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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명말 예수회 신학(복음) 보수주의: 롱고바르디의 재인식 - 예수회의 전례논쟁과 평민노선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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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8-02 ㅣ No.980

명말 예수회 신학(복음) 보수주의 : 롱고바르디의 재인식


- 예수회의 전례논쟁과 평민노선을 중심으로 -*

 

 

국문 초록

 

명말 ‘중국전례논쟁(천학분화)’이 발생하게 된 예수회 전교사(傳敎史)적 요인을 규명하는 문제는 줄곧 후대 학자들의 주요 관심사가 되어왔다. 그러나 기존연구의 관점은 마태오 리치와 니콜라 롱고바르디의 관계설정을 주로 ‘대립구도’에 편중해 롱고바르디를 가톨릭 중국선교와 동서양 문화교류를 좌절시킨 부정적 인물로 치부한다. 이러한 인식은 예수회 ‘선교신학 - 천학’의 역사변천, 이를테면 민간노선의 출현 배경과 과정을 간과한 데서 기인할 것이다.

 

본고에서는 ‘리치와의 계승성’에 무게를 두어 그동안 누락된 롱고바르디의 ‘평민영성선교노선’을 분석 · 고찰하여 그 역정에 내재된 숨겨진 역사진실과 그 의미를 복원하고자 했다. 실제로 예수회 내부로 한정해 보면 롱고바르디는 문화에 대한 ‘복음의 순결성’에 치중해 리치노선과의 ‘균형’을 모색하는 것이 핵심이다. 다시 말해 리치의 지적 선교학, 곧 ‘반이학 프레임’을 계승해 영성신학 지향의 ‘동태적 균형’을 강구하는 방향으로 관철시킨 것이다. 롱고바르디는 리치노선이 안고 있는 ‘단일적 지식선교방법’의 경직성을 깨뜨리고 ‘복수적 방법’을 제시해 ‘순수복음화적 적응책략’을 수립하고자 했다. 따라서 비적응주의 행보는 순수교의적 차원에서 실행되었고 이후의 선교회 간, 문명권 간 정치적이고 징고이즘(jingoism)적인 대결은 그의 본의에서 벗어난 별개의 문제다. 이런 사실들이 예수회 ‘평민영성선교’의 재발견, 아울러 두 노선을 양단하는 기존연구의 비판적 교정을 요망하는 것이다. 더욱이 롱고바르디에게 간직된 숭고한 그리스도교적 삶의 역사초상은 ‘적응주의의 본연성’을 재성찰케 한다. 롱고바르디는 이냐시오가 지도하는 예수회의 ‘영수(靈修)적 토착화(공감화)’, 곧 복음적 완덕과 박애주의 삶의 표본이었다.

 

 

I. 이끄는 말

 

가톨릭 중국선교단의 선교적 분열은 명대(明代) 말기 예수회(Society of Jesus) 내부에서 발발한 ‘중국전례(典禮)논쟁’(Chinese Rites Controversy)이 발화점이 되었다. 이 ‘전례논쟁−천학(天學)의 분화’가 발생하게 된 예수회 전교사(傳敎史)적 요인을 규명하는 문제는 줄곧 후대 학자들의 주요 관심사가 되어왔다. 이 분쟁은 표면상 1610년 예수회 중국선교회의 수임(首任) 총회장 마태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1552~1610) 타계 직후, 그 직책을 승계한 제2대 총회장 니콜라 롱고바르디(Nicolas Longobardi, 龍華民, 1556∼1654)가 리치의 ‘역명(譯名) · 전례적응노선’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면서 불거졌다.

 

그러나 리치와 롱고바르디의 보다 근원적인 차이는 선교대상에 대한 가치설정이 다르다는 데 있었다. 롱고바르디는 리치와는 달리 사대부계층보다는 평민계층을 상대로 그리스도교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더 적극적이었다. 하층영성(靈性, spirituality)선교를 지향했던 롱고바르디의 전교방향은 당시 예수회 중국선교구의 중심축이었던 리치의 상층학술(이성)선교방침과 합치되지 않은 부분이 많았다. 가령 음역(音譯)교리용어 주장과 중국교도의 제례(祭禮)문화 불허, 그리고 평민(민간)귀화운동이 대표적인 실례들이다.

 

롱고바르디가 주도한 이 일련의 신학보수(비적응)정책은 동서양 신권(神權)문명과 천권(天權)문명의 충돌로 비화된 중국전례논쟁의 발생요인과 무관하지 않다. 이 ‘중국전례논쟁, 곧 천학 분화’의 요인에 관한 쟁점은 리치와 롱고바르디 간의 관계설정이 관건이 된다. 아울러 그와 연관된 예수회 내부의 논란은 이후 교의상 전개된 모든 해당분쟁의 모체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엄격히 말해서 선교학상 그리스도교를 교회, 신조, 윤리, 사조 등 어느 것으로 정의하든지 간에 그리스도교 자체가 ‘그리스도(복음)’와 ‘문화’라는 양축 사이에서 움직인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문화에 속한 존재(연속성)’이지만 동시에 ‘문화 위(밖)의 존재(불연속성)’이기도 하다.1)

 

리치와 롱고바르디의 선교학적 갈림길은 이 ‘문화’와 ‘복음(신학 · 진리 · 신앙)’ 관계의 딜레마가 불러온 인식의 경계선상에서 촉발되었다. 리치가 문화에 대한 복음의 ‘연속성’에 방점을 두어 ‘이성화의 상층적응노선’을 확정했다면 롱고바르디는 ‘불연속성’에 치중해 ‘영성화의 평민보수노선’으로 나아간 것이다. 이와 같이 소위 ‘중국전례논쟁’은 야유(耶儒)대화에 있어 ‘문화적응’과 ‘복음보수’ 사이의 간극이 불러온 결과물의 다름 아니다. 이 사건은 이후 다른 선교회가 가세해 걷잡을 수 없게 확대되었다. 결국 로마 교황청(Curia Romana)의 독단적 금례령(禁禮令)과 그에 맞선 청초(淸初) 황제들의 중국내 가톨릭 금교령으로 역사상 종지부를 찍었다.

 

그런데 현행 역사 · 사상논단에서는 이러한 비극의 결말을 일정부분 롱고바르디에게 전가시켜 그는 통상 ‘부정적인 인물’로 회고된다. 말하자면 중세 유럽식의 비타협적인 ‘신앙의 순정성’을 고수해 최초로 역명 · 전례논쟁을 야기해 가톨릭 중국선교와 동서양 문화교류를 좌절시킨 장본인으로 지목된다. 좀 더 진전시켜 보면 롱고바르디는 대부분의 예수회원들에게 발견되는 수학, 지리학, 천문학 방면의 교육을 받았다거나 어떤 과학기술 방면의 특별한 전문지식을 가졌다는 구체적인 증명자료가 부재한 것으로 그려진다. 이것은 동서양 문화교류에 있어 그의 활약을 제약했고 직접적으로는 리치가 개창한 ‘학술(지식)선교’를 의심하고 경시한 이유로 거론된다. 또한 이로 인해 그가 주도한 선교사업과 본인이 모두 그 대가를 치르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지적된다.2)

 

더 심각한 경우는 후리치(롱고바르디)시대를 폄하하여 “디에고 데 판토하(Diego de Pantoja, 龐迪我, 1571~1618)와 사바티노 데 우르시스(Sabatino de Ursis, 熊三拔, 1575~1620)가 중국에서 추방된 뒤에야 롱고바르디는 쉬광치(徐光啓, 1562~1633)가 구성한 역법(曆法)개정사업에 보다 적극적인 태도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626년 《지진해》(地震解)라는 책을 써냈다. 그러나 끝내 역산학(曆算學)에 정통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중에 수력(修曆)사업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 인해 그가 중국사회에서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3)라고 기술된다.

 

이러한 무차별적인 재단과 오독은 리치와 롱고바르디의 관계설정을 주로 ‘대립구도(단절성)’에 편중해 규정하고 고착화시킨 소치일 것이다. 이 전통적 논리에 따르면 예수회 롱고바르디시대의 ‘민간전도방침’은 리치의 토착화 고뇌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없는 성급한 착오이거나 이례적인 이탈로 단정된다. 심지어 롱고바르디가 야기한 반(反)리치적 도발은 청 중엽 가톨릭 중국선교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는 화근이 되었다고 말해진다. 그러나 이 부정적 인식에는 예수회 ‘선교신학−천학’의 역사변천, 이를테면 민간노선의 출현 배경과 과정이 간과된 면이 많다. 예수회 신학(복음)보수주의(Conservatism)에 대한 보다 객관적이고 실증된 연구와 공론이 필요한 대목이다.

 

실제로 명말(明末) ‘가톨릭선교사 동아시아학’ 지형에는 우리의 선입견과는 판이한 여러 역사실체가 목도된다. 예를 들어 예수회의 전체 중국선교역사로 보아 “롱고바르디는 리치와 가치 대립적이지 않으며 도리어 리치와 이상적인 선교의 완전한 형식을 이룬다.”4)라는 최근의 연구보고는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본고에서는 ‘리치와의 계승성’에 무게를 두어 그동안 누락된 롱고바르디의 ‘평민영성선교노선’을 분석 · 고찰하여 그 역정에 내재된 숨겨진 역사 진실과 그 의미를 복원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이 분야연구의 공백이 초래한 기존의 왜곡된 시각과 가치판단의 오류를 바로잡는 데 일조하고자 한다.

