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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신학ㅣ사회사목

[이주사목] 안산 갈릴래아 어린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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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12-10 ㅣ No.554

[달라도 우리, 다문화] 아가야, 조금만 더 기다려다오 - 안산 갈릴래아 어린이집

 

 

누구나 구들방 아랫목처럼 따뜻한 가정을 그리워하지만, 유년의 추억이 서늘한 윗목으로 남아있는 이들도 있다.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원곡1동 848-1번지, 빛바랜 벽화가 그려진 청와연립 라동 105호 ‘갈릴래아 어린이집’은, 이 시대 우리 사회에서 가장 보호받지 못하는 가정의 아이들이라 할 외국인 노동자의 자녀들(생후 1개월부터 36개월까지)을 인종과 국적, 종교를 따지지 않고 맡아 돌보아주는 곳이다.

 

 

따뜻한 유년의 아랫목으로

 

이즈음은 ‘3D’ 하면 입체영화부터 떠올리지만, 우리가 꺼려하는 더럽고 위험하고 어려운 일, 이른바 3D 업종을 마다않으며 이땅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있다.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들은,  대부분 생후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본국의 다른 가족에게 보내진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났지만 국적을 취득할 수 없어 국가로부터 의료보험은 물론 어떠한 보호와 혜택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산모는 슬픔에 젖을 겨를도 없이, 그동안의 비용을 충당할 생각으로 몸도 추스르기 전에 12시간 주야 맞교대 근무에 나선다. 그러고는 일을 하는 내내 그리움으로 모정에 울먹인다. 이들이 돈을 벌어 아이와 함께 귀국할 수 있을 때까지 아이를 맡아줄 곳이 절실하다. 30평 공간에 정원이 11명, 비록 작은 집이지만 갈릴래아 어린이집은 이들에게 따뜻한 유년의 아랫목이 된다.

 

다비드(카자흐스탄), 아미라(키르기스스탄), 아이삭(파키스탄), 네시(인도네시아), 아루카(몽골), 싸이(필리핀), 마이(베트남), 베리(필리핀), 다비드(러시아), 누리(파키스탄), 하니(필리핀), 하나같이 예쁜 11명의 아이들. “대개 월요일 아침 6시에 아이를 맡기고 토요일 저녁 6시에 데리러 오는데, 아이들이 신기하게 목요일쯤이면 부모를 기다려요.” 보육교사의 말이 자꾸 맴돌고 아이들이 눈에 밟혀 며칠 일손을 놓고 지냈다.

 

아이들이 솜처럼 포근하고 촛불처럼 따스한 가정에서 가족들과 함께할 날이 빨리 오기를 바라며 다시 마음을 추스른다. 챙겨보니 몇 장 안 찍은 사진이 죄다 흔들렸다. 잘못하여 셔터 속도를 느리게 맞춘 탓이다. 예쁘게 찍어달라던 보육교사에게는 무어라고 말할까? 부러 그랬다며 눙치기보다 그날 마음이 좀 흔들렸노라고 하면 이해해 줄까?

 

 

“돌아보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안산을 찾아가기 전 갈릴래아의 집 원년 멤버라고 할 최 요한 수녀(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부터 만났다. 5년여의 임기를 막 마치고 분원으로 돌아와 재수련을 준비하는 그이는, 그간의 경과와 어려움을 묻자 그냥 감사할 따름이라며 관계자와 은인들 이름을 적어주었다.

 

“말씀의 선교 수도회 유진 신부님과 노엘 신부님, 수원교구 이주사목위원회 최병조 신부님, 원곡성당 김승만 신부님, 안산시 외국인지원센터 보육지원담당과 박경혜 계장님, 송기헌 소아과와 라성약국.”

 

그러고는 “나도 유치원만 근 40년을 했는데 이렇게 어린 아이들과 지내기는 처음이었다.”며, 감격에 겨운 듯 그간의 세월을 들려주었다. 나중에 어린이집에서 건네받은 한 장의 연혁에는 그 과정이 몇 줄로 담담히 추려져 있었다.

 

“2003년 5월, 안산 원곡동 갈릴래아 외국인 노동자 사목센터 소장인 말씀의 선교수도회 유진 신부(필리핀)가 갈릴래아 아가방을 설립하다. 2006년 4월, 최 요한 수녀 갈릴래아 아가방에서 봉사하다. 2007년 3월, 아가방이 말씀의 선교 수도회에서 수원교구 이주사목센터로 이관되어 원곡본당에서 관할하다. 최 요한 수녀가 원장으로 임용되다. 2007년 5월, 시청으로부터 보육시설 인가가 나다.”

