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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봉헌, 완전한 사랑: 마리아와 마르타는 함께 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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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6-23 ㅣ No.528

[봉헌 - 완전한 사랑] 마리아와 마르타는 함께 가야



교회의 품속에는 수많은 수도 공동체가 각자의 카리스마를 뽐내며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를 위해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수도회들의 바탕에는 모두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이자 ‘그리스도를 닮는다’고 하는 근본 소명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수도회가 같은 방식으로 따르고 닮는 것은 아닙니다. ‘각자 고유한 방식’으로 그분을 따르고 닮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다른 수도회와 차별화되는 그 수도회만의 고유한 카리스마 또는 고유한 영성입니다.

통상 수도회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관상 수도회’와 ‘활동 수도회’입니다. 각 수도회는 자신만의 독특한 관상적 또는 활동적 모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런 그들의 고유한 모습을 인정하고 장려함으로써 신자들이 천상 생명과 성덕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도록 배려합니다.


신비체의 보석인 관상 수도자들

특히 교회는 관상 수도회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며 그리스도의 신비체 안에서 소중한 몫을 담당하고 있음을 인정합니다.

“오로지 관상에 전념하는 남자 또는 여자들로 구성된 수도단체들은 교회의 자랑이자 천상 은총의 근원입니다. 이 수도단체의 회원들은 그들의 생활과 사명을 통하여 산 위에서 기도하시는 그리스도를 본받고, 역사에 대한 하느님의 주권을 증언하며, 다가올 영광을 선취합니다”(「봉헌생활」, 8항).

어떤 이는 ‘복음의 가치를 바탕으로 세상을 변혁하고 소외된 수많은 사람을 위해 해야 할 일이 차고 넘쳤는데도 대체 봉쇄된 담 안에 숨어서 무위도식이 웬 말인가?’ 하면서, 관상 수도회의 무용론을 제기하곤 합니다.

그러나 전 세계 주교님들은 1997년 수도생활을 주제로 교황님과 더불어 세계주교대의원회의(시노드)를 하셨고, 오랜 숙고의 결실로 정리한 문헌 「봉헌생활」을 통해 관상 수도자들의 소중함을 재천명하셨습니다.

그 가르침에 따르면, 관상 수도자들은 고독과 침묵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 예배에 참여하며, 개인의 수덕, 기도, 극기, 형제애의 친교 안에서 자신들의 생활 전체와 모든 활동을 하느님에 대한 관상으로 향하게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교회 공동체 앞에서 주님에 대한 교회의 사랑을 독특하게 증언하며, 눈에 드러나지 않는 사도적 결실을 통해 하느님 백성의 성장에 내적으로 공헌합니다. 그래서 시노드에 참석한 모든 주교님은 여러 형태의 관상생활이 계속 성장하도록 독려하셨습니다.

특히, 관상생활은 그리스도교의 수덕생활과 신비주의 전통이 갖는 심오한 가치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며 염두에 두신 원대한 계획, 곧 당신과 더불어 사랑의 친교를 나누고 삼위일체의 충만한 생명에 참여하게 하는 것입니다.

관상생활은 그리스도교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영원한 가치를 이미 이 현세에서부터 앞당겨 사는 가운데 강력하게 하느님을 증언하는 예언자적 삶의 형태입니다. 그러므로 관상 수도회는 그리스도의 신비체 안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보석과도 같습니다.


주님의 전사인 활동 수도자들

교회 전체의 영적인 건강, 그리고 교회가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인류 구원의 사명을 세상 안에서 구현하려면, 교회와 세상에서 다양한 형태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하느님 나라의 실제적인 건설을 위해 투신하는 활동 수도회가 있어야 합니다.

어떤 이는 수도생활에서 ‘관상적 차원’만 강조하며 활동을 관상보다 수준이 낮은 것으로, 그래서 마치 활동 수도회가 관상 수도회보다 질이 떨어지는 것으로 착각하곤 합니다. 이것 또한 잘못된 편견입니다. 예수님께서 베타니아의 라자로 집을 방문하셨을 때, 곁에서 주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말씀에 귀기울이던 마리아만 있었다면, 주님을 위해 씻을 물이며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활동 수도회의 수도자들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를 치유하며 죄인들을 용서하고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던 예수님의 모습을 닮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이에 대해 「봉헌생활」 9항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서방교회는 또한 수세기에 걸쳐 수도생활의 여러 가지 다양한 표현들을 알고 있습니다.

무수한 사람이 세속을 버리고, 그들 각자의 은사에 따라, 안정된 형태의 공동생활 안에서, 하느님 백성에게 여러 가지 형태의 사도적 봉사를 하고자 복음 권고의 공적 서원을 통하여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율수(律修) 수도회, 탁발 수도회, 성직 수도회의 여러 수족(修族)들이 생겨났으며, 일반적으로 말해서 남녀 수도회들이 사도직과 선교활동에 그리고 그리스도교적 사랑에 따른 수많은 활동에 헌신해 왔습니다.”

