합니다. [2015년 9월 13일 연중 제24주일 대전주보 3면, 윤진 니꼴라 수녀(거룩한 말씀의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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