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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내 삶을 흔든 작품: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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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10-21 ㅣ No.127

[내 삶을 흔든 작품]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


- 뭉크는 4편의 ‘절규’를 연작으로 그렸다. 이 작품은 1893년도에 그린 ‘절규’다. 91×73.5㎝ 마분지에 유화, 템페라, 파스.


‘내 삶을 흔든 작품’이란 원고를 청탁받았을 때, 조금은 흥분했나 보다. 라디오 PD로서 프로그램을 만들려면 상상력이 샘솟아야 하기에, 꽤나 많이 이것저것 들여다보며 쏘다녔기 때문이다. 영감을 얻으려고 책, 영화, 미술, 연극, 음악 등 창조적인 작품을 닥치는 대로 이해하려고 덤벼들기도 했다. 그런 나였으니 하고 싶은 말이 오죽이나 많을까 싶어서 금방 승낙해 버렸다.

하지만 단 몇 분 되돌아보면서 이내 깨달았다. 내 삶을 뒤흔들 만큼 좋아한 것이 내게 있기나 한 걸까? 딱히 짚히는 것이 없었다. 아이디어를 내는 것을 업으로 살아온 나다. 단 몇 분이면 튀어나올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그 수많은 작품들은 내 기억 저 아래에서 맴돌고 있을 뿐 솟구쳐 오르지 않는다. 그 많은 것들이 순간순간 나를 흔들고 지나간 것뿐이었구나. 갑자기 초조해졌다.

방법을 찾으려고 경향잡지에 실린 지난 호의 글들을 살펴보았다. 오랜 세월 자신의 일에 영향을 준 그런 책들, 자신의 인생을 일관되게 흥분시킨 그런 작품들을 소개한 글들을 읽으면서 나의 지난 세월을 되짚어보았다. 왜 나는 그분들처럼 뭔가에 열정적으로 매달리지 못했을까? 들떴다가는 식어버리고 다시 들떴다가는 식어버리며 살아온 건 아닌가? 눈앞에 보이는 것만 급급하게 따라다니며 바쁘게 산 건 아닐까?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이젠 희미해져 버린 지난 일이다. 청소년 시절 눈앞의 현실은 내 이상과 너무 달랐다. 가난, 질병 그리고 암담한 미래의 공포가 나를 가두어버렸다. 다행히 내겐 불행을 견딜 만큼 힘이 되어준 어머니의 헌신적인 사랑이 있었다. 그 사랑을 붙들고 어두운 시절을 견뎌냈다.


아픈 기억의 편린을 그림으로 맞부딪치다

나는 좀처럼 울지 않는다. 큰 소리 내며 운 기억이 거의 없다. 누가 볼까봐 독하게 참아냈다. 아니 소리 없이 울었을 게다. 그런 내가 삼십여 년 전인가 딱 한 번 견뎌내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엉엉 소리 내며 울었다. 그것도 술에 취해, 술기운으로 그리 슬피 울었다.

그 아픈 기억의 편린을 그림으로 맞부딪치게 되었다.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The Scream)’다. 나는 미술을 좋아하지만 전문가는 아니다. 그저 내 방식대로 해석하고 본능적으로 느낄 뿐이다. 이 그림은 핏빛 노을을 배경으로, 한 사람이 다리 위에서 비명을 지르듯 절규하는 모습이다.

그 소리는 너무나 커서 하늘을 뒤흔들고 검푸른 파도를 몰아치게 한다. 유령처럼 형체도 흐릿한 얼굴이 일그러지도록 내지르는 소리다. 온몸이 뒤틀리며 외치는 비명이다. 견딜 수 없는 아픔이 화산 불기둥처럼 터지면서 퍼지는 소리다. 그 소리 너머 저편 바다에는 두 척의 배가 정적 속에 한가롭게 떠있다. 누군가는 저렇게 절규를 하는데 절규하는 그 사람 뒤로는 행인 두 사람이 무심히 지나가고 있다.

