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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 교회사 속 여성 – 전통 시대: 천주교 신자가 내친 여인들, 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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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7-19 ㅣ No.1216

[한국 교회사 속 여성 – 전통 시대] 천주교 신자가 내친 여인들 : 첩

 

 

숨죽인 함성, 생활로부터의 혁명

 

유군명은 천주교 신자가 되면서 자신이 소유했던 노비를 해방시켜 주었다. 또 황일광은 백정 출신인데도 동등하게 대우를 받자 감격했다. 그런데 조선 시대, 노비나 백정만큼 철저히 차별받는 신분이 또 있었다. 첩이다.

 

선교사들은 조선에 관하여 ‘먹여 살릴 수만 있으면 첩을 얼마든지 얻어도 무방하다.’고 보고했다. 조선에서는 가정 내 질서를 위해 한 명에게만 본처의 지위를 주고, 나머지 여성을 첩이라 하여 철저히 차별했다. 왕비가 낳은 아들은 대군, 후궁이 낳은 아들은 군이라 하는 것과 같다. 「경국대전」에는 양첩(良妾)과 천첩(賤妾)의 구별, 상속, 제사, 상복, 심지어는 형벌 등 모든 차별적 규제가 나온다. 이러한 제한은 첩의 자녀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한(恨)이 되었다.

 

그런데 천주교가 조선에 알려질 무렵, 조선 사회에서도 축첩제도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축첩제는 여성이 스스로도 대우받지 못하고, 또 다른 여성에게도 상처를 주는 관행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의 반성은 축첩제도 자체에 대한 거부라기보다는 첩의 처우나 적서(嫡庶)의 차별에 대한 반성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일부일처제의 원칙을 관철하고, 일부일처제의 유지에 있어서도 남녀 쌍방의 의무를 강조했다. 「회장의 본분」(1913년 대구대교구에서 본당과 공소의 회장을 위해 편찬한 지침서)에는 축첩이 ‘마땅한 보속으로 그 죄를 다 기움을 작정하기 전에는 신부가 고해성사를 줄 수 없는 죄’에 들어 있다. 당시 소외 계층인 첩들도 복음을 듣고 환호했을 것이다. 첩이 입교한 기록은 찾지 못했다. 다만 천주교 신자의 뒤에 남겨진 여인들이 전해 온다.

 

 

“첩이 있는가?”

 

이승훈(1756-1801년)은 1783년 말, 동지사(조선 시대에 해마다 동짓달에 중국으로 보내던 사신)의 서장관(기록을 맡아보던 임시 벼슬)으로 북경에 가는 부친을 따라가게 되었다. 이벽은 이승훈이 북경에 가게 된 사실에 매우 기뻐하면서, 이는 하늘이 참된 교리를 알도록 주시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12월 21일 북경에 도착한 이승훈 일행은 성당을 방문하여 선교사들을 만났다. 이승훈은 특히 열심히 천주교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여 성세를 받을 준비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라몽(Grammont, 1736-1812년, 梁棟材) 신부는 ‘시기적으로 이르다.’는 일부의 우려에도, 이승훈이 귀국 길에 오르기 전 아버지의 승낙을 얻고 세례를 베풀었다.

 

이때 신부가, “복음이 가르치는 순결은 여러 여자를 데리고 사는 것을 용인치 않는다.”고 알려 주니 이승훈은 “법적인 아내밖에 없고 또 다른 여자를 결코 얻지 않겠다.”고 답했다. 그는 조선 친주교회의 주춧돌이 되리라는 희망으로 베드로란 영세명을 받고 한국 교회의 첫 영세자가 되었다. 당시 그는 27세였고, 약속을 지켰다. 양반에게는 웬만하면 다 소실이 있던 시절, 교회 창설자들이 축첩을 하지 않았다는 것도 ‘기적적인 준비’일지 모른다.

 

 

세례받기 위해 첩을 내보내고

 

덕산 사람 원시보(야고보, 1730-1799년)는 60세가 다 되어서야 사촌 동생 원시장과 함께 천주교 교리를 듣고 입교했다. 이후 재산을 가난한 이들을 돕는 데 쓰겠다고 맹세하고, 그들을 찾아 희사하는 일을 일과로 삼았다. 또한 그동안의 식탐 죄를 통회하며 금요일마다 금식했다. 주일과 축일에는 음식을 마련하여 사람들을 대접하며 전교 열의에 불탔다. 1792년 포졸들이 잡으러 왔을 때, 그는 숨을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사촌 원시장은 이때 체포되어, 동사(凍死)형으로 순교했다. 이에 원시보는 교리 실천에 더욱 분발했다.

