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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ㅣ복음화

땅끝까지 복음을: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이사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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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5-02 ㅣ No.296

[땅끝까지 복음을]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이사 6,8)

 

 

2012년 10월 17일, 한국교회의 주교님들이 모두 모여 가을 정기총회를 하시는 자리에서 다섯 통의 편지가 소개되었습니다. 한 통은 남미의 볼리비아에서, 다른 네 통은 아프리카의 마다가스카르, 나미비아, 잠비아, 그리고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서 각각 한 교구를 맡고 계신 교구장 주교님들이 한국교회 주교님들께 보내신 편지입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교구의 사정을 설명하면서, 많은 것이 부족하지만 가장 부족한 것은 물질보다 사람, 곧 이미 신앙을 받아들인 교구민들을 돌볼 목자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상황, 주교님들과 사제들의 선교에 대한 열의에 대해 들었으며, 교구민들의 신앙을 돌볼 수 있는 사제들을 꼭 파견해 주십사 청하는 내용입니다.

 

해마다 5월에 로마에서는 교황청전교기구의 정기총회가 있습니다. 세계 각국에 설치된 159개 지부의 지부장들이 모이는 회의입니다. 제가 처음 이 회의에 참석했을 때 교황청전교회 사무총장 신부님이 저를 따로 불러, 한국교회 주교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꼭 전해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00여 년밖에 되지 않는 전교지역인 한국교회가 물질적인 지원뿐 아니라 활발하게 해외선교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참으로 놀랍게 생각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한국 가톨릭 해외선교사교육협의회에서 펴낸 2012년 선교지도를 보면, 2012년 6월을 기준으로 82개국에서 910명의 한국인 사제, 수도자, 평신도 선교사가 선교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최근에는 전교회나 선교회의 사제, 수도자뿐 아니라 교구 사제들이 여러 방법으로 해외선교에 나서고 있습니다.

 

해마다 교황청전교기구 한국지부가 모아서 로마로 보내는 선교 지원금도, 북미나 유럽 교회들의 모금액에는 비교할 수 없지만, 아시아에서는 가장 많은 액수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해외선교를 보는 다양한 시각

 

교구사제인 저는 해외선교를 하고 있는, 또는 새로이 해외선교에 나서는 다른 교구사제들을 바라볼 때, 상당히 복잡한 감정을 느낍니다. 첫째로 느끼는 감정은 ‘그 용기와 열정이 대단하다.’는 감탄과 존경심입니다.

 

두 번째로 그것은 ‘나는 왜 못하지? 나도 해야 되지 않나?’라는 일종의 열등감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면서 ‘나도 할 수 있을까?’ 하며 나이와 건강과 언어 능력과 오지에서 맞닥뜨릴 온갖 현실적인 어려움을 생각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두려움과 함께 선뜻 나서지 못하는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자괴감도 듭니다.

 

마지막 마무리로는 ‘누구나 다 해외선교를 할 수는 없겠지. 내가 해야 할 다른 일이 하느님의 뜻일 수도 있으니까.’라고 자신을 합리화하며 다른 방법으로 선교사들을 열심히 도와야겠다고 결심하곤 합니다.

 

영화 ‘미션’에서 보듯이, 해외선교가 예전에는 곧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순교에 자원하는 영웅적인 결심이었고,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남기신 명령도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었고, 예수님 자신의 삶과 수난을 통해 보여주신 모범을 따라 사도들은 모두 자신의 생명을 바쳐 이 가장 큰 믿음과 사랑의 임무를 완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복음이 전해졌고, 우리의 삶이 바뀌었습니다. 그러니까 만민에 대한 선교는 모든 신자의 사명이고, 믿음의 완성인 사랑의 실천이며, 특히 사제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자 제가 느끼는 것처럼 복잡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영원한 숙제입니다.

 

하지만 조금 다른 시각도 있을 수 있습니다. 식민지 정책에 편승하여 이루어졌던 남미나 아프리카 선교에 대한 비판적인 반성입니다. 당시 선교사들은, 제국주의의 탐욕을 채우려고 총칼을 앞세워 자원을 수탈하고 노예사냥을 자행했던 점령군과 함께 원주민들의 터전에 들어가, 그들 고유의 문화와 가치관을 미개하고 비윤리적인 것으로 단정하였고, 대화와 상호이해를 통한 복음선포가 아니라 일방적인 교화의 자세로 그리스도교를 주입하였습니다.

 

무시할 수 없는 문화를 가지고 있던 중국 선교 때에는 조금 입장이 달랐지만, 여전히 문화에 대한 이해 부족과 앞선 과학기술이나 무력에 따른 우월감을 숨길 수 없었습니다. 서양인들의 기득권에 편승한 교인들의 횡포가 주민들의 반발을 사면서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책자를 통해 천주교를 알게 되고 스스로 신앙을 찾아 나선 독특하면서도 자랑스러운 출발을 지닌 우리 교회에서도 이런 면이 없지 않았습니다. 나라의 문이 열리고 종교의 자유를 얻고 난 뒤에, 천주교나 개신교나, 무력 대신에 구호물자를 앞세운 선교가 이루어졌습니다.

