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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철학 에세이: 나만의 고유한 삶의 방식은 행복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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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7-01 ㅣ No.113

[가톨릭 철학 에세이 - 철학이 던지는 행복에 관한 열 가지 질문 6]

나만의 고유한 삶의 방식은 행복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다른 이의 시선을 신경 쓰는 것은 개성 없어 보여 싫지 / 그것은 세상 어느 곳엘 가도 누구나 갖고 있는 것이잖아 / 누구의 이해도 바라지 않고 지난 일에 집착하지 않아 / 아무도 이해 못할 말을 하고 돌아서서 웃는 나는 아웃사이더 / 명예도 없고 금전도 없어 자존심이 있을 뿐이야”(봄여름가을겨울, ‘아웃사이더’).

“우리들은 근본으로 파고 들어가는 것을 자꾸만 잊어 버린다. 우리들은 물음표를 충분히 깊게 던지지 않는다”(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문화와 가치」에서).


필경사 바틀비 - 근대적 삶의 방식과 개인의 운명

미국의 소설가 허먼 멜빌은 거대한 고래를 쫓아 사투하는 에이해브 선장이 주인공인 대작 「백경」으로 유명합니다. 이 소설을 대개 해양소설로 분류하지만 사실은 그 안에 종교적 상징과 의미가 놀랄 만큼 풍부하게 담겨있기도 합니다. 깊고 거대한 이 작품은 작가의 세계관의 장대함과 근대세계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잘 보여줍니다.

이 작가의 작품 가운데 좀 덜 알려진 걸작이 「필경사 바틀비」입니다. 이 단편에서 멜빌은 독자들에게 근대적 세계상에 짓눌리는 개인의 삶을 인상적으로 보여줍니다. 명료한 문체 속에서도 수수께끼 같은 분위기를 담고 있어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짧지만 풍부한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어쩌면 시대를 많이 앞선 작품이라 할 이 단편을 최근 들어 몇몇 철학자들이 새로이 조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멜빌이 보여주는 근대인들의 상황에 대한 심오한 직관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은 공황이 밀려오는 20세기 초 미국 도심을 배경으로 전개되며, 창백한 외모를 지닌 주인공 바틀비가 필경사로 등장합니다. 변호사의 소송장을 옮기는 것이 맡겨진 임무인 이 직업을 우리는 산업화된 사회 안에서 같은 일의 반복과 관료주의 속에서 자아상실로 내몰리는 수많은 개인들의 비극적 운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과 섞이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지만 그래도 완벽하게 필경사 일을 수행하던 바틀비는 어느 날부터 사람들의 기대에 따라 주어진 일을 행하는 것에 대해 분명한 거부를 표시합니다.

그는 상사의 지시에 오직 “난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라고만 대답하기 시작합니다. 이 대답에 충실하기로 결심하는 순간, 산업사회 안에서 바틀비의 비극적 운명은 이미 정해진 것이었고 소설은 그 귀결을 담담하게 보여줍니다. 그것이 그저 몰락인 것인지 아니면 소리 없되 의미 있었던 획일화와 몰개성의 시대상에 대한 저항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해석의 여지가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부정’의 몸짓이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만큼은 이 소설에서 분명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이 부정의 대답은 행복을 모든 이에게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양적인 개념으로 생각하고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신조로 삼는 근대 이후의 공리주의적인 사고방식에 대해 한 미력한 개인이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거부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행복을 객관적으로 규정하려는 시도로서의 ‘행복의 윤리학’이 각 개인의 독자적이고 고유한 삶의 의미에 대한 ‘의미물음의 인간학’을 담지 못할 때 생겨나는 공허감을 바틀비의 부정의 몸짓을 통해서 우리는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됩니다.


삶의 의미는 어디에서 오는가

허먼 멜빌은 문학을 통해 근대적 삶의 조건에 살고 있는 개인의 비극을 가슴 서늘하게 그렸지만, 이러한 산업사회 안에서 본연의 자신을 놓치고 사는 사람들의 문제는 철학과 신학 안에서 ‘근대성 비판’이라는 중요한 주제로 20세기 내내 꾸준히 다루어져 왔습니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 마르틴 하이데거의 「세계상의 시대」, 로마노 과르디니의 「근세의 종말」 같은 저술들에서 우리는 근대정신의 본질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사유의 시급성을 논하는 대가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교수 시절에 저술한, 20세기 신학의 손꼽을 성과라 할 수 있는 「그리스도 신앙 - 어제와 오늘」을 봐도 근대정신의 부정적 그늘에 대한 성찰과 이의제기를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습니다.

근대성의 비판이 향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과도한 객관주의와 양적으로 계측 가능한 것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20세기의 근대성 비판은 파스칼, 키르케고르, 니체 같은 전 시대의 사상가들의 예언자적인 통찰에 크게 힘입고 있습니다.

과도한 객관적, 타산적 사고방식에 대한 비판이 행복에 관해 새롭게 가져온 관점의 전환은 바로 자기 진실성 / 진정성(authenticity)에 대한 높은 가치부여입니다.

이제 객관적으로 좋은 삶을 실현해가는 것에서가 아니라 나의 고유한 삶의 방식을 찾고 그것을 주위의 견해와 상관없이 주체적으로 고수해 가는 데서 행복의 비밀을 찾습니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삶을 연출하는 예술가인 셈이고 그러기에 20세기 들어 예술가들의 평범치 않은 삶의 궤적들이 미화되고 영웅시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진정성’이라는 가치의 발견은 분명 큰 의미가 있는 것이지만 우리 시대의 철학자 찰스 테일러가 「불안한 현대사회」라는 책에서 잘 정리하고 있듯, 이는 현대의 과도한 주관주의적 사고방식의 한 원인이기도 합니다.

주관적 의미의 중요성에 눈을 돌린 것은 근대적 삶의 방식에 깃든 병리현상에 대한 처방이었지만 ‘진정성’만을 강조하는 것은 결국에는 전통, 역사, 공동체와 같은 삶의 의미와 행복의 풍요한 원천을 잃고 피상적인 것들로만 가득 찬 삶으로 귀착될 수 있다고 테일러는 말합니다.

사실 진정한 ‘자기 진실성’은 비트겐슈타인이 강조하듯 생의 ‘깊이’와 접촉할 수 있을 때만 논의될 수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모름지기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는 말로 유명한데, 그가 한 이 말에는 사실 ‘말할 수 없는 것’ 곧 인생의 의미의 한없는 깊이의 중요성이 함축되어 있기도 합니다. 세상의 개별적 사건들은 세상 안에서 설명할 수 있지만, 이 세상 자체의 의미는 세상 안에 매인 관점에서는 발견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확신이었습니다.

‘진정성(본래성)’ 개념을 처음으로 철학에서 다룬 하이데거는 자신의 저서 「존재와 시간」에서 우리는 진정한 본래성의 체험을 ‘양심의 부름’을 통해서 그리고 그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결단성을 통해서 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과 하이데거의 혜안을 음미하면서 우리는 행복과 의미라는 두 개념을 이어주는 진정한 ‘자기 진실성’은 오히려 자신을 넘어선 곳에서 그 원천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행복에서 ‘초월성’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 보려 합니다.

* 최대환 세례자 요한 - 의정부교구 신부. 정발산본당 주임으로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과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연재하는 동안 행복에 대한 독자들의 견해와 질문을 열린 마음으로 기다린다(theophile@catholic.or.kr).

[경향잡지, 2012년 6월호, 최대환 세례자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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