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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건축가 알빈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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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9-05 ㅣ No.951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건축가 알빈 신부 (상)


우리나라 상황 맞는 실용적이고 아름다운 성당 설계

 

 

- 알빈 슈미트 신부(1904~1978).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안으로는 수도승, 밖으로는 선교사’로 살아왔던 수도회의 크고 작은 봉사 중에서 건축?예술 선교 활동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주역은 독일 태생의 알빈 신부님이었습니다. 알빈 신부님은 전례, 건축, 미술, 신학에 조예가 깊었을 뿐만 아니라 겸손하고 인간미 넘치는 인품으로 수도원 식구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일찍이 북간도 연길교구에 파견되어 사목활동을 하였고, 공산 정권에 의해 감옥 생활도 하였으며, 독일로 추방된 후 스스로 건축가로 변신했습니다. 왜관 수도원에 다시 돌아와 건축설계와 미술작업을 했는데, 20년 동안 무려 185개에 달하는 가톨릭 건물을 설계했다 합니다.”(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이형우 시몬 베드로 아빠스 신부, 「건축가 알빈 신부」(2007) 추천사에서)

 

알빈 슈미트 신부(Alwin Schmid, 1904∼1978)는 1904년 독일 남부 슈바벤(Schwaben) 지방 슈파이힝엔(Spaichingen)에서 태어났다. 라벤부르크(Ravenburg)와 뷔르츠부르크(Wurzburg)에서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1927년에 뮌헨대학에 입학해 미술사를 전공했다. 또 베를린 프리드 빌헬름(Friedr Wilhelm)대학과 빈(Wien)대학에서 조형미술을 공부했다. 

 

대학을 졸업한 직후인 1931년 5월 성 오틸리엔 베네딕도 연합회(Congregatio Ottiliensis Ordinis Sancti Benediciti) 소속의 독일 뮌스터슈바르작(Munsterschwarzach) 수도원에 입회했으며 이듬해인 1932년 첫 서원을 했다. 당시 그는 니체의 니힐리즘(nihilism)에 심취해 수도원을 떠나는 등 가톨릭에 대한 회의와 비판으로 방황하기도 했고, 1933년부터 1937년까지 뷔르츠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도 공부했다. 1936년 3월 1일 사제품을 받았으며, 서품된 지 1년 후 한국 선교사로 임명됐다.

 

1937년 5월 6일, 알빈 신부는 한국인들이 많이 이주해 살았던 만주 북간도의 연길(延吉)교구에 파견됐다. 알빈 신부는 간도에 도착하자마자 연길 임시성당의 장식을 담당했고, 용정 하시성당의 내부 수리를 맡았다. 

 

1년 동안(1938~1939)은 용정 상시본당의 주임으로 사목하다 1939년에 용정 하시본당 보좌로 임명됐다. 그러나 원래 언어에 소질이 없었던 그는 어려운 한국어를 잘 하지 못해 일반 사목 분야에서는 큰 성과를 남기지 못했다. 하지만 1940~1945년 사이에 돈화성당, 명월구성당, 연길성당 등을 설계했다. 

 

그중 돈화성당(1942)은 근대적인 개념의 성당 건물로 제대를 벽에서 옮겨 독립시키고 감실은 제대 뒤쪽의 반원형 벽감에 붙박아 놓았다. 사제가 신자들을 향해서 미사를 드릴 수도 있고 예전처럼 신자를 등지고 드릴 수도 있게 한 것이다. 

 

- 공산군에 체포된 알빈 신부는 1948년 남평수용소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겼다.

 

 

다시 1943년 9월부터 용정 상시본당 주임으로 사목하던 알빈 신부는 광복 이듬해인 1946년 5월 20일에는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공산군에 체포돼 남평(南平)과 하얼빈 감옥에 투옥되기도 했다. 그러다 1949년에는 결국 독일로 추방됐다. 그는 감옥에서 수감생활 중의 장면을 연필 스케치로 남기기도 했다.