뭉크가 그린 많은 작품 중에서 이만큼 청각적인 작품은 드물다. 라디오 프로그램을 한 30년 만들다 보니, 청각적인 표현에 집착하게 되었다. 글을 읽거나 그림을 볼 때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청각적인 상상을 하는 버릇이 내겐 있다. 백지를 보면서 소리를 느끼려고까지 한다. 그런 내게 뭉크의 ‘절규’는 선명한 이미지가 되어 머리에 박혀버렸다.

뭉크는 어린 시절에 겪은 불안과 질병이 인생의 방향타가 되었다고 술회했다. 어두운 기억들이 되살아나 그리 아프게 그렸는지도 모르겠다. 뭉크가 쓴 글이다.

“친구들과 산책을 나갔다. 해가 지기 시작했고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나는 피로를 느껴 멈춰 서서 난간에 기대었다. 핏빛의 붉은 혓바닥이 검푸른 협만과 도시를 뒤덮고 있었다. 친구들은 계속 걸었지만 나는 두려움에 떨며 서있었다. 그때 난 자연을 관통하는 끝없는 절규를 들었다(「에드바르드 뭉크」, 울리히 비쇼프 지음, 반이정 옮김, 마로니에 북스, 53쪽).

하늘과 바다를 뒤덮은 이 울부짖음은 누구의 절규일까? 그것은 단지 작가 자신의 가슴속 저 깊은 곳에서 걷잡을 수 없이 솟아오르는 비명일 수도 있다. 누군가의 절규를 듣고 그 아픔을 함께하며 내지르는 아픔의 울림일 수도 있다.

이 세상 어느 곳에선가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아픔으로 절규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의 귀에는 이 숨넘어가는 절규가 제대로 들리지 않을게다. 아니 애써 듣지 않을 것이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다. 뭉크의 ‘절규’는 이 점에서 뛰어난 상상을 보여준다. 절규란 결국 자신의 공간에서만 울리는 외로운 비명이다. 고통스러운 정적이다.


절규를 보면서 절규하다

뭉크의 그림을 떠올린 건 얼마전 잇달아 벌어진 사건 때문이기도 하다. 의정부에서, 수원에서, 여의도에서 흉기를 휘둘러 여러 사람이 다친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다. 묻지마 칼부림은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아물 수 없는 상처를 냈다. 내 가족, 내 주변 사람들 그리고 숱한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든 흉악범죄다.

하지만 그런 잘못을 저지른 범인들의 웅크린 모습 또한 보는 이의 가슴을 무겁게 한다. 신용카드도 없고 돈도 없고 전화도 없고 집도 없는 외톨이, 문자 한 통으로 인사를 나눌 친구 한 사람 없는 외로운 사람, 자신을 돌보는 유일한 사람인 어머니에게까지 주먹질하는 못난 사람이다. 그들 역시 침묵의 절규를 하진 않았을까? 우리 사회가 얼마만큼이나 그 소리를 들으려 했을까?

그림은 아름다움을 통하여 행복하게도 해주지만 추함을 드러내어 삶을 성찰하게도 한다. 그래서 추한 인물, 짓이겨진 얼굴과 뒤틀린 몸뚱이를 그린 그림들을 들여다보면서 삶을 다른 각도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래서 뭉크, 수틴과 같은 표현주의 화가들의 그림에 사로잡히곤 했다. 슬픈 이야기를 통해서 슬픔을 정화하듯 나로서는 절규를 보면서 절규를 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이들이 가슴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고 있을게다. 다만 들리지 않을 뿐이다. 그 아픈 절규를 하는 그분들에게 보여드리고 싶다. 뭉크의 외로운 절규를.

* 김승월 프란치스코 - MBC 라디오본부 국장. PD로서 30여 년 동안 라디오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방송사를 비롯한 커뮤니케이션 업계에 종사하는 가톨릭 교우들의 모임인 ‘시그니스 서울’ 회장이다. 저서로 「라디오 레시피 23」, 「라디오 다큐멘터리」가 있다.

[경향잡지, 2012년 10월호, 김승월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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