 

 

II. 베이징 : 리치의 계승자

 

1610년 마태오 리치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직감하고 묘지를 물색하는 한편, 1608년 가을부터 집필에 착수한 회고록 《예수회와 그리스도교의 중국 진출》(Della entrata della Compagnia di Giesù e Christianità nella Cina)을 탈고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일은 중국전교단의 재화(在華) 활동을 총결산하고 차기 후임자를 최종 결정하는 것이었다. 1610년 5월 11일 저녁 무렵, 리치는 힘들게 버텨온 과중한 선교업무가 병이 되어 급기야 숨을 거두게 된다. 주변의 동료들은 선종시기에 “끝이 다가옴에 만족을 느꼈고 얼굴에는 내내 보기 드문 유쾌함을 보였다.”5)고 증언한다.

 

롱고바르디는 이때 베이징[北京]에 있지 않았다. 당시 리치의 유언을 받아 후사를 처리한 선교사는 판토하, 우르시스였다. 또한 베이징의 고관(高官) 교우 쉬광치, 리즈짜오(李之藻, 1565~1630)가 옆에서 도왔다. 준비된 리치의 유언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베이징 회원(會院, 전도소)의 일인데 베이징 전교구는 판토하, 우르시스 두 신부에게 인계했다. 또 하나는 전체의 선교사업, 즉 중국전교구에 관한 것이다. 이 계획은 ‘중국선교단 책임자 니콜라 롱고바르디 신부’가 수신자였다. 그리고 발신자는 “본 선교단 전(前) 책임자 마태오 리치 신부”라고 작성했다. 리치는 이 서류들을 서랍에 남기고 눈을 감았다. 그는 나중에 서랍을 열어보면 선교단이 처리할 일들을 알 것이고, 또 다른 문건은 롱고바르디 신부에게 전달해줄 것을 당부했던 것이다.6)

 

이렇게 롱고바르디는 리치가 임종 직전에 후임자로 지명하면서 예수회 중국선교회 제2대 총회장직을 맡게 된다. 모르긴 해도 1609년 9월경에 이루어진 베이징 회동 때 상층선교와 평민선교의 상호적 균형이나 통합된 체계강구를 위한 모종의 합의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적어도 1610년 5월의 후임결정은 ‘리치적 롱고바르디노선’과 ‘롱고바르디적 리치노선’의 수요가 불러온 결과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리치는 최종적인 후임결정에 앞서 1609년 남방세 회원의 총책임자 엠마누엘 디아스(Emmanuel Diaz, senior), 李瑪諾(老瑪諾, 1559~1639)가 마카오(Macao, 澳门)로 가자 먼저 “롱고바르디에게 그의 직위를 대신하게 했다.”7) 이 조치는 중국선교단에서의 롱고바르디의 지위를 강화시켜준 것으로 그 자신이 설계한 후계구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현존하는 문헌사료를 조사해보면 롱고바르디는 베이징에서 리치를 만난 뒤 1609년 10월에서 1611년 5월까지 난징[南京]에 내려가 남방선교의 감독이자 난징 회원의 원장을 지내며 1년 남짓 머문 것으로 보인다.8) 그리고 1611년 5월 3일에 베이징에 재입성해 얼마 후 리치 장례의 주재자 신분으로 나타났다.9) 니콜라 트리고(Nicolas Trigault, 金尼閣, 1577~1629)는 “중국선교사업의 최고 책임자인 롱고바르디 신부도 베이징에 왔다. … 신부의 지도 아래 중국 가톨릭의 최초 묘지설계가 빠르게 진척되었다.”10)라고 전한다. 예수회 ‘선교신학−천학’의 분화를 예고하는 ‘롱고바르디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런데 리치는 왜 하필 자신의 노선과 방향을 달리하는 롱고바르디에게 전권을 넘겨주었을까? 이 문제는 예수회 ‘중국선교학 - 천학’의 변천사를 이해함에 있어 반드시 규명해야 할 난제 중의 하나다. 이 물음에 답하려면 리치의 ‘상층학술선교’에 감추어진 행간의 의미를 읽어내야 한다. 리치가 구상한 재화 선교의 시작은 앞서 논급했듯이 대규모의 민중이 아니라 중국 상층의 사대부와 지식인을 주요 대상으로 했다. 그러나 그는 중국 지식층과의 교제확대는 “점진적으로 광대한 면적에 씨앗을 뿌리기 시작한 것”11)이라고 인식했다. 이를테면 베이징을 기점으로 하는 지식선교 강화를 전략으로 삼아 중국 전역에 걸쳐 식자층과의 친교망을 구축한다. 그런 다음에 대중에게 널리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12)

 

이런 의미에서 선교의 대상이 ‘상층(지식인)’에서 ‘민간(비지식인)’으로 옮겨가는 것은 리치노선에 내장된 자연적 추세라고 할 수 있다. 리치는 이 대중선교의 꿈을 생애 마지막까지 놓지 않았다. 트리고의 기록에 의하면, 1610년 “신부는 바쁜 와중에도 하층민들과 환담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들은 신부가 아무리 업무에 시달리더라도 자신들을 대할 때는 중요한 인물이 찾아온 것처럼 항상 친절하게 보살핀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것은 신부에게 습관이 되어 방문한 신교우의 신분이 비천할수록 할애하는 시간은 더 많았다.”13)고 한다.

 

이로 보건대 리치가 단일한 노선만을 고집했다고 생각하면 옳지 못하다. 그는 하층노선과 직접선교를 결코 배척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층학술선교’를 통해 황실, 사대부의 보호를 얻은 뒤에 가급적 빨리 평민교도를 확보해 가톨릭교회를 세우고자 했다.14) 리치는 만년에 중국전교구에 당면한 ‘롱고바르디노선’을 예수회 선교학적 방법상 ‘균형’으로 수렴하고자 했다. 두 가지의 가치 방향, 상이한 노선이 병존하고 그 사이를 균형적으로 안배해야만 선교사업이 각종 돌발적이고 뜻밖의 특수상황에 직면했을 때 신축적인 탄력성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 배면에는 리치노선의 재조정과 새로운 단계의 구상이 예비되어 있었다. 이 논단은 차이커푸[柴可輔]의 다음 말과 동일문맥을 구성한다. “선교사들이 추구한 ‘최대의 보상’은 전체 제국의 그리스도교화였다. 그러나 제국에는 오직 하나의 베이징뿐만 아니라 도리어 무수한 사오저우(韶州, 지금의 사오관[韶關]시를 말함)도 존재한다. 상층선교가 아무리 성공한다 하더라도 교단은 이 단계에서 멈출 수는 없었다. 반드시 민간 속에 들어가 엄청난 수의 ‘비지식인’에 관심을 갖고 복음의 불모지대인 그들에게 심령자원을 제공해야 했다. 이것이야말로 ‘보유’(補儒)의 유효성이 존재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롱고바르디의 후임결정 그 자체에는 기존 선교단계에서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려는 고려가 깔려 있었다. 리치가 롱고바르디를 통해 새로운 시스템을 가동하고자 한 것 역시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15)

 

이와 함께 리치가 롱고바르디를 후계자로 내세운 것은 또 다른 의미의 ‘균형성’을 함축한다. 그것은 선교사들의 개별적 상황과 역량, 더 나아가서는 동아시아 선교 차원의 국제정세, 국가(민족)적 안배 등이 고려되었다. 당시 중국에는 13명의 유럽 예수회원이 있었다. 그 가운데 이탈리아인은 6명으로 리치 외에 라차로 카타네오(Lazzaro Cattaneo, 郭居靜, 1560~1640), 롱고바르디, 우르시스, 알폰소 바뇨니(Alfonso Vagnoni, 高一志 또는 王豊肅, 1566~1640), 바르톨로메오 테데스키(Barthélemy Tedeschi, 杜禄茂, 1572~1609)다. 포르투갈인 역시 6명으로 디아스(老), 가스파르드 페헤이라(Gaspard Ferreira, 費奇觀, 1571∼1649), 펠리시엔 다 실바(Fѐlicien da Silva, 林斐理, 1578∼1614), 피에르 히베이루(Pierre Ribeiro 黎寧石, 1572∼1640), 조아오 다 로챠(Joao da Rocha, 羅如望, 1565∼1623), 헤로니무 호드리게스(Jerònimo Rodrigues, 駱入祿, ?~1650)였다. 그리고 스페인인은 판토하 1명이었다.