 

연길 교구장 브레허 주교는 벨기에와 독일에서 시작된 전례운동을 지지했는데, 신자들이 전례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능동적으로 미사에 참례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미사경본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작업도 추진했다. 특히 1932년에는 ‘신자들을 향한 미사’를 도입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에서 공식화되고 보편화된 이른바 ‘신자들을 향한 대면식 미사’는 당시로는 매우 혁신적인 것이었고, 알빈 신부는 이에 큰 감명을 받았다. 

 

1949년 독일로 추방된 알빈 신부는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에 있는 중학교 미술교사로서 미술과 제도를 강의하면서 벽화제작 등에 참여했다. 그러나 교회 건축 설계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그의 건축개념이 당시로서는 너무 혁신적이어서, 바로크 양식을 옹호하던 당시 독일 수도원 책임자들에겐 쉽게 받아들여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 알빈 신부가 1959년 설계한 점촌성당. 한국상황에 맞췄다는 평가를 받는다.

 

 

1961년 한국에 다시 돌아오기 전 이 12년 동안이 그에게 있어서는 교회건축가로 변신하는 준비 기간이 됐다. 당시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파괴된 교회를 재건하기 위해 건축 사업을 활발히 펼쳤으며, 전례운동과 근대건축운동의 선두에 섰던 독일에선 전통적인 양식의 교회건축에서 벗어난 새로운 개념의 다양한 교회건축이 루터파 교회와 가톨릭 성당을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다. 

 

특히 알빈 신부는 가톨릭전례와 도상학(圖像學, Iconography)을 연구하고 설계에 적용했던 루돌프 슈바르츠(Rudolf Schwarz, 1897~1961)와 그의 작품에 깊이 심취했다. 

 

알빈 신부는 이미 간도에서의 사목시절, 당시로서는 교회에서 공인되지 않았던 대면식 미사를 드리기도 하는 등 전례운동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고, 이에 관한 실천적인 작업으로 교회건축의 배열과 새로운 도상학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장차 아프리카 선교를 희망했었는데 담 신부(F. Damm, 卓世塋, 1900~1964)의 요청으로 1958년 김천 평화성당을 설계하게 됐고, 이듬해에는 렌하르트 신부(A. Lenhard, 盧)의 의뢰로 문경 점촌동성당을 설계했는데, 한국적 상황에 맞춘 실용적 설계라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 1960년에는 지베르츠 신부(E. Siebertz, 지)의 요청으로 가은성당(1961.4~1961.11)을 설계하고, 부산 분도병원 성당도 설계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1961년 12월 15일 한국에 재입국해 왜관 수도원에서 본격적으로 건축설계와 미술작업을 하게 된다.

 

* 김정신 교수(단국대 건축학과 교수) - 서울대 건축학과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현재 단국대 건축학과 교수로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문화재청이 위촉하는 문화재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가톨릭신문, 2016년 9월 4일, 김정신 교수(단국대 건축학과 교수)]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건축가 알빈 신부 (중)

 

우리 지형에 맞춰 설계… 주변과 어울리는 성당 지어

 

 

- 설계도를 그리는 알빈 신부.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알빈 신부의 건축철학은 간도 파견시절(1937~1949) 연길의 선교사들과 논의하고 실행한 전례쇄신운동 속에서 태동했다. 또 독일 귀환 후 1950년대 독일, 특히 그가 속한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과 뷔르츠부르크 교구의 급격한 변화 안에서 길어 올린 경험을 통해 더욱 성장했다.

 

알빈 신부는 수도원에 마련된 설계실에서 트레싱지에 직접 연필을 활용해 도면을 그렸으며, 인허가는 현지의 설계사무소를 통해 진행했다. 대개 한 건물 당 10~15장의 도면이 남아 있는데, 그의 도면에는 시공이 가능하도록 기록한 자세한 치수(㎜단위)와 가구, 성물들의 스케치, 그리고 제작방법을 설명하는 스케치들이 들어 있다. 알빈 신부와 협력했던 수사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의 도면을 받으면 별도의 추가 도면 없이 공사가 가능하였다고 한다.