 

굶주리고 병든 이들에게 먹을 것과 약을 주고 학교와 병원을 세운 선교사들의 사업은 물론 순수한 사랑의 실천이었겠지만, 그러한 도움과 함께 신앙을 받아들인 일부 신자들은 이른바 ‘밀가루 신자’가 되었습니다. 이들에게 신앙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물질적 지원에 대한 대가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적어도 고마움의 표현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배경은 순교자들이 보여주었던 절실한 신앙과는 달리, 수동적이고 타산적인 신앙의 태도를 갖게 하는 부작용을 낳았을 수도 있습니다.

 

 

선교사들의 열정과 희생, 그 열매는 복음화

 

현재 교회가 행하고 있는 해외선교도 이러한 틀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도 군중이 생명의 말씀보다는 빵을 배불리 먹었기에 당신을 따른다고 하시면서도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이루셨고, 순수한 사랑과 측은지심의 발로로 많은 이들에게 치유의 은총을 베푸셨으니, 이런 선교방식이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그 안에 잘못 담겨있기 쉬운 문화적 우월주의와 그에 따른 일방적인 신앙의 강요일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이런 비뚤어진 태도의 예를 개신교의 선교에서 많이 목격하였고, 그에 대한 거부감도 그 안에 자라났습니다. 오죽하면 개신교와 비교하여 천주교에 호감을 갖는 큰 이유가 ‘점잖아서, 자기 신앙을 강요하지 않아서’ - 다른 말로는 적극적으로 선교를 하지 않아서(?) - 이겠습니까?

 

이런 요인들 때문인지 우리 신앙인들, 심지어 사제들 안에서도 해외선교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태도를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선교활동은 우리가 익숙해져 있는 산술적 계산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면이 많습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노력을 쏟는 만큼 반응이 돌아오지도 않고, 사고방식이나 형편이 너무도 달라서 벽에 부딪히는 체험도 많다고 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신부님, 한국에서 사목하시면 존경과 인정을 받으면서 더 많은 이들을 위해 일하실 수 있을 텐데 왜 구태여 그렇게 어려운 지역에서 일하십니까?”라고 묻게 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은 우리가 계산할 수 없는 영역에서 이루어집니다. 불편한 역사의 진실과 그 안에 포함된 인간적인 부족함들, 무지와 탐욕과 독선과 오만과 어리석음, 그 모든 것을 이기는 것은 단순하고도 소박한 선교사들의 열정과 희생이었고, 생명을 바쳐서 내가 가진 가장 귀중한 것, 바로 복음을 나누고자 하는 거룩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이 자라나고 열매를 맺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목숨을 바쳐 복음을 전한 사도들과 모든 선교사가 없었더라면 우리에게 어떻게 이 생명의 말씀이 전해졌겠습니까?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로마 10,14)

 

그러므로 교회는, 모든 신앙인은, 특히 선교사들은 이 가장 중요하고 거룩한 사랑의 실천인 복음을 전하는 일을 어떻게 잘할 수 있을까 끊임없이 고민합니다. 선교의 틀도 계속 변화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복음화라는 주제에 맞추어, 세례 받은 이의 수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세례 받은 이들을 비롯하여 그 사회와 삶 전체가 복음화될 수 있도록 더 깊은 성찰과 고민을 합니다.

 

 

교회의 본질적 사명인 사랑의 실천

 

이러한 시대의 흐름과 요구에 맞추어, 한국교회의 주교님들은 정기총회에서, 해외선교의 활성화야말로 많은 은총을 입은 한국교회의 우선적인 소명임을 확인하면서 그 방안을 연구하도록 결정하셨습니다.

 

사실 한 사람이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의 신체적 조건이나 지식과 기능보다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이행할 준비와 자세가 되었느냐에 달려있다고 봅니다. 자기 자신뿐 아니라 타인과 사회에 대한 책임을 인식하고 기꺼이 질수 있을 때, 가정을 꾸릴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죠.

 

그렇다면 한국교회가 성숙한 공동체로 주님 앞에 나서려면 내부의 문제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외부의 문제, 가난한 이를 돌보고 사회정의를 외치고 복음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책임에 눈을 돌리고 그 책임을 기꺼이 지는 일, 곧 공동체 차원의 이웃사랑 실천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입니다.

 

본당 분가도 중요하고 성전 건립도 중요하고 신자들 사이의 친교와 교육도 중요하지만,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 없이 교회는 성장할 수도, 성숙할 수도 없습니다. 사랑의 실천이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이라는 깨달음만이 교회를 끊임없이 쇄신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와 주교님들의 지향에 응답하여 경향잡지에서는 한 해 동안 해외선교에 대한 성찰을 엮어간다고 합니다. 두서없는 글로 그 서론을 대신하게 되었지만, 특히 선교 일선에서 고군분투하시는 많은 분들의 체험과 고민을 함께 나누고, 우리 신앙인들 모두가 그 소명에 마음으로, 그리고 실천으로 동참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변승식 요한 보스코 - 의정부교구 신부. 현재 교황청전교기구 한국지부장,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3년 1월호, 변승식 요한 보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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