 

여기서 카타네오, 디아스[老], 롱고바르디, 판토하를 빼면 다른 선교사들은 내화(來華)기간이 짧고 경험도 부족해 전체 중국선교단의 중임을 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유력한 4명 중에서도 카타네오는 ‘마카오사건’(1606)으로 중국 황위(皇位)를 빼앗고자 한 서양인으로 낙인찍혀 부적당했다. 디아스[老]는 예수회 내의 지위와 명망으로 볼 때 중국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고 과연 1609년 마카오로 되돌아갔다. 결국 롱고바르디와 판토하로 압축된다. 그러나 리치가 판토하를 배제하고 롱고바르디를 선임하게 된 것은 스페인을 둘러싼 국제형세와 국적요소가 중요하게 작용했다. 스페인의 ‘무력적 그리스도교화 정책’이 중국선교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차단해야 했고, 포르투갈의 선교 관할권(Padroado) 아래서 이탈리아인과 포르투갈인이 절대다수인 재화 선교사 비율상 스페인인 판토하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 논거로 장카이[張鎧]의 분석이 신뢰할 만하다. 첫째, 리치는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를 고려했다. 스페인의 필리핀 주재 식민당국과 교회는 줄곧 무력으로 중국을 공격해 그리스도교화 추진을 획책하고 있었다. 뿐더러 스페인의 식민지 개척자들은 1603년에 필리핀에 거주하는 2만여 중국인을 학살해 중국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리치는 스페인의 식민당국과 교회 세력의 대화(對華)정책이 중국선교단의 미래를 직접적으로 위태롭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중국전교단의 총책임자 선임은 필리핀의 스페인인과 관련된 사람은 적절하지 않았다. 둘째, 민족주의가 팽배한 동방선교 상황에서 스페인과 포르투갈 두 국가의 교회는 심각하게 대립했다. 이탈리아 선교사들은 감정상 포르투갈 측에 기울었다. 또한 포르투갈의 ‘선교 관할권’의 규정에 따라 이탈리아 선교사들은 포르투갈 국왕에게 충성할 의무가 있었다. 당시 재화 선교사 대부분이 포르투갈과 이탈리아 국적이었고 유일한 스페인 국적의 판토하가 이들을 통솔하기란 큰 어려움이 있었다.16)

 

이렇게 볼 때 리치가 최종적으로 롱고바르디를 선택한 데는 자신의 선교 프로그램을 포함한 여러 요소의 ‘균형성’을 염두에 둔 필연적 결정임을 알 수 있다. 리치는 일찍부터 “롱고바르디의 출중한 기층전교능력, 아직 그 자신이 발전시키지 못한 민중전교방법을 확인했고, 그에게 기대어 좌우 두 다리를 완비해 새로 생긴 교회를 지탱하고자 한 것이다.”17)

 

롱고바르디 역시 리치와의 역방향에서 균형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는 1598년 11월 4일 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논변한다. “장인(匠人)의 파견 외에도 총회장 신부에게 보낸 편지(10월 18일)에서 적은 바와 같이 우리는 매우 많은 ‘서적’과 ‘성상’(聖像, Sacred Image)이 필요하다. 중국인이 대단히 탄복할 만한 책들은 우리에 대한 그들의 존경심을 더욱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전교에도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리즘이나 기타 비슷한 물건들의 새로운 과학기물(器物)을 진상품으로 삼아 황제를 알현해 자유선교를 구하는 것 외에 우리의 신앙 범위에 속하는 서적과 성상 역시 매우 중요하다. 이 서적과 성상을 통해 중국인과 교제하고 우리들의 신성한 신앙을 그들에게 알릴 수 있다.”18)

 

이처럼 롱고바르디는 ‘기물교섭’과 ‘지식선교’의 유효성을 결코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리치가 입안한 적응책략의 요소들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고 갈 것인가가 문제였다. 이것은 이후 리치노선이 안고 있는 ‘단일적 방법’의 경직성을 깨뜨리고 ‘복수적 방법’을 제시해 ‘복음화의 본연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관철되었다. 이 사유방식은 그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공격과 오해를 받게 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기존연구는 주로 ‘리치와의 단절성’에 초점을 맞추어 롱고바르디가 리치의 지식선교를 반대하고 조롱했다고 인식한다.

 

이러한 부정적 시각은 예수회원 다니엘로 바르톨리(Daniello Bartoli)가 최초로 주입했다고 한다. 그리고 후대 연구자들도 그 뒤를 따랐다. 바르톨리에 의하면 “롱고바르디는 리치를 겁쟁이에다 자신감 없고 혹은 적어도 지나치게 조심스런 인물로 생각했으며 수학을 통해서 관료를 얻으려는 리치의 노력을 비웃고 조롱했다. 후에 리치와 친했던 관료들이 아니었으면 자신의 열정 때문에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이 줄줄이 추방당할 뻔한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고 나서야 교훈을 얻고 현명해졌다. 그리고 그릇된 영감에서 비롯된 고집을 버리고 리치가 그려놓은 길을 충실하게 따라갔다.”19)

 

이 음울한 논조는 어떤 가치설정으로 고착화되어 최근까지도 무비판적으로 수용되고 있다. 비근한 예로 “선교활동 중에 롱고바르디도 부득불 프리즘 등과 같은 유럽물품의 도움을 받았지만 유럽의 과학지식을 중국인에게 소개해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제고시키는 측면에서는 시종 리치와 판토하만큼 그렇게 중시하지 않았다. … ‘난징교안’(敎案)(1616∼1621) 뒤에야 그는 실패 속에서 교훈을 총괄해 만약 과학방면에서 공적이 없고 단지 그리스도교 교의의 선전에만 의지한다면 선교사들이 중국의 상층사회에 적응하기란 몹시 힘들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20)

 

일반적으로 ‘난징교안’은 후리치시대 롱고바르디가 적응노선을 이탈해 발생시킨 대표적인 가톨릭 박해사례로 거론된다. 이 사건은 롱고바르디노선의 악영향이 서양선교사와 중국유생(儒生)의 관계를 불안하게 만들어 초래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사오저우의 경험을 무리하게 베이징에까지 확대한 것은 시기상 노선의 유효성 범위에서 벗어난 실수임에는 틀림없다. 그렇다고 이것이 ‘리치와의 단절성’을 정당화해줄 수는 없다. 더욱이 바르톨리류의 편파적 관점들은 리치의 후임결정이 결국 ‘불찰’이 빚은 결과라는 논거의 취약성을 드러낸다. 시행착오는 선교진행상 리치도 경험한 것으로 “롱고바르디가 상황을 지나치게 낙관한 점만은 두 사람의 유일한 차이점일 것이다.”21)

 

롱고바르디는 당대 중국선교사업의 성과가 대부분 리치의 공로임을 부정하지 않았다. 예수회 조지 듄(George H. Dunne) 신부는 바르톨리의 오류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롱고바르디가 중국에서 가장 초기에 보낸 편지 중에서 ‘유리 프리즘과 그 비슷한 물건들’을 선교도구로서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 무심코 언급한 대목에서 그의 조소를 읽어낸다면 모를까 예수회 문서보관소에 보관된 롱고바르디의 편지 어디에서도 그런 태도는 보이지 않는다. 소송을 하기에는 증거의 실체가 없는 형국이다. 아마도 바르톨리는 중국선교에서 독립적 지위를 구축하려는 롱고바르디의 시도에 격렬하게 반발하며 그를 헐뜯는 투서를 로마에 퍼부어댔던 마카오의 예수회 보고서를 접하고서 그에 대한 선입견을 갖게 된 듯싶다.”22)

 

더불어 롱고바르디가 난징교안의 발생 이후에야 리치의 지식선교를 재인식했다는 관점 역시 역사사실이 아닌 그릇된 정보임을 기억해야 한다. 후리치시대 학술선교의 계승은 난징교안 이전부터 롱고바르디시대의 개막과 동시에 시작되었다. 롱고바르디는 높은 과학적 안목과 소양을 갖추었음은 물론 지적(知的) 선교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깊이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예수회 중국선교회의 총책임을 맡은 직후부터 리치의 방침을 계승해 학술선교를 전교사업의 흥망을 결정하는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동료 신부들에게 한문 학습에 매진하고 중화전적(典籍)을 깊이 연구하도록 거듭 주문하는가 하면, 중국 사대부들과 협력해 유럽서적을 번역하고 유럽의 과학문화를 전파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1613년 리즈짜오가 조정에 《청역서양역법등소》(請譯西洋曆法等疏)를 올려 서양과학서적의 전면 번역을 청원한 것은 롱고바르디의 방침에 호응한 대표적 사례다. 당대 쉬안우먼[宣武門]에 위치한 예수회 본부는 동서양 문화교류의 중심지였다. 중국 측에서는 쉬광치, 리즈짜오, 쑨위안화(孫元化, 1581~1632) 등이, 그리고 서양 측에서는 롱고바르디, 판토하, 우르시스 등이 참여했다. 롱고바르디의 지도 아래 이들의 협력은 아주 빠르게 큰 성과를 냈다. 《간평의설》(簡平儀說), 《만국지해전도》(萬國地海全圖), 《일구도설》(日晷圖說), 《태서수법》(泰西水法), 《동문산지전편》(同文算指前編), 《표도설》(表度說), 《천문략》(天問略) 등 대량의 한문과학역저(譯著)가 연이어 세상에 나왔다. 동시에 측천(測天), 망원(望遠), 급수(汲水), 기중(起重), 굴착 등의 수많은 측정기나 기계장치를 제작했고 일반인들에게도 이를 공개해 널리 보급했다.23)

 

