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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40: 오토 1세와 신성로마제국 - 황제가 국가와 교회 모두 통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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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1-04 ㅣ No.231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40) 오토 1세와 신성로마제국 - 황제가 국가와 교회 모두 통치

 

 

- 오토 3세의 무덤 : 아헨대성당 내에 있는 오토 3세의 무덤. 신성로마제국의 상징인 독수리상앞에 잠들어 있는 오토 3세는 오토 1세의 손자로 3살에 왕위에 올라 고대 로마제국의 부흥을 꿈꾸었다.

 

 

[아헨=김상재 기자] 프로테스탄트 개혁의 출발지였던 비텐베르그를 거쳐 온 탓인지 신성로마제국의 심장부인 아헨을 들렀을 때 8월의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주체할 수 없는 오한에 떨었다. 제국의 통일과 안정을 위해 교회를 이용하고 강력한 세속 권력을 바탕으로 성직까지 마음대로 임명하고 파면했던 제국의 역사가 이미 600년 뒤 비텐베르그의 성난 함성을 예고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가 하는 역사의 회한이 밀려온 탓인지 모른다.

 

 

동프랑크 왕국의 발전

 

프랑크왕국은 루드비히 1세 이후 삼분되어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로 발전했다. 오늘날 프랑스로 발전한 서프랑크는 카롤링거 왕조 이후 위그 카페 왕조가 들어서 수백년간 치세했으나 독일지역의 동프랑크는 카롤링거 정부가 바이킹과 헝가리의 마자르족 침입을 막아내지 못하자 작센을 위시한 여러 지역에서 독자적인 지도자를 추대해 연합부족국가 형태를 이루었다. 이 결과 작센, 프랑켄, 로렌느, 쉬바벤, 바이에른 등 다섯 곳에서 독립적인 지도자가 등장했다.

 

그러나 마자르족의 위협이 강했기에 동맹 관계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었고 이를 위해 한 명의 왕을 선출하도록 권유한 교회 지도자들의 설득을 받아들여 프랑켄 부족의 콘라트 1세에 이어 작센의 하인리히 1세를 왕으로 추대했다. 하인리히는 부족간의 화합을 꾀하고 마자르족의 외침을 효과적으로 막아내 제국의 안정적 기틀을 마련하고 자신의 아들 오토 1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오토 1세는 즉위와 함께 대내적으로는 부족들의 반란을 물리치고 대외적으로는 마자르와 슬라브족의 침입을 막아내는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했다. 수 차례의 전쟁을 거쳐 각 부족들의 반란을 진압한 오토 1세는 왕권의 확립을 위해 바이에른은 동생에게, 슈바벤은 장남에게, 로트링겐은 사위에게 맡기는 등 가족들에게 각 지역을 맡겼으나 이들이 연합해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아픈 경험을 겪었다. 가까스로 사태를 진압한 오토 1세는 이 때의 경험으로 국왕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교회를 이용하기에 이른다.

 

귀족들로부터 교회재산을 침탈 당해 경제적으로 피폐해있던 교회의 지도자들이 귀족들의 발호를 막기 위한 권력의 중앙집권화에 목말라 하던 차에 이들을 왕권에 대한 지지자로 만들어 왕권을 강화하려 한 것이다.

 

이에 오토 1세는 교회에 의식적으로 토지를 늘려주고 주교들에게 제후로서의 온갖 특권을 부여함과 동시에 완전한 충성과 지지를 요구했다. 이로써 성직자에 의한 중세 봉건교회의 기원을 만들었다.

 

오토의 머리 속에는 주교와 신부들은 독신이므로 왕권에 반기를 들 수 있는 족벌세력 형성의 위험이 없고 상속 또한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이들의 사후에 영토를 회수할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있었다.

 

이렇게 교회를 왕권 유지의 한 축으로 생각한 오토는 주교와 수도원장 등 교회의 고위성직자를 직접 임명했다. 이로서 수도자나 사제는 왕의 관리가 되었고 교구나 수도원은 왕실 소유의 기관으로 전락했다. 독일제국의 최고 관직으로는 대재상이 있었는데 독일대재상에는 마인츠의 대주교가, 이탈리아의 대재상에는 쾰른 대주교가, 부르쿤트의 대재상에는 트리에르의 대주교가 취임하는 것이 관례일 정도였다.

 

오토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로마황제가 될 야심을 드러냈다. 이미 936년 아헨에서의 즉위식에서 의식적으로 자신을 카알대제의 카롤링거 왕조의 전통과 결부시킨 오토는 이탈리아 지방을 다스리던 카롤링거 왕조의 로타르 2세가 죽고난 후 일어난 내분을 이용해 951년 이탈리아로 원정해 파비아에서 스스로 랑고바르드의 왕에 올랐다.

 

더 넓은 영토를 가지게 된 오토는 아가피토 2세 교황에게 로마황제로서의 대관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고 황제의 세력이 로마에까지 미치는 것을 반대하는 귀족들도 반대했다. 그리고 때마침 독일에서 부족들의 반란이 일어나고 헝가리도 침입해오자 독일로 돌아갔다. 그러나 교황 역사상 가장 형편없었던 요한 12세가 로마 귀족 베렌가르의 위협에 도움을 요청하자 오토 1세는 다시 이탈리아 원정을 감행해 베렌가르를 패퇴시키고 962년 드디어 요한 12세로부터 황제로 대관됐다. 이로써 신성로마제국이 탄생한 것이다.

 

신성로마제국의 정식명칭은 '독일민족의 신성로마제국'이지만 오토 1세 시절에는 단순히 제국으로만 불렸다. 아들 오토 2세에 이르러 로마제국의 부활이라는 개념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로마가 추가됐으며 이후 교회의 독립을 위한 교황들과의 다툼이 끊이지 않자 12세기 프리드리히 1세에 이르러 독일제국이 고대로마 전통의 보전자인 그리스도교와 일체라는 뜻에서 '신성'이라는 이름이 덧붙여졌다. 15세기에 이르러서는 제국이 이탈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잃자 신성로마제국의 영역이 독일에 국한되므로 '독일민족의'라는 한정사가 붙게 된 것이다.

 

 

오토의 교회정책

 

오토는 황제로 대관되자마자 로마의 통치자는 자신이라는 것과 교황도 황제에게 충성서약을 하지 않고는 교황이 될 수 없다고 천명하고 교황도 직접 임명하고 파면하기도 했다.

 

이처럼 오토 1세의 교회정책은 대주교, 주교, 수도원장 등 고위성직자에게 영토를 봉토로 주고 여러 가지 특권과 보호를 부여함과 동시에 이들을 국내 통치상의 중요한 지위에 둠으로써 교회와 제국을 하나로 묶는 한편 최고 통수권자를 황제로 하는 신성정치체제였다. 황제는 교황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직접 신의 은총과 제후의 선거를 통해서 결정된다고 주장했고 '거룩한 교회'의 개념에 '신성한 제국'의 개념을 대치시킨 것이다.

 

이 정책은 후임 황제들이 계승하여 혼란스럽던 교황청의 개혁을 도와 교황권의 권위 확립에 공헌하기도 했으나 황제를 비롯한 속인들의 성직자 서임권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불가피하게 교회와의 투쟁을 안고 있었다. 카알이 교회정신에 투철한 이들을 주교로 선택하고 정치적 도구로 이용하지 않은 반면 오토와 그 후계자들은 이해관계에 맞는 이들을 성직에 세움으로서 성직과 성사까지 돈으로 사고파는 등 초대교회의 박해보다 더 한 폐해를 교회에 끼치게 된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2년 2월 10일, 김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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