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0일 (금)
(백)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가톨릭 교리

2015년 예비자교리12--원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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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5-08-01 ㅣ No.1422

1.6 원죄에 대하여

2015. 7. 31. 이태원성당

1. 사람은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그렇게 바라는 것은 여러분도 같은 생각일 것이고,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 일은 사람이 마음으로 간절히 바란다고 해서 저절로 되는 일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렇게 꿈을 갖고 있다면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할 일이고, 그 방법에 따라 삶에서 뭔가를 실천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행복에 닿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질문하면, 상대적인 입장에서 우리가 행복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것을 찾아내고 거기에서 벗어나야 할 일입니다.

2. 사람의 삶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표현이 가능하지만, 신앙의 내용을 다루는 이 시간에 하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 즉 사람이 행복하지 못하도록 삶을 가로막는 것을 죄()라고 말할 것입니다. 물론 이 죄는 내 삶의 외부에서 나에게 다가와 영향을 남기기도 하고, 내가 삶의 선택에서 만들어 내 삶에 영향을 주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외부에서 온다는 개념으로 생각하면, 다른 이가 만들어서 나에게 원하지는 않는 것(!!)’을 준다는 의미일 텐데, 내가 그것을 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와는 달리 내가 움직이고 선택하고 했던 행동들이 그 의미를 파악하기도 전에, 그 결과가 내 삶에 다가와 내가 원하지 않을 일을 불러들이는 것이며, 그것을 바로 죄라고 말할 것입니다.

3. ()라는 낱말의 설명은 사전에 몇 가지로 나옵니다. 순서대로 적으면 양심이나 도의에 벗어난 행위. 벌을 받을만한 일. ③⦗법률법률에 위반되어 처벌을 면치 못하는 불법행위. ④⦗불교도리에 거슬리어 괴로움의 과보(果報)를 부르는 나쁜 행위. [그리스도교]하느님의 계명을 거역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지 않는 행위라는 뜻으로 설명합니다. 이렇게 말씀드린 어떤 것이든지 죄가 무엇인지 설명하려고 하는 표현이겠지만, 이렇게 사전에 나오는 내용만으로는 우리가 죄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4. 우리가 현실에서, 세상의 용어나 표현으로 라는 글자를 통하여 상황을 설명하고 그에 대해서 알아듣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죄()라는 말은 세상의 용어가 아니라, 신앙의 용어라고 생각해야 올바를 것입니다. 신앙의 용어라는 얘기는 같은 인간의 삶이기는 하되, 하느님을 기준으로 생각해야만 해석이 올바를 수 있다는 용어라는 뜻이고, 그 입장에서 죄라는 단어를 해석해야 올바른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세상의 삶을 통해서 그 의미를 찾고 설명한다는 일을 전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에서 규정하는 것과 뜻이 다를 거라는 얘기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함께 하는 이 시간이 신앙을 얘기하는 시간이니까, 신앙의 입장에서 ()’라는 용어를 해석하겠다는 뜻이고 그런 뜻에서 교리를 진행하겠다는 뜻입니다.

5. 사람의 삶에 찾아온 최초의 죄가 있었습니다. 물론 움직이는 사람처럼, 죄라는 이름을 가진 녀석이 사람에게 찾아와서, ‘내 친구가 돼 줘!’하고 먼저 청했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사람이 처한 현실의 삶을 살펴보고 현실에 드러난 사람의 삶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만들어낸 표현이라고 생각해야 할 내용입니다. 죄란 인격체가 아닙니다. 독립하거나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대상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사실은 죄가 인간에게 찾아왔다는 것보다는 사람이 죄가 될 행동을 하고, 그 책임을 사람이 지기 싫어서 다른 대상으로 의인화시켜서 설명한 것입니다.

6. 신앙에서 말하는 최초의 죄를 원죄(原罪)’라고 부릅니다. 이 원죄라는 낱말을 우리말 사전은 그리스도교에서 유래한 내용이라고 설명하는 표현에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죄 때문에 모든 인간이 날 때부터 가지고 있다는 죄로 설명합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우리가 아담과 하와를 원망하는 일이 생길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도대체 아담과 하와는 왜 죄를 지어서, 인류가 죄에 빠지는 일을 만들었느냐고 따지게 될 수도 있고, 아담과 하와가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았더라면 인류가 죄와는 멀리 떨어진 행복을 누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고,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과 출산의 고통과 노동의 힘겨움도 우리가 겪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나 대상의 책임을 묻고 나는 그 일에서 자유로워질(??)수 있는 현실사람의 생각과 주장으로는 가능한 소리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도 않고 전혀 그럴 수도 없는 일이라는 것이 올바를 것입니다.