 

특히 알빈 신부가 동시에 다양한 형태의 여러 작품을 쉽게 설계할 수 있었던 것은 몇 개의 유형을 대지조건에 맞도록 응용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비록 전문적인 건축 교육은 받지 않았지만 참조할 수 있는 선례들이 당시 독일에 많았고, 전례에 대한 이해와 현대성당 건축에 대한 확고한 이념을 가졌기 때문에, 이를 설계 원칙의 지침으로 활용했다. 그의 평면을 분석해 보면 루돌프 슈바르츠(Rudolf Schwarz, 1897~1961)와 도미니쿠스 뵘(Dominikus Boehm, 1880~1955)의 건축 아이디어를 읽을 수 있다.

 

알빈 신부의 교회건축은 다음과 같이 5개의 유형으로 분류된다.

 

먼저 ‘장방형’은 움직임과 행진, 순례, 공동체를 암시하는 것으로, 축을 가진 바실리카식 형태를 보인다. 김천 평화성당(1958), 가은성당(1961), 밀양성당(1963) 등 초기에 설계한 성당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두 번째로 변형 장방형을 꼽을 수 있다. 이 형태는 장방형의 끝이 포물선의 열린 형태로 곡선화 되었는데 고통의 형태인 동시에 종말을 생각해낸 존재의 형태요, 종말로 인도하는 신성한 길의 형태를 암시한다. 초장동성당(1962), 구포성당(1964), 원평동성당(1964) 등에서 볼 수 있다.

 

세 번째 정방형 즉 십자형은, 정방형을 원형으로 두고 대각선 방향으로 축을 변환시키거나 십자가 형태로 분할해 구심적인 배치를 하는 형태다. 상주 남성동성당(1963), 제천 의림동성당(1964) 등에 정방형이 나타난다.

 

네 번째로 부채꼴(타원형)을 빼놓을 수 없다. 이는 정방형을 원형으로 두고, 대각선 방향으로 축을 변환시킨 정방형에서 일부를 삭제해 집중적인 부채꼴 형태를 이루거나 두 개의 원을 합친 타원형에 몇 개의 보조공간을 부가시켜 공간의 긴장감과 유동성을 준다. 함창성당(1965), 왜관성당(1966), 전주 다가동성당(1966), 보은성당(1966) 등 1960년대 알빈 신부가 건축에서 가장 즐겨 사용한 평면유형이다.

 

마지막으로 방사형은 ㄱ자형, 또는 ㅅ자형 평면 형태로 제단을 가운데 두고 2~3개의 공간이 분리되어 평일에 다양한 사회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형태였다. 박해시대 한국교회에 익숙했던 남녀석 분리 형태에서 뿌리를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시골의 작은 교회에 많이 적용된다. 김천 지례성당(1968), 인천 산곡동성당(1968), 고창성당(1968) 등에서 볼 수 있다.

 

- 알빈 신부가 1958년에 설계한 김천 평화성당.

 

 

그러나 알빈 신부는 대지와 한국적 상황에 어떻게 대응할까 고민을 많이 했다. 그 결과, 알빈 신부의 설계는 땅을 변경시키지 않고(토목공사를 최소화하였음) 주변 대지와 잘 조화된다는 평가를 받는다. 왜관 수도원 성당의 경우는 수많은 대안을 스케치해 발전시켰다.

 