이런 점에서 롱고바르디는 동서양 문화교류를 기획하고 참여한 중추적인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의 적극적인 ‘학술선교방침’으로 인해 선교사들에 대한 신망이 크게 높아졌고 사회적 영향력이 갈수록 확대되어 신도수도 급증했다.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1613년 예수회도서관에 필요한 대량의 과학서적을 수집하기 위해 트리고를 유럽에 파견했다. 중국 각지의 예수회 회원마다 도서관을 열어 영성선교와 균형을 맞춰 지적 선교를 펼칠 계획이었다. 이 외에도 트리고에게 주어진 핵심임무는 로마 교황청에 중국전교구의 독립문제와 그에 합당한 인력, 자금 제공을 타진하고, 아울러 리치의 《예수회와 그리스도교의 중국 진출》을 라틴어로 번역해 유럽에 출판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트리고는 1613년 2월 마카오에서 출발해 1614년 10월 로마에 도착했다. 1615년 2월 21일, 예수회 총장 클라우디오 아콰비바(Claudio Aquaviva, 1543~1615)가 작고하고 무티오 비텔레스치(Mutio Vitelleschi, 1562~1645)가 새로운 총장이 되었다. 트리고는 로마에 있는 동안 신임 총장에게 50개의 요청사항을 제출했다. 그 속에는 신부들이 중국에서 미사나 종교의례를 거행할 때 탈모의 불필요와 중국언어 사용 등을 허가해달라는 요구가 들어 있었다. 이것은 중국을 떠나기 전에 롱고바르디가 트리고에게 서면으로 지시한 것이었다.24) 그리고 트리고는 1615년 리치의 이탈리어 저작 《예수회와 그리스도교의 중국 진출》을 라틴어로 번역해 《중국에서의 그리스도교 선교》(De Christiana Expeditione apud Sinas)라는 서명으로 출판했다.

 

1619년 7월, 트리고는 급기야 롱고바르디가 지시한 세 임무를 완수하고 마카오에 도착했다. 무엇보다도 교황의 지원을 받아 서양서적 7,000여 책을 가지고 온 사실은 동아시아의 서학사(西學史)에 큰 업적으로 기록된다. 이 서적들은 이후 여러 경로를 통해 수차례에 걸쳐 분할되어 마카오에서 중국내륙으로 운송되었다. 그 가운데 상당량이 동아시아 공동문어인 ‘한문’으로 옮겨져 가톨릭 ‘학술선교’의 원천이 되었다. 이 역사사건은 중국의 과학기술, 역사, 지리, 도서관 등 여러 영역에서 발전을 제고시켰다. 이를테면 서구의 선진적인 과학기술이론은 말할 것도 없고 서양의 종교, 문학, 역사, 지리와 같은 인문지식, 또한 서양책의 정교하고 아름다운 인쇄와 장식, 서양선교사들이 계획한 도서관 등은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 동아시아인들의 시야를 넓혀주었다.25)

 

더군다나 7,000부의 서서(西書)수집은 ‘가톨릭선교사 동아시아학’ 발전에 큰 동력을 제공해주었다. ‘천학 - 서학’은 예수회 ‘학술선교’의 자각적 산물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서학’ 개념의 공식적 제안과 공개적 전파, 특히 선교사들에게 종교적 형상으로 자리 잡고 명명된 때는 대략 1610년대 중후반부터 시작해서 1620년대 초반까지로 이해된다.26) 그런데 이 시기가 롱고바르디의 총회장직 재임기간(1610~1622)과 일치하는 것은 역사상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줄리오 알레니(Giulio Aleni, 艾儒略, 1582~1649)의 《서학범》(西學凡, 1623)은 당시 롱고바르디가 입안한 대규모의 ‘역서(譯書)계획’을 설명해주는 대표적인 문헌 중의 하나다.

 

롱고바르디의 서서수집과 역서기획은 6과로 대별되는 서구교육(학술)규범에 따른 체계적인 사업이었다. 알레니는 《서학범》에서 그 대강(凡)을 ① 수사학(文科 = 勒鐸理加, Rhetorica), ② 철학(理科 = 斐錄所費亞, Philosophia), ③ 의학(醫科 = 默第濟納, Medicina), ④ 법학(法科 = 勒義斯, Leges), ⑤ 교회법학(敎科 = 加諾搦斯, Canones), ⑥ 신학(道科 = 陡祿日亞, Theologia)이라고 소개한다. 알레니는 모든 학문은 ‘철학’을 기초로 삼아야만 깊이가 있고 정통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특히 토미즘(Thomism)의 전통에 따라 철학과 신학을 불가분의 관계로 파악했다. 참고로 여기서 ‘철학’은 논리학(落日加, Logica), 자연과학(費西加, Physica), 형이상학(默達費西加, Metaphysica), 기하학(馬得馬第加, Mathematica : 산술[算法], 기하학[量法], 음악[律呂], 천문학[曆法], 윤리학(厄第加, Ethica)으로 세분화된다.27)

 

알레니는 이 《서학범》의 마지막 부분에서 “여행자(트리고)가 구만리 멀리서 왔다. 앞서 소개한 유럽학문체계[六科]에 맞춰 동지들과 한문[華言]으로 번역하고자 한다. 십수년이면 순서대로 번역해낼 수 있다.”28)고 명시하고 있다. 양팅쥔(楊廷筠, 1557~1627)은 이 일을 트리고가 반입한 서양책과 결부시켜 “이른바 6과의 서적이 대략 7,000여 부나 되지만 이미 바다를 건너와 갖추어져 번역되고 있다.”29)고 덧붙인다. 그도 그럴 것이 롱고바르디는 베이징 전교구의 책임자(1623~1640)로 있으면서 이 서적들을 저본으로 하는 한문역저사업을 주관했다. 《직방외기》(職方外紀), 《원경설》(遠鏡)說, 《원서기기도설록최》(遠西奇器圖說錄最), 《측천약설》(測天約說), 《천학초함》(天學初函), 《측량전의》(測量全義), 《할원팔선》(割圓八線), 《영언여작》(靈言蠡勺), 《환우시말》(寰宇始末), 《명리탐》(名理探), 《수신서학》(修身西學), 《인신도설》(人身圖說), 《숭정역서》(崇禎曆書), 《지진해》, 《공제격치》(空際格致) 등은 모두 이때 나온 책들이다.30)

 

이처럼 롱고바르디시대 서양책 7,000부의 중국전래와 그 한역(漢譯)사업은 동서교류사에 있어 서학동점(西學東漸)을 촉진시키는 중요한 역사사건으로 기록된다. 뿐더러 롱고바르디 개인이 수행한 역할도 적지 않았다. 요한 테렌츠 슈레크(Johann Terrenz Schreck, 鄧玉函, 1576~1630), 자크 로(Jacques Rho, 羅雅各, 1593~1638)와 함께 《인신도설》을 공역했는가 하면, 비록 중도에 그쳤지만 《숭정역서》의 편찬사업(1631~1634)에도 직접 참여했다. 또한 과학분야 단독 저술로는 《지진해》가 돋보인다. 1626년 6월 28일 산시[山西] 링추[靈丘]에 대지진이 일어났고[丙寅京師邊地大震] 베이징에도 영향을 미쳤다. 롱고바르디는 이 시기에 리즈짜오의 요청으로 이 책을 썼다. 이 저작은 중국역사상 서양의 ‘지진지식’을 처음 소개한 것이자 한문으로 된 첫 번째의 지진에 관한 전문서로 널리 알려져 있다.

 

더 큰 의미로 롱고바르디는 서양의 ‘지진지식’을 동아시아에 전해준 최초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지진해》라는 과학서는 주로 서양 중세 후기 과학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현대 지진학의 과학성에는 미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지진학 영역상 동서양의 첫 교류와 융합이 일구어낸 결실로서 명말 이래 이 분야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최근 중국에서는 이 《지진해》와 관련된 롱고바르디의 과학적 공헌을 재평가하려는 노력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어 고무적이다.31) 이 제반 사항들을 고려해볼 때 그가 ‘과학(학술)선교’에 회의적이었다거나, 더군다나 이것이 보수노선으로 선회하는 요인이었다는 관점은 재고되어야 한다. 조지 듄이 “롱고바르디 역시 지적 선교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지 않았다.”32)고 단언한 뜻이 여기에 있다.

 

 

III. 선교신학 : 반리치적 균형

 

선교사로서 마태오 리치가 추구한 목표는 후대 신부들에게 길을 열어주고 미래의 선교사업을 위해 기반을 닦는 데 있었다. 특히 1601년부터 1610년 사망할 때까지 베이징에서 활동한 10년간은 그의 선교인생에서 가장 풍성한 수확기였다. 리치는 자신이 개발한 ‘선교 프로그램’의 발전을 위해서 생애 최후까지 혼신의 힘을 쏟았다. 그는 매일 대부분의 시간을 손님을 접대하거나 학술서적을 찬하는 데 썼다. 가령 한문저작 가운데 《기인십편》(畸人十篇), 《이십오언》(二十五言), 《기하원본》(幾何原本), 《재지》(齋旨), 《환용교의》(圜容較義), 《변학유독》(辯學遺牘) 등은 이 단계에서 완성된 것들이다.