7. 인간이 갖거나 드러내는 악한 성향(性向), 하느님의 올바른 뜻에서 멀어지고 그러한 결과를 만드는 행동을 하려는 경향을 해석한 방법과 표현이 원죄라는 얘기를 하는 것이고, 그에 대한 설명을 하는 것이 이 시간에 하는 제가 여러분에게 하는 행동입니다. 그와는 달리 제가 여러분보다 먼저 죄가 무엇인지 완벽하게 알아서 그 내용을 설명하는 시간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8. 사람의 삶에 해석은 중요한 일입니다. 일이 벌어지는 순간, 일이 발생하는 순간에 그 내용을 다 아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한 시간이 지나고 하루가 지나고 1년이나 10년이 지나고 혹은 그 사람의 생애가 끝나고 난 다음에 평가를 내리고 해석하는 것이 벌어진 일에 대한 해석입니다. 그리고 그 해석에 따라 아주 오래도록 욕을 듣거나 칭찬을 받는 것일 뿐입니다.


9. 원죄에 대한 것은 우리 신앙에서 죄에 대한 설명에 나옵니다만, 구체적으로 정말 아담과 하와라는 대상이 범한 죄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대하는 성경의 구약 편 첫째 권, 창세기에 이 죄에 대한 과정을 이야기형식으로 담습니다만, 성경학자들이 말하는 글로 쓴 시기를 생각하면 이 아담과 하와는 실존인물이었다고 말할 수 없는 존재(存在)들입니다. 성경학자들이 말하는 창세기의 내용은 지금부터 3000년쯤 전부터 단편적인 글로 쓰이기 시작했고, 지금부터 2500년쯤 전에 지금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형태와 내용으로 된 책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앞서 말씀드린 삶에 대한 해석을 찾는 입장에서 창세기의 이러한 내용이 글로 작성되어 우리들에게 전달된 것이라고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10. 창세기라는 구약성경은 아담과 하와가 지었다는 원죄를 설명하는 일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하와가 먹고 같이 살던 남편에게도 따주어서 먹었다는 일과 그렇게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 이라는 존재가 등장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적고 있습니다만, 사실 그렇게 기록한 내용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뱀이 과연 사람의 말을 했을까요? 또 사람이 뭐가 부족(?)해서 사람보다 등급이 낮은 뱀의 말을 듣고 하느님의 뜻을 벗어나서 그대로 행동했을까요? 모를 일입니다. 모르는 일이고 알 수 없는 일입니다

 

11. 사람의 삶에 찾아온 죄는 연속성(連屬性)/지속성(持續性)을 드러냅니다. 저 혼자(?) 인간에게 찾아왔으니 웬만큼 놀다가 혼자, 조용히 물러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한 번 찾아온 다음에는 사람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처음부터 사람의 일부분이었던 것 마냥 인간의 본질에 달라붙어 머문다는 것이고, 그 삶의 주변에 남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생긴 결과가 사람에게 좋은(!) 것이라면 그래도 나을 수 있을 텐데, 악한 것이 사람의 주변에 그대로 머문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입니다. 죄가 그저 우리의 본성주변에 남아있다는 표현만으로는 죄를 설명하는 표현이 부족합니다. 그것보다 이 죄의 특성은 파괴에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즉 사람이 선택한 것이든지, 죄가 만만한 인간을 선택했든지 한 대상과 일치된 죄는 사람이 드러내는 웬만한 노력이나 작심이 아니면 그 대상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그 존재가 세상에서 사라지거나/죽을 때까지 그 사람의 곁에 머문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세상에서 죄에 대하여 규정하는 판단이라면, 그 죄라는 대상을 이기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은 신앙인이 우리가 찾아야 할 일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 죄에 대해서 이길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세상은 아무런 지혜도 제시하지 않지만, 신앙에서는 그 죄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제시한다는 것입니다.


12. 원죄를 설명하는 설화를 기록하는 구약성경, 창세기는 하와가 뱀에게 속아서(!) 선과 악을 하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서 먹었고, 자기 남편 아담에게 따 주었으며, 그게 하느님의 명령을 어긴 것으로 드러나자, 인간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낙원(=에덴동산)에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었고, 노동이 있고 고통이 있는 세상으로 쫓겨났다고 기록합니다. 그 모습에 하느님의 사랑이 아직 더 남아있다고 하는 것은 불쌍하고 딱한 인간을 대하는 신앙의 위로일 뿐입니다.