이런 다양한 활동 수도회 또는 사도직 수도회는 하느님께서 남녀 창립자들에게 부어주신 다양한 은혜들을 반영하는 훌륭하고 다채로운 증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그들이 성령의 활동에 마음을 열고 시대의 징표를 올바로 이해하는 가운데 새로운 요구에 지혜롭게 응답한 사람들이라 평가합니다.

역사상 많은 사람이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 자신의 삶에서 말과 행동으로 복음을 구현하고자 노력해 왔으며, 이를 통해 예수님의 현존을 시대마다 새롭게 전해주려고 힘써왔습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활동 수도회의 수도자들은 세상에서 실제로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위해 투신하는 주님의 전사(戰士)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파견되기 전 먼저 주님 곁에 머무른 제자들

수도자들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따라야 할 모범은 예수님께 처음 제자로 부름 받은 열두 제자 그룹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다음 그들을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도록 곧바로 파견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다”(마르 3,13-14).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신 다음, 파견하기 전에 먼저 그들을 당신 곁에 두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파견되어 선포하게 될 하느님 나라의 내용이 당신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파견되기 전에 먼저 예수님과 깊은 인격적인 친교를 나눔으로써 그분이 누구신지 깨달아야 합니다. 그들이 예수님 곁에 머무는 것은 파견되고자 하는 것이며, 파견되어 전하게 될 메시지는 그분 곁에 머무는 가운데 터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도생활에서 지향해야 할 관상과 활동이라는 가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수도자들은 이 세상에 파견되어 다양한 방식으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구현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먼저 선포해야 할 메시지의 핵심인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고 사랑해야 하며, 그분 곁에 머물러야 합니다.


함께 가야 하는 마리아와 마르타

통상 교회 안에서 수많은 수도회를 관상 수도회 또는 활동 수도회라는 범주로 구분합니다만, 필자는 수도회의 카리스마를 일반화해서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기준에 대해 거듭 숙고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수도생활은 기본적으로 영성생활을 심화하는 삶의 형태입니다. 개인적, 공동체적 차원에서 볼 때 영성생활이 관상과 활동 가운데 어느 한쪽으로만 지나치게 치우칠 때 영적 균형은 깨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 수도생활에서 관상과 활동 가운데 어느 한 가지만 지나치게 강조하고 다른 하나를 경시하게 되면, 영성생활의 불균형을 초래함으로써 왜곡된 수도생활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관상 수도회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을 이어받아 이 세상에서 실현할 과제를 받은 교회의 활동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면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또한 활동 수도회가 활동 이전에 먼저 그리스도를 관상하고 그분 곁에 머물며 사랑의 친교를 나누는 작업을 하지 않는다면, 모든 활동이 인간적인 수평적 차원에 머물 뿐 초월적인 차원으로 승화되지 못해 그 의미는 퇴색하고 말 것입니다.

「봉헌생활」 9항 또한 이 점을 다음과 같이 강조합니다.

“봉헌된 사람은 모든 시대에 끊임없이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이 되어야 하며, 그들의 삶 전체가 관상과 더불어 사도적 정신과 사도적 활동에 젖어들도록 기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마음의 일치를 심화시켜 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수도생활이 영성적으로 건강하게 성장하려면 관상적 차원과 활동적 차원이 늘 조화를 이루며 균형 있게 자라야 합니다.

관상 수도자들의 마음속에는 천상을 향한 거룩한 열정이 가득해야 하지만 그것이 결코 개인의 구원으로 왜곡되어서는 안 됩니다. 관상 수도자들은 그 누구보다도 세상의 구원과 성화를 위해 기도하고 시대의 징표를 읽는 가운데 그것을 기도의 중심에 놓아야 합니다.

그 반면, 활동 수도자들은 활동 이전에 먼저 주님 곁에 머물며 활동 속에서 선포하게 될 메시지, 곧 그리스도를 먼저 알고 깊이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많은 활동 속에서 중심을 잃지 않으려면 언제나 그 마음에 주님을 향한 원의를 지녀야 할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늘 함께해야 하듯, 수도생활에서 마리아(관상적 차원)와 마르타(활동적 차원)는 언제나 함께 가야 합니다.

* 윤주현 베네딕토 - 가르멜수도회 사제. 로마 테레시아눔에서 신학적 인간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스페인의 아빌라 신비신학대학원 교수를 지냈다. 현재 가르멜수도회 대구수도원 원장, 대전가톨릭대학교 교의신학 교수로 활동하며 다양한 저서와 역서를 펴내고 있다.

[경향잡지, 2015년 6월호, 윤주현 베네딕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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