 

트리고는 “리치 신부가 황도 베이징에서 사는 동안 하느님이 내리신 영예를 누렸고 중국인에게 깊은 사랑을 받았다. 이 영예는 얼마나 크고 뜻깊은 것인가! 이 천부적으로 총명하고 지혜로우면서 외국인을 ‘오랑캐’로 여기는 민족 속에서 리치 신부가 받은 명망은 보통사람들은 상상할 수도 없고 더욱이 바랄 수도 없는 일이다.”33)라고 보고한다. 실제로도 ‘동아시아의 인문주의’를 표방하는 리치의 적응주의 프로그램은 베이징을 중심으로 사방에 뻗어나가면서 이중의 목표를 달성했다. 지식층 전반에 걸쳐 서서히 확산되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영향력은 사회의 완만한 변화에 적절한 분위기 조성과 개종운동의 확산으로 이어질 길을 닦고 있었다. 동시에 아직은 깊이 뿌리박지 못한 교회를 박해와 붕괴의 위험으로부터 막아줄 힘을 지닌 수많은 중국인 친구들이 성(省)마다 생겨나고 있었다.34)

 

니콜라 롱고바르디는 1610년 예수회 중국선교구의 총회장직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내륙에서 45년간 선교활동을 펼쳤고 무엇보다도 민간선교의 영향은 극히 컸다. 그리고 이 평민영성선교는 리치의 상층지식노선 기반 위에서 만개할 수 있었다. 정작 롱고바르디 자신도 “직접선교가 거의 전적으로 리치의 간접선교에 힘입은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35) 그는 리치의 업무를 인계받고 1610년 11월 23일 로마 예수회 총장 클라우디오 아콰비바(Claudio Aquaviva, 1543~1615년) 신부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 “리치 신부가 선종하고 나니 우리는 고아나 다름없게 되었다. 리치 신부가 생존했을 때 그의 권위와 명망은 우리들의 바람막이였고 보호날개였다. 리치 신부가 지금도 하늘에서 우리를 더욱 많이 도와주기를 기원한다.”36)라고 적고 있다. 이 고백은 5년 전 알레산드로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 范禮安, 1539~1606)의 선종을 지켜보면서 리치가 “가장 큰 아픔은 중국전교구의 아버지 발리냐노 신부의 죽음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고아가 되었다.”37)고 한 말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롱고바르디는 리치에 대해 “교회사업의 충실한 후계자였지만 또한 신학노선의 단호한 반대자”38)라는 이중성을 갖는다. 예수회 ‘선교신학 - 천학’의 분화는 그리스도교 ‘복음’과 유교오리엔트 ‘문화’ 간의 선교학적 모순성이 기폭제가 되었다. 리치가 양자의 ‘연속성’에 무게를 두어 ‘상층지식선교 방침’을 채택했다면 롱고바르디는 ‘불연속성’에 치중해 ‘평민영성선교방침’을 취한 것이다. 이를테면 리치는 복음의 장력(tension)을 문화에 투영시켜 ‘연속성 - 선유(先儒) 똘레랑스(tolérance, 관용)’, ‘불연속성 - 후유(後儒) 앵똘레랑스(intolérance, 불관용)’라는 후고박금(厚古薄今)을 내세웠다. 반면에 롱고바르디는 문화에 대한 복음의 불연속성을 견지, 리치의 ‘후유 - 앵똘레랑스’를 계승 · 확장해 고금(古今)부정을 관철시켰다.

 

익히 알다시피 리치의 ‘보유론’(補儒論, The Accommodation of Christianity to Confucianism)은 원시유학(儒家, Confucianism)의 상제(上帝), 귀신(鬼神)을 각각 데우스(Deus), 영혼(Anima, 亞尼瑪)으로 파악하고 고대 상제 · 귀신론으로 정주학(程朱學)의 리(理) · 기(氣) 개념을 비판하는 구조로 축성되었다. 리치는 원시유학의 종교성은 긍정한 반면에 신유학(理學, Neo-Confucianism)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원시유가의 ‘천’(天), ‘상제’ 관념에서는 그리스도교적 ‘신’ 개념을 발견할 수 있지만 신유학의 ‘리’는 실체(自立者, substantia)가 아니라 속성(依賴者, accidens)에 불과해 ‘신’ 관념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롱고바르디는 가톨릭 신앙이 유교와 양립할 수 있다는 리치의 입장에 반대했다. 그는 그리스도교 교리를 중국고전과 연관시키고 유교적 전통과는 완전히 이질적인 신학적 의미로 해석하려는 리치의 선교전략을 대단히 위험한 것으로 단정했다. 나아가 중국제례(祭禮)는 미신이고 선유든 후유든 하나같이 ‘신’을 모르는 무신론자들이라고 주장했다. 즉, 신유학의 ‘리’뿐만 아니라 고대 경전의 ‘천’, ‘상제’의 실체 역시도 가톨릭 데우스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총회장 취임 초기 천, 상제는 물론이고 ‘천주’까지 거부한 채 라틴어 음역인 ‘더우쓰’[陡斯]의 사용을 제안했다. 또한 리치가 일종의 사회적 의례라 여겨 묵인한 중국의 전통적인 경천(敬天), 제공(祭孔), 사조(祀祖) 전례의 허용방침을 모두 철회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 계율에 저촉되는 종교적 우상숭배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럼에도 이 제반 ‘역명 · 전례보수노선’의 철학적 논거는 사실상 리치의 ‘반이학(反理學)적 앵똘레랑스’에 연원한다. 롱고바르디는 신학논설을 펼 때 기본적으로 ‘리’ 개념에 대해 ‘속성’, ‘형상인(模者, formal cause)’으로 치부했던 리치의 ‘반이학 기조’를 계승했다. 더 나아가 ‘리’를 물질적 성격으로 격하시켜 스콜라철학의 ‘제일질료’(materia prima)로 파악했다. 따라서 롱고바르디의 ‘유교 앵똘레랑스’는 근원적으로 리치와 결이 같다. 예컨대 중세 스콜라적 입장에서 송명宋明 이학의 ‘태극(太極)−리’가 만물의 본원이 될 수 없다고 한 것이나, 본질상 영혼과 물질적인 ‘기 · 도체’(道體)는 상이하며 만물일체를 부인하는 등이 그것이다.

 

다만 리치와의 현격한 차이는 고대 유학에 대한 평가를 달리했다는 데 있다. 리치는 원시유학에 한정해서 ‘신’과 ‘정신’ 관념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반면에 롱고바르디는 중국인들에게는 무형적이고 비물질적인 존재에 대한 관념이 없어 신, 천사, 영혼이 알려지지 않았다고 인식했다. 따라서 원시유학이나 신유학을 막론하고 애초부터 ‘물질(질료)’과 구분되는 어떠한 ‘[정]신적 실체’도 부재함은 물론이다. 롱고바르디는 이러한 방식의 선교신학적 논증을 통해 유교문명에는 초자연적 신격(神格)이 내재한다는 리치의 비유론적 전제를 걷어내고 그 균열된 지형에 ‘순수복음의 영성적 선교신학’을 제시함으로써 예수회 중국전례논쟁의 도화선을 당긴 것이다.

 

예수회는 롱고바르디가 공론화한 이 ‘역명 · 전례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1627년 12월부터 1628년 1월까지 자딩[嘉定]에서 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는 중국의 가톨릭역사상 최초의 대표자 회의이자 동아시아역사상 동서양 문화교류의 국제학술심포지엄 격이었다. 개최된 장소는 상하이[上海] 자딩 거인(擧人) 쑨위안화의 집으로 지금의 러우탕[婁塘] ‘성베드로교회’(St. Peter’s Church, Loutang)다. 그리고 대표적인 참가자들로는 “11명의 예수회원, 즉 롱고바르디, 엠마누엘 디아스(Emmanuel Diaz junior, 陽瑪諾(少瑪諾), 1574~1659), 바뇨니, 트리고, 프란체스코 삼비아시(Francesco Sambiasi, 畢方濟, 1582~1649), 카타네오, 디아스(老, 李瑪諾), 알바로 데 세메도(Alvaro de Semedo, 曾德昭, 1585~1658), 페헤이라, 알레니, 히베이루였다.”39) 또한 여기에는 4명의 저명한 중국인 교도 쉬광치, 리즈짜오, 양팅쥔, 쑨위안화가 포함되었다.

 

명 천계(天啓) 8년(1628) 로마 교황청 대표는 베이징에서 간단한 조사를 마치고 리치의 견해대로 사조, 제공은 종교적 미신이 아니라고 결정했다. 다만 데우스의 호칭문제는 ‘천주’의 번역명을 유지하며 ‘천’, ‘상제’는 물론이고 음역인 ‘더우쓰’[陡斯]의 사용도 금지한다는 절충안을 내놓았다.40) 그리고 이 ‘자딩회의’에서 선교사들이 30년 동안 착용해온 유복(儒服)차림을 재차 승인했고 목회사업에서 보여준 그들의 용기와 인내, 아울러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새로운 중국교우들의 경건성을 거듭 표창했다.