13. 세상으로 밀려난 아담과 하와, 고통이 함께 하는 것이 숙명(宿命)인 인간이 세상을 선택해서 내려온 다음에는 선을 등한시하고 악한 것을 선택하는 희한한(!) 성질이 인간에게 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세상과 그 세상을 악하다고 아주 간단하게 요약할 수는 없어도, 인간은 선한 것보다는 악한 것에 더 익숙하고, 선한 것보다는 악한 것을 더 많이 선택하고, 악한 것에 더 친숙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딱하고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렇게 아담과 하와에게서 시작된 잘못을 가리켜 원죄(原罪)라고 설명합니다. 반복합니다만, 실제로 살았는지도 모르는 아담과 하와가 원죄를 지었다고 푸념하고 한탄해봐야 달라질 일은 없습니다. 현실이 그러한 것을 깨닫는다면, 우리가 드러내야 할 모습을 찾는 것이 중요한 일이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이 여러 가지 사항을 함께 묶은 교리문답44항과45항을 함께서 설명한 내용입니다.

44. () 아담의 죄와 그 벌이 후손에게 미치지 아니하였느뇨?

() 아담의 죄와 그 벌이 대대손손에게까지 미쳐 내려오느니라.

45. () 아담이 끼쳐준 죄를 무슨 죄라 하느뇨? () 원죄(原罪)라 하느니라.


14. 이제 교리문답46항 이후의 내용은 교회와 신앙공동체의 활동에 대한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죄를 지어 자기의 삶에 파멸과 고통과 죽음을 불러들였으므로, 그 죄를 물리치는 것도 인간스스로의 판단과 행동으로 가능할 거라고 말하고 싶은 생각이 있겠지만, 그것은 이론이고, 사람이 가진 능력이 무척이나 대단한 것처럼 보는 탓입니다. 선이라는 것도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죄에 대한 것도 사람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46. () 모든 사람이 다 모태에서부터 원죄가 있느뇨?

() 성모 마리아 외에는 모든 사람이 다 모태에서부터 원죄가 있느니라.

47. () 마리아는 어떻게 원죄에 물듦이 없이 잉태되시뇨?

() 마리아는 천주의 특별한 은혜로 예수의 공로를 미리 입으사 원죄에 물듦이 없이 잉태되시느니라.

48. () 마리아의 이 특별한 은혜를 무엇이라 하느뇨?

() 무염시태(無染始胎)라 하느니라.

15 사람의 탄생과 원죄에 대한 얘기를 할 차례입니다.


사람은 부모님을 통해서 세상에 태어납니다. 요즘처럼 과학과 생물학이 발달하면 사람생명의 시작이 어머니의 뱃속이 아니라, ‘시험관의 플라스크인 경우 있기는 하겠지만, 그렇게 해서 세상에 태어나는 인간에게는 배우지 않아도 전문적인 지식을 발휘하는 악을 가진 존재로 인간은 세상에 태어납니다. 이렇게 말하는 내용에 거부감이 든다면 다른 말로도 표현할 수 있겠지만, 어디에서 배웠는지 모를 악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보고 말할 내용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의도는 사람이 모두 악한 존재이니까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그렇게 본다면 다르게 대할 방법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런 표현에서 하느님의 구원은 시작됩니다. 세상의 논리에서는, 태어나면서 악한 존재라고 인간의 가치를 낮추어보는 일도 없다고 하겠지만, 사실 인간의 삶에 함께 한 악의 원인을 설명하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신앙에서 악의 원인을 찾고, 악에 대한 대처방법을 찾는 행동을 가리켜서 오지랖이 넓은 행동이라고 해야 할까요?