한국 성당건축의 근대화와 토착화에 기여한 그는 75세 때인 1978년 11월 17일 왜관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심장마비로 선종, 그의 유해는 수도원 묘지에 안장됐다. 세상을 떠난 그 한 해 동안에도 7개의 성당을 설계하였을 정도로 알빈 신부는 ‘하느님의 집’을 만드는데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가 설계한 작품은 1958년부터 1978년까지 20년 동안 122개소의 성당(경당, 공소포함)을 포함하여 무려 185개소에 달한다. 본국으로 휴가 갔던 1969년과 1975년, 병으로 수술을 했던 1970년을 제외하면 한해 평균 10건이 넘는 가톨릭 건물을 설계한 셈이다. 특히 알빈 신부는 60대 나이인 1963~1968년에 가장 왕성한 작업을 펼쳤고, 이때 다양한 형태의 독창적인 성당 건물을 설계했다. 1970년대는 왜관 수도원 성당(1975)을 제외하고는 새로운 것 보다는 기존 유형들을 응용하거나 변형한 설계가 대부분이었다. 또한 각 건축의 현장기사로서는 안셀모(Br. Anselm Schuty, 1940~) 수사와 아돌프(Br. Adolf Stumpf, 1937~2004) 수사 등 두 사람의 독일인 수사와 한국인 이 니콜라오(이귀단, 1942~) 수사가 그를 도왔고, 시공은 수도원 공사 책임자인 최 요셉이 주로 했었다.

 

알빈 신부는 수학, 미술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고, 내외부 투시도를 스케치하는 역량도 뛰어났다. 반면 어학에는 소질이 없어, 29년간 한국에서 생활하면서도 한국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다 한다. 그는 매우 겸손하고 인간미가 넘쳤으며, 어린이를 좋아했고, 자기 자신에 대한 자랑이 될 만한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작품에 대해서도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매우 예민하고 급한 성격이면서도 여러 가지 부탁을 다 들어주고 합리적인 태도를 갖추고 있어 수도원 식구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가톨릭신문, 2016년 9월 11일, 김정신 교수(단국대 건축학과 교수)]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건축가 알빈 신부 (하)

 

성당 공간이 지역사회에 기여해야 한다는 철학 지녀

 

 

알빈 신부는 건축적 · 신학적 · 사회학적 그리고 사제적 심사숙고에서 출발해 모든 건물을 계획했다. 이러한 면모들은 내부로부터 외부로 성장해나갔다. 그에게는 정면외관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부공간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알빈 신부의 교회건축 개념

 

- 한복을 입고 장기 두는 모습을 구경하는 알빈 신부(가운데).

 

 

알빈 신부의 교회건축은 복음을 전파하면서도, 건물 자체는 뒤로 물러나는 자세로 일관돼 있다. 건축가의 독창성을 표현하는 대신, 실제 필요에 따라 적합한 외적 형태를 추구하는 것이다. 세상으로 활짝 열린 교회, 그리고 일방적인 신격화를 거부하는 속에서도 그는 인간의 두 가지 측면을 교차시키는(만나게 하는) 길을 발견했다.

 

“교회에서는 거룩함과 세속적인 것, 영원함과 무상함이 함께 만난다. 교회 안에서 완성되는 현현사건, 신성함과 영속성 안에서의 하느님 현존으로 인하여 교회는 본질적으로 그 밖의 다른 건축과는 다르다. 성당 축성식에서 교회건물은 하느님의 집이 되도록 하느님께 바쳐진다. 그러나 교회는 미사예식을 위한 장려한 예배공간일 뿐만 아니라 또한 하느님 면전에서 갖게 되는 기쁨, 슬픔, 곤란과 고통의 인간적인 모든 관심사를 위한 고향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건축은 다양한 요구에 대응할 수 있어야 하며, 그 전체구성에서나 개개의 공간 영역에서나 혹은 도구에 있어서도 일방적으로 한 측면만 강조되거나 지나치게 과장하여서는 안 된다. 교회건축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완전한 그리스도교의 진리에 기여하는 것이다.”(Alwin Schmid, “Theologische Grundlagen des Katholischen Kirchenbaus”, 1964, p.6)

 

 

교회건축의 신학적 원칙

 