 

롱고바르디는 기존의 선입견과는 달리 이 ‘자딩회의’의 결정에 대체로 유연한 입장을 취했다. 전례문제상 차이커푸의 다음 말을 우선적으로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롱고바르디는 제공, 제조(祭祖)의 금지를 지지해 회장직 승계 초에 한때 금령을 반포한 바 있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결코 ‘완고’한 선교방침으로 경도되지 않았고 변화된 상황에 맞게 탄력적으로 조정이 가능했다. 롱고바르디는 중국전례에 직면했을 때 실제로 아무런 어려움도 없었다. 그 개인의 ‘정태’적 이견은 어떤 ‘믿음’을 설명한 것에 더 가까웠지 ‘현실’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까닭에 예수회의 공통된 인식에서 이탈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 유동적인 현실태도는 그 자체가 두 노선 간의 ‘동태’적 균형을 고려했음을 나타낸다. 결국 그에게 ‘전례논쟁의 첫 번째 인물’이라는 라벨을 붙이는 것은 공허한 관점 속에서 ‘전례문제’의 역사실상을 무시하기 쉬운 처사다.”41)

 

‘역명문제’에 대한 입장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예수회 주류파가 1633년 재차 상제, 천을 허용하자 리치의 ‘상제’, 심지어 ‘천주’조차 거부하는 집착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즈음에 집필된 저작 《영혼도체설》(靈魂道體說, 1630~1638)에는 정작 ‘천주’라는 명칭이 채용되고 있다.42) 이러한 롱고바르디의 중도적 태도는 두 노선 간의 ‘동태적 균형’을 고려한 것임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역명 · 전례논쟁’과 관련해서 성급하게 그를 부정적인 인물로 낙인찍는 것은 역사적 실체와 괴리될 수 있다.

 

다만 상층노선은 양날의 칼과 같아서 제한적으로나마 유학자 공동체의 공감을 얻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선교사들의 종교적 정체성을 약화시킨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니만큼 “롱고바르디가 창끝을 돌려 자신을 신임한 리치를 공격했지만 그의 인품을 의심한 사람은 없었다. 논쟁은 순전히 교의를 위한 부득이한 것이었다.”43) 이 ‘반리치 기획’은 베이징에서 총회장직을 수행하기 훨씬 이전부터 사오저우 지방의 민간선교에서 대면한, 곧 유교지식인 교도들의 사변적인 ‘이성화된 신앙’과의 괴리감에서 유발되었다. 그리고 이후 산시[陝西], 항저우[杭州], 산둥[山東] 등지에서 시행한 영성신학적 평민선교체험은 리치의 선교신학과는 다른 방향의 순수복음의 ‘영적 투명성’(spiritual transparency)을 제고시키는 예수회 ‘보수주의 천학’으로 결실을 맺었다.

 

더욱이 중국가톨릭교회나 동서문화교류에 미친 영향으로 볼 때 롱고바르디의 동서양어 저역서는 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 1603)나 《중국에서의 그리스도교 선교》(De Christiana Expeditione apud Sinas, 1615, 트리고의 라틴어본) 등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롱고바르디의 서문(西文)저작 《중국종교의 몇 가지 사항에 관한 논문》(Traité sur quelques points de la religion des Chinois, Paris, 1701)은 유럽 계몽주의 지식인들에게 광범위한 반향을 일으켰다. 이 책은 “처음으로 유럽사상의 ‘형이상학’(Metaphysics) 방식을 취해 중국인의 신앙과 철학을 논한 것이자 서양 최초의 개념체계를 갖춘 유학, 유가, 유교 연구물”44)로 평가된다.

 

리치의 ‘적응주의 천학’이 ‘학술서적’ 형태로 개진되었다면 롱고바르디의 ‘보수주의 천학’은 ‘영성서적’ 위주로 구성되었다. 리치는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의 아퀴나스(Aquinas)주의에 근거해 신앙과 이성의 균형, 하느님 계시와 인류 경험의 융합을 강조했다. 그는 각기 상이한 민족역사상 형성된 지식, 전례, 풍속, 언어는 인성에 합치된 자연의 표현이자 세계 곳곳에 존재하는 하느님의 신비한 현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롱고바르디는 하느님은 고정된 형식으로 현현하므로 반드시 교회의 고유한 교의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선교수단은 십자가, 성상, 복음서의 ‘서교’(西敎)이지 ‘서학’(西學)이 아니었다.45)

 

동일한 맥락에서 롱고바르디의 신학(복음)보수적 ‘영성서적선교’는 리치의 위로부터의 상층선교노선과 연결되는 ‘평민선교노선’을 포괄한다. 당시 중국의 민간선교에는 사대부의 학자계층을 위한 사변적인 논리구성보다는 그들이 배척하는 합법적인 ‘종교성’이 요구되었다. 더불어 유럽신부들이 중국의 하층민들에게 환영받고 신뢰를 얻으려면 기존 불교, 도교 등의 토착신앙을 능가하는 종교적 기능을 제시함으로써 그리스도교가 중국인의 생활경험에 부합되는 완전한 종교임을 증명해야 했다. 이 때문에 롱고바르디의 천학, 곧 한문저작은 가톨릭 기도문이나 의례 등을 직접 기술하는 대부분 종교서적임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롱고바르디는 간단한 서한이나 종교 경전과 성경 문구의 역본이 주가 되는 20종의 글을 남겼다.46) 이 저작들은 재화 선교사업 발전에 크게 기여했음은 물론이다. 그가 견지한 중국선교책략은 “서적과 성상을 통해 중국인들에게 신성한 신앙을 알리고자 했다. 중국의 신도들이 가톨릭 교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솔선해서 한문으로 된 여러 초급교본을 출판했다.”47) 베이징에서 회장직을 승계하고 가장 먼저 시행한 것 역시도 지금도 전범이 되고 있는 세례용어를 편찬한 일이다.48)

 

또한 중국 신자들의 기도서인 《천주성교일과》(天主聖敎日課, 또는 《수진일과》(袖珍日課))를 편역한 치적이 크다. 명 만력 30년(1602)년 초판본이 사오저우에서 나왔고 재화 그리스도교 교리의 대중 보급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리치는 롱고바르디가 사오저우에서 이 책을 집필하게 된 최초의 상황을, “수요가 급박한 관계로 신부에게 한문을 가르쳐주는 교우의 도움을 받아 책을 몇 권 써서 교우들의 환영을 받았다. … 이 책은 주로 루이스 데 그라나다(Luis de Granada) 수사의 저작에서 취했는데 교우들이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었다.”49)라고 전한다. 이후 이 문헌은 명 숭정(崇禎) 11년본(1638), 청 건륭(乾隆) 20년(1755) 개제(改題)된 《총독휘요》(總牘彙要)에 나타난다. 그 뒤로도 중각본이 수차례 간행되었다. 이들 경문은 쉬광치, 리즈짜오 여러 사람들이 초역했고 증삭되는 과정에서 계속 늘어나 롱고바르디의 사후에 추가된 것들이 많다.50)

 

롱고바르디의 단독 한문저서에는 ‘종교서적선교’의 일환으로 집필된 《사설》(死說), 《염주묵상규정》(念珠黙想規程), 《성인도문》(聖人禱文), 《성모덕서도문》(聖母德敍禱文), 《급구사의》(急救事宜), 《성약슬법행실》(聖若瑟法行實), 《상장경서》(喪葬經書) 등이 전해진다. 이 저술들은 모두 1602년 사오저우에서 판각된 것인데 순수 종교적 교리, 계율, 의식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리치는 이 영성서적들을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선교신학상 자신의 적응노선을 배척하는 급진적 관점들을 포착했는지는 의문이다. 여하튼 롱고바르디의 한문저술들은 대체로 동시대의 재화 예수회원 리치, 판토하, 알레니, 삼비아시 등에 비해서 수준과 깊이가 떨어진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51) 그러나 이것은 롱고바르디의 ‘천학’이 기층대중과 동행하는 투박한 ‘영성선교’의 실천적 산물임을 간과한 데서 비롯된 편견으로 재검토와 수정이 필요하다.

 

그건 그렇고 롱고바르디의 단독 한문저술 가운데 유교 앵똘레랑스의 신학논설로는 《사설》을 포함해서 《영혼도체설》, 《답객난십조》(答客難十條)를 꼽을 수 있다. 《사설》은 예수회원의 인생관을 나타낸 것으로 해골이 죽음을 상징하는 뜻 등을 설명했고, 《영혼도체설》은 신유학의 도체설을 반박하면서 가톨릭 교의 중 신체와 영혼, 인류와 동물의 구별, 성삼합일(聖三合一)의 의미를 밝히고 있다. 이 저작 역시도 “영수(靈修)문자로 이루어진 것인데 롱고바르디가 당시의 재화 예수회원 가운데 확실히 별종이었음을 보여준다.”52) 그리고 《답객난십조》는 중국 학인의 의문에 대한 신학적 변증을 통해 정주이학을 비판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문헌은 현재 유실되어 남아 있지 않다.