16. 세상에 하느님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방법은 사람을 통해서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최고의 존재였던 사람이 하느님의 뜻을 벗어나서 제 멋대로 행동한 것이 죄악의 시작이라고 말하지만, 그 인간의 마음과 삶의 자세를 돌려 다시 하느님께로 가게 하는 것도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난 존재의 역할을 통해서였다는 얘기입니다. 처음 죄를 불러들인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아담과 하와였고, 두 번째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뭔가 특별한 일을 준비하시는 분은, 우리가 신앙에서 참된 사람이요, 참 하느님이시라고 고백하는 예수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은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을 통해서 세상에 태어나고 성장한 마리아를 통해서 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 분은 우리가 동정성모라는 표현을 써서 부르는 분이기도 합니다. 동정에 대한 것은 따로 말씀드릴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17. 하느님의 구원은 인간이 불러들인 죄악을 떨쳐내는 일을 목표로 합니다. 즉 부모를 통해서 세상에 태어난 인간은 악으로 기울어지는 경향, 악과 친숙한 모습을 보이는 성향을 가진 존재이지만, 인류의 구원을 불러오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인 인간을 세상에 낳으신 분인 마리아는 그런 요소에서 배제된 분 분,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을 입은 분이라는 것이 신앙의 고백내용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은총을 가리켜서 신앙의 용어로, 원죄가 없으신 분, 무염시태의 은총을 입고 세상에 태어난 분, 그렇게 하느님의 은총과 배려로 자란 분이라는 여러 가지 특징을 말합니다. 물론 이러한 신앙의 내용은 세상에 사는 우리가 알아낸 지혜와 지식을 따라서 말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닙니다. 말 그대로 그것은 신앙의 내용이고, 신앙의 가르침이니, 세상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측정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18. 신앙의 용어들은 세상의 지식으로 해석하기 어려운 뜻이 있습니다. 물론 신앙의 내용도 우리가 세상에서 사용하는 글자와 같은 것을 사용하고 같은 것으로 그가 가졌다는 신앙의 내용도 표현합니다만, 같을 글자를 사용해도 그 글자에 담겨 있는 뜻이 다르다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신앙의 세상이 이 세상의 것들보다 월등히 높은 가치를 지녔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친숙한 세상의 모습은 신앙의 것들보다 그 가치가 보잘것없다고 말해서도 곤란합니다. 우리가 같은 글자를 쓴다고 하면서 뜻을 다르게 대하고 다르게 해석하는 것은 우리가 세상의 것과 신앙의 것에 대해서 서로 차원을 달리하여 대해야 한다는 소리와도 같습니다. 애석하게도 이런 차이는 사람의 능력과 재능으로는 구분할 수도 없고, 그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도 없는 놀라운 것입니다. 세상에 사는 우리가 신앙의 것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싶다면, 반드시 하느님의 은총을 전제로 할 때라야 가능한 소리입니다.


49. () 천주 인류를 원죄 중에 그저 버려두시뇨?

() 그렇지 아니하니 천주 무한하신 자비로 즉시 구세주를 허락하시고 후에 과연 보내시니라.

19. 하느님의 구원은 세상에 태어난 구세주/예수그리스도로 실현됩니다.

세상에 사는 인간에게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을 밝히시고 실현하는데 사용하신 방법은 최초의 아담과 같은 첫 사람외에 다른 존재의 삶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세상에 오시어 인류에게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신 예수그리스도/혹은/예수님은 참으로 인간이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물론 그분의 삶을 우리 사람들이 정확하게 알아보는 일에 한계는 있습니다. 그렇게 한계는 있지만, 그분은 사람들의 삶에 하느님의 모습도 드러내신 분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예수님은 성모마리아라는 인간을 통해서, 이 세상에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실천한 분이었고 참으로 하느님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인간을 대할 때, 신앙의 언어와 세상의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신앙의 언어로 표현되는 내용은 세상의 언어로 온전하게 설명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것은 말 그대로 인간이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라는 것을 깨달아야 할 일니다.


20. 하느님께서 세상에 당신의 아들(!)을 구원자로 파견하셨다는 것을 미리 안 사람은 없었습니다. 우리가 구약성경을 대하면, 아주 오래전부터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실 거라고 당신의 뜻을 밝혀 예고하셨고, 예언자들을 통하여 미리 말씀하셨다는 내용은 나옵니다만, 그렇게 일이 진행되는 것을 대다수의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과장하면, 그분이 세상에 오시는 일에 아주 가까운 모습으로 함께 한, 그분의 삶에 부모로 등장한 요셉과 마리아역시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그 사정은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구세주예수님의 탄생을 기록하고 있는 신약성경의 마태오복음서나 루카복음서도 훗날 기록된 믿음의 기록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대한다면, 실제로 하느님께서 인간의 세상에 당신의 뜻을 드러내실 때, 인간의 입장에서는 그 사정을 정확하게 안 사람도 없고, 알아들든 사람도 없었으며,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가계(家系)형제들이나 동네사람들도 물론 마찬가지였습니다.


21. 신앙의 내용은 사람이 체계를 세운 현실의 학문으로 그 내용을 해석하거나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내용이 어렵다거나 쉽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설명하는 신앙에 대해서 뭔가 해석해보겠다고 도전하면, 뭔가 할 수도 있고 했다고도 언젠가 말할 수 있겠지만, 그게 정말로 세상을 상대로 움직이시는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대한 것인지 우리가 알 수 있는 방법은 모릅니다. 알 수 없습니다. 결국 하느님이 하신 일에 대한 것은 우리가 신앙(信仰)’이라는 말을 쓰는 것처럼, 믿음으로써만 가능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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