스스로 거룩한 형태는 없다. 다만 교회가 전체로서 또 부분 부분으로서 거룩하게 정렬될 때, 즉 구조나 형태가 의미와 분위기에 의해 그 안에서 일어나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게 할 때 거룩해지는 것이다. 모든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살아 있는 공동체에 의해서 그 의미를 얻게 되는 것이지 성당 자체로서 얻게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교회는 초기에 예배 장소를 ‘Temple(寺院)’이라 부르지 않고 ‘Domus Ecclesiae’라고 불렀다. 이는 회합 장소를 의미한다. 즉 교회는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계명에 따라 성찬전례에 모이는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미사 예식은 그 양식이 분명하게 서로 분리되는 두 가지 예식으로 이루어진다. 공동 성찬식으로서의 성찬 전례와, 거룩한 구원사를 공표하는 말씀 전례가 그것이다. 이 두 예식 안에서 그리스도의 현현(顯現)이 일어난다. 알빈 신부는 감실을 제단과 분명히 분리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성체조배는 분명히 미사와 다른 공간에서 체험할 수 있도록 추구했고, 세례소와 고해소의 공공연한 성격과 위치의 중요성도 역설했다. 또한 알빈 신부는 교회는 예식의 장소일 뿐만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의 기도와 묵상을 위한 장소이기도 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교회건축의 사회학적 원칙

 

- 알빈 신부가 설계한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성당. 2007년 화재가 일어나기 전의 모습이다.

 

 

알빈 신부가 설계한 교회는 장소와 위치에 따라 다음의 3가지 기능이 강조됐다. 가장 먼저 ‘상징으로서의 교회’의 기능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상징으로서의 교회가 중요했고 오늘날까지도 그렇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현대 교회들도 교회의 보호성·초월성·투명성 등의 상징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알빈 신부 근본적으로 어떤 종류의 오만한 것이나 불손하고 거추장스러운 것을 반대했다. 그래서 특히 알빈 신부가 설계한 교회가 도시에서 중층화 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승리주의를 따랐기 때문이 아니라, 제한된 작은 대지에 짓기 위해서였다. 알빈 신부가 설계한 교회는 주변 환경에 적절히 조화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친근감을 불러일으킨다.

 

두 번째, 알빈 신부는 회중의 모임(친교)으로서의 교회 역할을 강조했다. 교회는 개인적인 경건의 장소로만 되어서는 안 되며 무엇보다도 회중이 모이도록 하고, 회중을 유대로 묶을 수 있어야 한다. 

 

알빈 신부는 가능한 한, 다양한 활동을 위한 공간을 가진 친교의 중심으로 교회를 계획했다. 주공간과 부속공간의 가변적인 구성은 다양한 체험을 유도한다. 알빈 신부는 부가적인 수법을 활용, 주 공간을 중심으로 몇 개의 부 공간을 배치해 전체공간을 이루어 나간다. 바로 내부공간이 외관형태에 우선하며, 내부공간의 형식이 바로 외부에 읽혀지는 모습이다.

 

세상과 접촉하는 곳으로서의 중요성도 더한다. 알빈 신부는 교회가 신자들에게만 열려 있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교회 건물은 세상과 접촉(교제)하는 곳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일에만 필요한 주 예배공간을 포함해 부속공간들이 다양한 기능으로써 지역사회에 봉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그래서 알빈 신부가 설계한 교회는 때론 일반인을 위한 예식장으로, 학생들을 위한 독서실로, 성인교육장으로, 또 금융조합의 모임 공간 등으로 제공됐다. 그의 교회는 비신자들에게도 항상 개방돼 교회와 세속 간의 벽을 허물었다. 

 

벽화와 성미술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어릴 때부터 미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알빈 신부는 대학에서 미술사와 조형미술을 전공했고, 한때 독일의 수도원 부속 중학교에서 미술과 제도를 가르치고 벽화제작에도 참여했다. 알빈 신부는 건축과 실내공간, 그 안의 성 미술품들이 총체적인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설계한 성당과 어울리는 성 미술품을 직접 디자인하기도 하였다. 그가 제작한 기하학적인 구도의 평면적인 벽화, 스테인드글라스, 십자가, 제대, 촛대, 강론대, 세례대 등은 하나의 유기적 전체로서 그가 설계한 공간을 보완하는 역할을 했다. [가톨릭신문, 2016년 9월 25일, 김정신 교수(단국대 건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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