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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ㅣ복음화

설립 100돌 맞은 메리놀외방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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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10-29 ㅣ No.211

설립 100돌 맞은 메리놀외방전교회


1923년 한국에 첫발... 88년간 '선교의 꽃' 피워

 

 

메리놀외방전교회 100주년 기념 상징문양 및 로고.

 

 

메리놀외방전교회(Maryknoll Fathers & Brothers, M.M.). 아시아 선교를 지향하는 미국 첫 외방선교회로 지난 88년간 한국천주교회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어온 메리놀회가 올해 설립 100주년을 맞는다.

 

메리놀회 본부는 30일 오후 2시 미국 뉴욕 성 파트리치오대성당에서 100주년 기념 감사미사를 봉헌한다. 한국에선 이에 앞서 25일 오전 10시 30분 청주교구 내덕동주교좌성당에서 제2대 청주교구장을 지낸 정진석(서울대교구장 겸 평양교구장 서리) 추기경 주례로 100주년 기념미사를 봉헌한다. 메리놀회가 교구 기초를 놓은 청주교구가 주관하고, 주한교황대사 오스발도 파딜랴 대주교, 청주교구장 장봉훈 주교 등 주교단과 메리놀회 한국지부 사제단이 공동 집전한다. 이에 메리놀회가 걸어온 선교 여정과 발자취, 그 의미를 되새겨본다.

 

 

1910년 9월, 한국이 일제에 강점된 직후였다. 그때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제23차 세계성체대회가 거행됐다. 그 대회에 미국교회 참가단 일원으로 온 두 사제가 우연히 만난다. 당시 미국 보스턴교구에서 전교지 「그 먼 땅에(The Field Afar)」를 펴내던 제임스 앤토니 월쉬 신부와 잡지 「진리(The Truth)」 주필로 활약하던 노스캐롤라이나주 롤리 교구 프레드릭 프라이스 신부다. 이 작은 만남이 역사를 만들었다. 미국 교회가 외방선교에 무관심한 것을 평소 안타깝게 여기던 두 사제는 외방전교회 설립에 의기투합한다.

 

 

2차 세계대전, 중국 공산화로 시련

 

- 평양교구 마산본당 5대 주임을 지낸 윌리엄 보러 신부가 1938년 12월 강서본당을 찾아 그곳 어린이들과 함께하고 있다. 자애로운 표정으로 어린이들을 바라보는 보러 신부의 밝은 얼굴과 소녀들의 얼굴이 아주 인상적이다.

 

 

「그 먼 땅에」를 통해 외방선교회 설립계획이 알려지자 미국교회 내에서 이 계획에 대한 사제와 평신도들의 참여가 잇따랐다. 작은 씨앗 하나가 뿌려져 열매를 맺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11년 4월 미국 주교회의가 미국외방선교회(The Catholic Foreign Mission Society of America) 설립을 인가하고, 2개월 뒤 교황 비오 10세도 메리놀회를 공식 인준했다. 메리놀외방전교회의 출범이었다.

 

첫 선교지는 중국. 1918년 중국 광둥(廣東), 광시(廣西)교구로 진출해 외방 선교의 첫 발을 내디뎠다. 이어 1923년엔 한국, 1932년엔 만주 푸순(撫順), 1935년엔 일본 교토(京都)에 각각 파견되면서 선교의 새 시대를 연다. 특히 2대 총장인 월시 주교 재임시기엔 주교 2명에 사제 204명, 신학생 90명, 평신도 선교사 74명이 활동할 정도로 외방선교가 활발했다.

 

그러나 곧 시련이 닥쳤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1941년 극동에서 활동하던 메리놀회원 203명 가운데 107명이 일제에 억류되는 고초를 겪는다. 1949년엔 중국 대륙 공산화와 함께 선교사 99명이 박해를 당한 뒤 추방됐으며, 총장 재임 뒤 중국에서 활동하던 월시 주교는 유일하게 중국에 남았다가 13년(1958~1970년)간 상하이 감옥에 투옥되기도 했다.

 

 

전 세계 42개국에 선교사 파견

 

이에 당초 아시아 지역을 선교하고자 설립됐던 메리놀회는 중남미ㆍ아프리카로 선교지를 넓혔다. 그 결과 이제는 전 세계 42개국에 파견돼 '가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마태 28,19-20 참조)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구현하고 있다.

 

물론 1970년대 이후 메리놀회도 성소가 급격히 감소하면서 메리놀신학교 문을 닫아야했고, 지금은 회원들 고령화에 직면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럼에도 2000년대에 들어 동티모르(2003년)와 자메이카(2007년), 미얀마(2010년)에 각각 선교사를 파견하는 등 선교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다.

 

메리놀회 100년 역사에서 한 차례도 선교사가 이 땅을 떠나지 않은 선교지가 한국이다. 1922년 11월 교황청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에서 평안도 지역 포교권을 위임받으면서 1923년 5월 한국에 발을 내디딘 메리놀회는 88년간 한국에서 선교의 꽃을 피웠다.