 

롱고바르디는 1610년에서 1622년까지 예수회 중국선교구의 책임자를 맡았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1616∼1621년 난징 예부시랑(禮部侍郞) 선췌[沈榷]가 주도한 난징교안으로 인해 일시 산시(陝西, 1619), 항저우(1621) 등지로 피신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이 가톨릭 박해사건이 진정되자 1622년 상경, 총회장직에서 물러나 1623년부터 1640년까지 예수회 중국선교구 베이징지구의 책임자로 있었다. 이렇게 강등된 데는 나이가 많아 민첩하지 못한 탓도 있었겠지만 더 분명한 것은 그 자신이 기획한 서양서적 7,000부의 한문역저사업과 평민선교에 전념하고자 한 뜻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물론 일각에서 거론하는, 롱고바르디 그 자신이 “각지 농촌을 다니면서 기층교구의 개척에 투신해 많은 민교(民敎)분쟁을 야기한 것”53)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공개적 광장선교, 영성적 민간교화, 평민의 조직화 선교, 유교제례문화 불허 등의 일련의 급진적 비적응(보수)노선은 과도하게 중국문화와의 이질성을 노출시켜 가톨릭 전교사업을 제약하고 풍파를 일으키는 주요원인이 되었다. 그래서 난징교안은 롱고바르디의 보수적 교무주관이 명 문인들의 반감을 고조시켜 초래한 직접적 결과라고 말해지는 것이다. 실제로도 선췌가 추방상소 《참원이소》(參遠夷疎)에서 서양선교사들이 “조상제사는 필요없고 오로지 천주를 떠받들기만 하면 천당에 오르고 지옥을 면할 수 있다.”54)는 말로 “백성들을 현혹시킨다.”55)고 공격한 것은 롱고바르디의 선교실책을 명시해준다.

 

그러나 투명한 그리스도교 신앙이 뿌리 내리는 것이 참된 토착화라면 롱고바르디노선은 진정한 ‘적응책략’임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롱고바르디는 1636년(숭정 9년) 이전에는 경내(京內)에서 전교하는 시간이 많았지만 이후에는 병행하여 경외(京外)의 새로운 전교구 개척에 투신했다.56) 매년 몇 주씩 혹은 수개월 동안 산둥의 지난[濟南], 타이안[泰安], 칭저우[靑州] 등지를 다니면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어떤 때는 산둥지역에서 승려, 관리를 포함해 500인을 입교시킨 적도 있었다. 심지어 선교활동이 안정적일 때는 2개월 사이에 무려 세례자가 800명에 달했다. 롱고바르디는 팔순 전후까지 늘 도보로 다녔다. 그 뒤로 고령으로 긴 여정의 피로를 더는 감당하지 못하게 되자 말을 탔다.57) 그러던 중 1654년(청 順治 11년) 9월 1일 99세를 일기로 베이징에서 생을 마친다. 별세소식이 전해지자 중국의 온 전교구가 큰 충격과 비통에 잠겼다.

 

롱고바르디는 임종 시 예수의 《수난기》(Passio)를 낭독케 하고 흐느끼며 “죽음에 임박해 내 주의 사난(死難)을 듣게 되니 나는 행복하다.”58)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 비장하고도 고결한 인품은 리치가 임종고해를 하면서 보여준 순결무구하고 신이 동반한 영혼에서 울려오는 유쾌한 모습59)과 운명처럼 겹친다. 롱고바르디가 일관되게 견지한 신앙은 혼합주의(syncretism)로부터 분리된 ‘그리스도교성’ 그 자체였다. 그는 문화 밖에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수호라는 평생의 신념을 지키며 단 한 차례도 유럽에 귀환하지 않은 채 장장 58년 동안 ‘중화복음’에 헌신했다. 청조 순치제(順治帝)는 “평소 그의 인품을 흠모했고” 선종하자 “장례비용으로 은(銀) 300량을 하사하고 관리를 파견해 추도하고 초상화를 그려 궁중에 걸게 했다.”60)고 한다.

 

 

Ⅳ. 끝맺는 말

 

중국의 무수한 지역에서 지식인과 평민의 정신적 요구는 다양한 격차와 단열이 존재한다. 따라서 리치와 롱고바르디 두 노선의 ‘동태적 균형’ 속에서만 전체 제국에 대한 ‘복음화 사업’은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다. 롱고바르디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리치의 ‘우회(간접)선교’가 여러 시행착오를 통해 정형화된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직접선교’ 역시 경험사실을 바탕으로 확립되었기 때문이다. 문화의 벽을 뚫고 그토록 도달하고자 했던 지난한 목표! 리치는 죽음을 앞두고 “나는 신부들을 이미 성공의 문턱까지 인도했지만 앞에는 아직도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61)라고 고백한다. 그가 보기에 ‘롱고바르디 노선’에는 정작 선교학 본연의 ‘그리스도교성’이 내재했다. 실행하기에는 여전히 위험하지만 그래도 포기될 수 없는 ‘순수복음화’가 그것이다.

 

물론 예수회 후리치시대 난징교안, 전례논쟁의 유발요인은 롱고바르디가 유학을 향해 가톨릭 종교적 요구를 직접적으로 드러낸 것과 무연하지 않다. 더구나 성상에 의지하고 하층민의 복음화에 중점을 두면서 예수회 적응주의에 첨예하게 맞선 도미니코회(Dominican Order), 프란치스코회(Franciscan Order) 등과의 선교선상의 유사성은 롱고바르디를 선교회 간 전례논쟁의 중심에 위치시켰다. 롱고바르디는 이들 선교회에 ‘반리치적 논거’를 제공해주었고 유럽적 대결구도를 가중시켰다. 유럽에서의 전례논쟁은 중국내 양극적인 논쟁에서 나타난 접근방식상의 근본적인 차이를 극대화했으며 종국에는 중국선교의 동력을 소진시키는 결과를 불러왔다.

 

그러나 최소한 예수회 내 리치의 유명(遺命)을 받은 롱고바르디로 한정해보면 문화에 대한 ‘복음의 순결성’에 치중해 리치노선과의 ‘균형’을 모색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리고 비적응주의 행보는 ‘순수교의’적 차원에서 실행되었고 이후의 선교회 간, 문명권 간 정치적이고 징고이즘(jingoism)적인 대결은 그의 본의에서 벗어난 별개의 문제다. 롱고바르디노선은 선교학적 선판단(Vorurteil)이나 배타적 절대주의의 소산이 아닌 선교지의 치열한 현실적 경험에서 결정화된 것이다. 그러니만큼 다른 선교회와 출발점이 다르다. 이런 사실들이 예수회 ‘평민영성선교’의 재발견, 아울러 두 노선을 양단하는 기존연구의 비판적 교정을 요망하는 것이다.

 

더욱이 롱고바르디에게 간직된 숭고한 그리스도교적 삶의 역사초상은 ‘적응주의의 본연성’을 재성찰케 한다. 그는 동아시아의 성직자로서 맑고 순백한 인격의 소유자였다. 항상 자신을 채찍하고 빈궁의 계율을 지키며 몸가짐은 청결했다. 가령 산둥 전교구 개척시기에 그곳에서의 생활은 너무도 열악했다. 신부의 양식은 익히지 않은 좁쌀과 풀뿌리가 전부였고 소금, 기름이나 양념거리도 없었다. 그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영양이 없는 음식을 먹고도 재기(齋期)를 엄수했고 조금도 불평을 입에 담지 않았다. 자신에게는 엄격했지만 늘 다른 사람에게는 관대하고 온화해 ‘중국교우’들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았다.62) 롱고바르디는 로욜라의 이냐시오(Ignatius de Loyola, 1491~1556)가 지도하는 예수회의 ‘영수(靈修)적 토착화’(공감화), 곧 복음적 완덕과 박애주의 삶의 표본이었다. 그런 면에서 조지 듄은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노고로 점철된 그의 경이로운 삶은 헌신이라는 한편의 서사시였다.”63)라고 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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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 Richard Niebuhr, Christ and Culture, New York : Harper Torchbooks, 1951 ; 리처드 니버, 홍병룡 옮김, 《그리스도와 문화》,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15, 84 · 123쪽.

 

2) 余三樂, 〈來華耶稣會士龍華民事迹〉, 《韶關學院學報》(社會科學) 33-9, 2012, 5쪽.

3) 張鎧, 《龐迪我與中國 : 耶稣會‘適應’策略硏究》, 鄭州 : 大象出版社, 2009, 180쪽.

4) 柴可輔, 〈晩明耶敎“民間布道”之考察 : 龍華民路線的新定位〉, 《文史哲》 6(總第351期), 2015, 122쪽.

 

5) Matteo Ricci, Fonti Ricciane: documenti originali concernenti Matteo Ricci e la storia delle prime relazioni tra l’Europa e la Cina(1579~1615), edite e commentate da Pasquale M. D’Elia, Roma : La libreria dello Stato, 1942~1949 ; (意) 利瑪竇(Matteo Ricci), 文铮譯 · (意) 梅歐金(Eugenio Menegon) 校, 《耶稣会與天主教进入中国史》, 北京 : 商务印书馆, 2017, 479쪽.

 

6) (意) 利瑪竇(Matteo Ricci), 같은 책, 481쪽 참조.

7) (意) 利瑪竇(Matteo Ricci), 같은 책, 473쪽.

 

8) 롱고바르디가 난징에 체류했다는 역사사실은 《리치원전》(Fonti Ricciane)[델리아 판본 / 원정(文铮)의 중문본]의 “1609년 5월말 - 10월 21일” 선교기록 중 “롱고바르디 신부는 난징 전도소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라는 내용을 통해 확인한 것이다. (意) 利瑪竇(Matteo Ricci), 같은 책, 471쪽.

 

9) (意) 利瑪竇(Matteo Ricci), 같은 책, 485쪽 ; 羅光, 《利瑪竇傳》, 臺北 : 光啓出版社, 1960, 231쪽 각각 참조.

10) (意) 利瑪竇(Matteo Ricci), 같은 책, 505쪽.