 

원시보는 1795년 주문모 신부를 만날 수 있었는데, 신부는 그에게 첩이 있기 때문에 성사를 거절했다. 그는 사흘 동안 밤낮으로 울며 탄식하고 단식했다. 결국 신부가 그에게 다짐을 받고 성사를 주었다. 원시보는 집으로 돌아가, “천주교인은 첩을 둘 수 없고 또 첩도 될 수 없다.”며 첩을 내보냈다.

 

3년 뒤 원시보는 덕산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온갖 혹형에도 신앙을 증언하며 홍주로 압송되었다가 다시 덕산으로 끌려 왔고, 이듬해 청주로 이송되었다. 덕산을 떠나던 날 아내와 자식, 친구들이 울면서 따라오자, 그는 천주를 섬기고 영혼을 구하는 일을 할 때에는 인간 본성의 정을 따를 수 없으니 다시 나타나지 말라며 그들을 돌려보냈다.

 

한편, 전에 첩이었던 여성도 사람을 통해 마지막으로 한번 보기를 청했는데, 그는 큰일을 그르치게 하지 말라며 거절했다. 그는 청주에서 거의 한 달간 계속되는 혹형을 이겨 내지 못하고 1799년 4월 17일 눈을 감았다. 죽은 뒤 그의 육체는 이상한 광채에 둘러싸였고, 이를 목격한 많은 외교인이 입교했다고 전해진다.

 

1813년 10월 19일 공주 감영에서 참수당한 장대원 마티아도 축첩을 보속하며 살던 이였다. 그는 아직 외교인일 때 부모를 잃고 이 집 저 집으로 머슴살이 다녔다. 광대패에 끼기도 했다. 그는 다행히 천주교에 들어오면서, 마음을 잡고 금산군 솔티에 있는 교우 옹기가마에서 일하며 신자 본분을 지켰다. 그렇지만 그 뒤 첩까지 얻고 냉담했다. 그러다가 본처가 사망하자 첩과 정식으로 혼인하고, 그르쳤던 행위를 엄히 보속하다가 순교했다.

 

한편, 기해박해 순교자 허대복 안드레아는 포청에서 최영수를 찾으려 사람들을 검거할 때 연루되어 1841년 2월에 체포되었다. 허대복은 젊었을 적에 본분을 잊고 첩을 얻었었다. 그러나 열심인 교우들의 권고로 이 불의의 관계를 끊고 진심으로 뉘우쳤다. 그리고는 남의 영혼을 구하는 일에 몰두했다. 박해 중에는 옥에 갇힌 이들을 찾아보고 순교자들을 매장하는 일을 했다. 그는 1841년 옥 안에서 교수당했다.

 

이러한 혁명적 실천은 신앙의 자유가 온 뒤에도 이어졌다. 1909년 두세 신부의 연말 보고서는 서울 문밖 광주의 숫골 공소에서 1년도 못 된 사이에 영세자가 100명이 넘었음을 알렸다. 그것은 5년 전에 영세받은 이 프란치스코의 공이었다. 그는 1866년 박해 때 예비자였는데, 박해로 혼란한 시기에 첩을 얻고 방탕한 생활을 했다. 첩이 죽자 그는 영세를 했고, 그때부터 그의 가족과 친지들을 개종시키는 데 전념했다.

 

이처럼 천주교 신자들은 박해기 내내 한국 사회에 만연하던 축첩의 관행을 생활에서 거부했다. 쉽지 않은 결단 뒤에 남은 각자의 애첩들에게도 이는 강렬한 메시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천주교 신자들의 이른 실천과 달리, 한국에서 축첩을 불법으로 규정한 것은 1930년대이다. 신자들은 가르침을 조용히 지키며 변화를 앞서 걸었다.

 

* 김정숙 아기 예수의 데레사 - 영남대학교 역사학과 명예 교수. 대구관덕정순교기념관 운영 위원, 대구가톨릭학술원 회원, 대구대교구와 수원교구 시복시성추진위원회 위원이며, 안동교회사연구소 객원 연구원이다.

 

[경향잡지, 2020년 7월호, 김정숙 아기 예수의 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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