 

1927년 평양지목구 설정을 시작으로 1958년 청주대목구, 1961년 인천대목구 설정과 함께 세 교구의 기초를 놓았다. 또 서울대교구와 수원ㆍ부산ㆍ마산교구에서 본당사목과 함께 왕성한 선교활동을 펼쳤다. 태평양전쟁 중 미국 출신 선교사들이 추방될 땐 아일랜드 국적 선교사가 평양교구를 지켰고, 공산화와 6ㆍ25전쟁 중에는 평양교구를 떠나온 선교사들이 차례로 남쪽에 들어와 단 한 번도 한국을 떠나지 않고 선교 여정을 이어왔다.

 

한국교회 사상 첫 한국인 수녀회인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도회 설립도 빼놓을 수 없다. 제2대 평양지목구장 존 E. 모리스 몬시뇰은 1932년 메리놀수녀회에 위촉, 평양 상수구리에 첫 본토인 수녀회를 설립함으로써 초기 한국교회 여자 수도성소의 못자리 역할을 하도록 했다.

 

 

교황사절 번 주교 '죽음의 행진'

 

지난 5월 서울 중곡동 메리놀회 한국지부에서 열린 피정을 마치고 성당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한국지부 회원들.

 

 

해방 뒤 1947년 가을엔 초대 평양지목구장을 지낸 패트릭 번 신부가 초대 교황순시자(Visitor Apostolic)로 한국에 파견돼 한국과 교황청 간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데 이바지하기도 했다. 번 신부는 1949년 초대 교황사절(Apostolic Delegate)로 임명되면서 주교품을 받았지만 6ㆍ25전쟁 중 체포돼 여러 수도회ㆍ선교회 선교사들과 함께 98.18㎞(250리)에 이르는 '죽음의 행진'에 끌려다니며 갖은 고초를 당하던 중 1950년 11월 병사했다.

 

박해와 추방, 전쟁으로 점철된 메리놀회의 선교 여정은 이제 열매를 맺고 있다. 한국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려는 일념으로 시작된 교육과 구호, 가톨릭운동, 문화사업, 레지오 마리애 및 매리지 엔카운터(ME) 보급, 노동운동 등은 한국교회가 자립교회로 성장하는 데 한 알의 작은 겨자씨가 됐다. 이를 위해 지금까지 한국에 들어와 선교한 메리놀회 선교사는 모두 200여 명이고, 현재 메리놀회 한국지부에 15명이 남아 선교를 하고 있다.

 

 

[인터뷰] 메리놀회 한국지부장 함제도 신부


"죽더라도 한국 땅에 묻혀 북한지역 복음화 보고파"

 

 

"한국교회는 특별히 하느님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한민족은 박해와 일제 강점, 전쟁, 군사독재로 큰 고통을 받았지만, 신앙적으로 보면 정말 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올해 설립 100주년을 맞는 메리놀회 한국지부장 함제도(Gerard E. Hammond, 78) 신부는 감회가 아주 각별한 듯했다. 1960년 사제품을 받고나서 곧바로 한국에 들어온 노사제는 사제생활 51년을 오롯이 한국에서만 선교사로 살아온 때문인지 한국을 시종 우리나라라고 표현할 정도로 지극한 애정을 드러냈다. 이어 지난 88년간 메리놀회 한국지부가 한국에서 선교를 할 수 있도록 큰 은혜와 자비를 베푼 하느님께 감사를 돌렸다.

 

함 신부는 특히 "우리 메리놀회원들은 지난 세월 동안 한국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복음을 전하면서 한국인들에게서 오히려 그리스도를 배웠다"고 겸양을 보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한국교회가 양적, 질적으로 풍요롭게 새로운 복음화를 이룰 수 있도록 한 알의 작은 겨자씨가 되겠다"는 약속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침묵의 교회가 된 북녘 땅 평양교구에 대한 함 신부를 비롯한 메리놀회원들의 사랑은 아직도 식지 않은 듯했다. 첫 선교지 평양교구가 공산화된 이후 60년이 넘었지만 함 신부는 메리놀회 본부와 미국인 회원들의 후원을 받아 1995년 이후 53회나 방북, 식량 지원과 함께 어린이와 임산부, 병자들을 위한 긴급구호활동에 혼신을 다하고 있다.

 

"메리놀회에 평양교구는 한으로 남아 있습니다. 1960년대 당시 평양교구장 서리 조지 캐롤 몬시뇰께서 눈물을 보이시며 평양으로 돌아갈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한반도의 분단과 전쟁을 생각하면 우리는 아직도 늘 마음이 무겁습니다."

 

함 신부는 그러면서도 "통일에 앞서 민족화해가 먼저 이뤄져야 한다"면서 "우리 메리놀회원들은 오늘도 한반도에 대화를 통한 평화가 정착되도록 늘 기도하고 있다"고 전했다. 더불어 "제가 죽더라도 한국에 묻혀 언젠가는 남북이 통일돼 평양교구에서 선교가 다시 이뤄지는 것을 천국에서라도 꼭 보겠다"고 덧붙였다.

 

[평화신문, 2011년 10월 23일, 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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