11) (意) 利瑪竇(Matteo Ricci), 何高濟 · 王遵仲 · 李申 譯, 《利瑪竇中國札記》, 北京 : 中華書局, 2001, 681쪽.

 

12) George H. Dunne, Generation Of Giants : The Story Of The Jesuits In China In The Last Decades Of The Ming Dynasty, Notre Dame :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1962 ; 조지 듄, 문성자 · 이기면 역, 《거인의 시대 : 명말 중국 예수회 이야기》,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6, 140쪽 참조.

 

13) (意) 利瑪竇(Matteo Ricci), 《耶稣会與天主教进入中国史》, 478쪽.

14) 李天纲, 〈龙华民对中国宗教本质的论述及其影响〉, 《学术月刊》 49, 2017, 167~168쪽 참조.

15) 柴可輔, 앞의 글, 122쪽.

16) 張鎧, 앞의 책, 176쪽 참조.

17) 李天纲, 앞의 글, 168쪽.

 

18) Matteo Ricci, Opere storiche del P. Matteo Ricci S. I.(Le Lettere dalla Cina, 1580~1610), vol. Ⅱ, Edite a cura dal P. Pietro Tacchi Venturi S. I., Macerata: Giorgetti, 1913 ; (意) 利瑪竇(Matteo Ricci), 羅漁 譯, 《利瑪竇全集 4 : 利瑪竇書信集(下)》, 臺北 : 光啓出版社(輔仁大學出版社), 1986, 522쪽.

 

19) Daniello Bartoli, Del’istoria della Compagnia di Gesù, La Cina. Terza parte dell’Asia, Ⅲ, Ancona : Giuseppe Aureli, 1841, p. 233 ; 조지 듄, 앞의 책, 181~182쪽에서 재인용.

 

20) 張鎧, 앞의 책, 180쪽.

21) 조지 듄, 앞의 책, 184쪽.

22) 조지 듄, 앞의 책, 182쪽.

23) 季宗, 〈西方地震知識首傳者龍華民〉, 《中國減灾》 7, 2009, 42쪽 참조.

 

24) Edmond Lamalle, S. J., “La propagande du P. Nicolas Trigault en faveur des missions de Chine (1616)”, Archivum Historicum Societatis Iesu, Romae : Institutum Scriptorum de Historia S. I., 1940, 9 : 49~120 참조. ; 李文潮, 〈龙华民及其《论中国宗教的几个问题》〉, 《国际汉学》 第二十五輯, 2014, 64쪽에서 재인용.

 

25) 毛瑞方, 〈明淸之際七千部西書入華及其影響〉, 《文史雜志》 3(總第123期), 2006, 4~8쪽 참조. 트리고의 7,000부 서책은 이후 수차례의 재난을 겪었지만 최종적으로는 대부분 새로운 베이탕[北堂]의 유명한 장서가 되었다. 1958년, 베이징도서관이 베이탕의 책들을 접수한 뒤에는 제대로 점검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베이징도서관이 1978년 쯔주위안[紫竹院]신관으로 이전하고서야 이 귀중한 역사유산은 최상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26) 黃興濤, 〈明淸之際西學的再認識〉, 《明淸之際西學文本 : 50種重要文獻彙編》 第一冊, 北京 : 中華書局, 2013, 4쪽 참조.

 

27) (意) 艾儒略(Giulio Aleni), 〈西學凡〉, 《明淸之際西學文本 : 50種重要文獻彙編》第一冊, 北京 : 中華書局, 2013, 229~240쪽 참조.

 

28) “旅人九萬里遠來, 願將以前諸論與同志繙以華言. 試假十數年之功, 當可次第譯出.” (意) 艾儒略(Giulio Aleni), 〈西學凡〉, 240쪽.

29) “所稱六科經籍, 約略七千餘部, 業已航海而來, 具在可譯.” (意) 艾儒略(Giulio Aleni), 〈西學凡〉, “刻西學凡序”(楊廷筠), 231쪽.

30) 季宗, 앞의 글, 42쪽 참조.

 

31) (意) 龍華民(Nicolas Longobardi), 〈地震解〉, 《明淸之際西學文本 : 50種重要文獻彙編》 第三冊, 北京 : 中華書局, 2013, 1105~1112쪽 참조. 《지진해》는 문답체 형식으로 집필되었는데 지진의 원인, 등급, 지형, 소리 등 모두 9절로 구성되었다. 명 천계 6년(1626)에 간행되었고 청강희(康熙) 18년(1679)에 중간되었다. 이 분야의 연구물로는 刘昭民, 〈最早传入中国的西方地震学知识〉, 《廣西民族大学学报》(自然科学版) 13-4, 2007 ; 黃興濤, 〈西方地震知識在華早期傳播 與中國現代地震學的興起》〉, 《中國人民大學學報》 5, 2008 ; 徐光宜, 〈明淸西方地震知識入華新探》〉, 《中國科技史雜誌》 33-4, 2012 등을 각각 참고하기 바란다.

 

32) 조지 듄, 앞의 책, 183쪽.

33) (意) 利瑪竇(Matteo Ricci), 《耶稣会與天主教进入中国史》, 477쪽.

34) 조지 듄, 앞의 책, 152쪽 참조.

35) 조지 듄, 같은 책, 182쪽.

36) (意) 利瑪竇(Matteo Ricci), 《利瑪竇全集 4 : 利瑪竇書信集(下)》, 543쪽.

37) (意) 利瑪竇(Matteo Ricci), 《利瑪竇全集 4 : 利瑪竇書信集(下)》, 319쪽.

38) 李天纲, 앞의 글, 166쪽.

39) 徐宗澤, 《中國天主敎傳敎史槪論》, 北京 : 商務印書館, 2015, 223쪽.

 

40) 전홍석, 〈가톨릭선교사 동아시아학에 관한 비교문화학적 고찰 : 천학의 성립과 분화 배경을 중심으로〉, 《동서철학연구》 85, 한국동서철학회, 2017, 330~331쪽 참조.

 

41) 柴可輔, 앞의 글, 123~124쪽.

 

42) (意) 龍華民(Nicolas Longobardi), 〈靈魂道體說〉, 《明淸之際西學文本 : 50種重要文獻彙編》 第一冊, 北京 : 中華書局, 2013, 437~446쪽 참조.

 

43) 李天纲, 앞의 글, 166쪽.

44) 李天纲, 같은 글, 166쪽.

45) 李天纲, 같은 글, 168쪽 참조.

 

46) Louis Pfister, Notices biographiques et bibliographiques sur les Jésuites de l’ancienne mission de Chine, 1552~1773, La Mission Catholique, 1932 · 1934. (法) 費賴之(Louis Pfister), 馮承鈞 譯, 《在華耶稣會士列傳及書目》 上冊, 北京 : 中華書局, 1995, 68~71쪽 참조.

 

47) 張鎧, 앞의 책, 174쪽.

48) (法) 費賴之(Louis Pfister), 《在華耶稣會士列傳及書目》 上冊, 65쪽 참조.

49) (意) 利瑪竇(Matteo Ricci), 《耶稣会與天主教进入中国史》, 329쪽.

50) 方豪, 《中國天主敎史人物傳》, 北京 : 宗敎文化出版社, 2011, 69쪽 참조.

51) 夏伯嘉, 〈天主敎與明末社會 : 崇禎朝龍華民山東傳敎的幾個問題〉, 《歷史硏究》 2, 2009, 52쪽 참조.

52) 李天纲, 앞의 글, 168쪽.

53) 李天纲, 위와 같음.

 

54) “祖宗不必祭祀. 但尊奉天主, 可以昇天堂, 免地獄.” 沈榷, 〈參遠夷疎〉, 《聖朝破邪集》[(明) 徐昌治 編, 和刻本中國古逸書叢刊(金程宇 編) 32] 卷一, 鳳凰出版社, 2012, 44쪽.

 

55) “誑惑小民.” 沈榷, 위의 글, 44쪽.

56) 方豪, 앞의 책, 69쪽 참조.

 

57) (法) 費賴之(Louis Pfister), 앞의 책, 66~68쪽 참조. 산둥개교(開敎)는 쉬광치와 관계가 있다. 그의 손자 중 한 사람이 지난부(府)에 있었고 롱고바르디의 방문을 요청했다. 롱고바르디는 1636년 지난에 가서 쉬광치의 손자에게 고해성사를 베풀었으며 그로 인해 관리 몇 사람이 입교했다. 이를 계기로 타이안, 칭저우 등의 산둥개교가 이루어졌다. 徐宗澤, 앞의 책, 215쪽 참조.

 

58) (法) 費賴之(Louis Pfister), 앞의 책, 68쪽.

59) (意) 利瑪竇(Matteo Ricci), 《耶稣会與天主教进入中国史》, 479쪽 참조.

60) Adrien Greslon, Histoire de la Chine sous la domination des Tartares, Paris : Henault, 1671, pp. 13~14.

61) (意) 利瑪竇(Matteo Ricci), 《耶稣会與天主教进入中国史》, 480쪽.

62) (法) 費賴之(Louis Pfister), 앞의 책, 68쪽 참조.

63) 조지 듄, 앞의 책, 180쪽.

 

* 이 논문은 2017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17S1A5B5A07059956).

 

[교회사 연구 제52집, 2018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전홍석(원광대 HK+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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