 

동족을 포함한 이주 노동자들의 아픔을 눈여겨본 한 필리핀인 사목자가 설립한 갈릴래아 아가방은, 2007년 초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문을 닫을 뻔한 위기에 처했지만, 교구와 본당, 수도회와 은인들의 협력과 지자체의 지원을 받으며 단순 보호시설에서 보육시설로, 안산 시화 지역 이주 노동자 가정의 작은 희망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처음엔 정말 힘들었지요. 2-3개월 된 아이들은 예방주사도 맞히고 병원을 자주 가야 하는데 보험은 안 되지 약값은 비싸지. 아이 입원비가 400만 원이라며 저한테 연락한 베트남 여성은 그래도 똑똑한 편이에요. 병원에 가서 사정사정해서 해결했죠. 도움 받을 길을 잘 몰라, 아이 입원비 때문에 빚을 지고, 주일에도 일을 하려고 본국으로 아이를 보내려다 브로커에게 수속비까지 떼인 여성도 있었거든요.”

 

18세에 한국에 와서 아이를 낳은 어린 엄마, 만 3년의 체류 기한을 넘겨 불법체류자가 되어 일용근로자 자리를 찾는 아빠, 갖가지 사정의 이주 노동자들이 아이를 맡기러 왔단다. 지금도 그렇지만 만 3세 이상 된 아이를 돌보는 시설은 많으나 젖먹이를 돌보는 곳은 없어 지원자가 많은데, 아이 한 명을 더 받으려면 교사를 더 써야 하기에 받아줄 수 없어 마음이 아팠단다.

 

“엄마아빠가 있는 아이는 그래도 괜찮지만 같이 살던 남자가 본국으로 가고 여자 혼자 남은 경우는 불쌍하지요. 주말에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 오면 월요일에는 아픈 아이들이 많아요. 부모가 사는 곳이 지하방이라 공기도 안 좋고. 그래도 짧은 기간에 열심히 돈을 모아 본국으로 돌아간 사람도 많아요.”

 

이런 현실을 보며 하느님을 원망할 때가 없었냐고 재차 묻자, 기적처럼 다 도와주시는 분이 계셔서 기쁘게 봉사했다며, 어린이집을 “가서 보라.”고 했다.

 

 

이집트로 피난 갔던 성가정처럼

 

지하철 4호선 안산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한 낡은 연립 1층. 갓 부임한 소장 이 라우렌시아 수녀와 잠시 쉬었다 다시 부임한 윤영신 데레사 원감, 2007-8년에 태어난 믿음반 아이들을 돌보는 김갑미 선생, 2009-10년에 태어난 사랑반 아이들을 돌보는 김은준 체칠리아 선생이 아이들과 함께 또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아이들 방 두 개, 사무실로 쓰는 방 하나, 주방을 겸한 작은 거실에 어른 넷에 아이 11명이 움직이니 공간이 너무 좁다. 젖먹이를 안고 얼르고, 그 와중에 영화배우같이 잘생긴 파키스탄의 아이삭이 장난감 공을 찬다. 눈부터 웃는 베트남의 마이는 수줍어하면서도 연방 방을 드나든다.

 

점심시간, 덩치 큰 러시아의 다비드가 밥숟가락을 두꺼비처럼 받아먹는다. 큰애들은 스스로 국에 밥을 말아먹더니 “치카치카하자!” 소리에 모여서 양치질을 한다.

 

낮잠시간, 몇몇이 보채더니 이내 잠이 든다. 무슨 꿈들을 꾸는 걸까? “엄마, 저 잘 놀고 잘 먹고 잘 자고 있어요. 걱정 말고 열심히 일하세요.” 하듯 웃음 짓는 아이 얼굴이 참 평화롭다.

 

한국전쟁 이후 가톨릭교회는 이땅의 고아들의 보육사업에 앞장섰고, 지금은 명문이라 인정받는 유치원도 여럿 운영하고 있다. 반세기가 지나, 이땅에는 고난의 땅 갈릴래아 사람들처럼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는 이들이 새로 생겨났다. 외국인 노동자들을 값싼 인력쯤으로 여기고 법을 내세워 그 자녀들의 어려운 사정을 외면한다면 주님은 뭐라고 하실까?

 

지금의 연립은 안산 원곡성당에서 도움을 주어 마련했지만 좀 더 시설을 늘려야 하는데 여력이 없고, 시에서 자동차를 지원해 주겠다고 해도 운영비가 없어 거절할 수 밖에 없었단다. 아기 예수를 데리고 이집트에서 사신 마리아와 요셉은 누구의 도움을 받았을까? 이땅에 와있는 또 다른 성가정, 외국인 노동자와 그들의 자녀들에게 따뜻한 유년의 추억을 만들어줄 손길이 늘어나기를 빈다.

 

도와주실 분 : ☎ 031-492-8410 신협 131-006-071556 갈릴래아 어린이집

 

[경향잡지, 2010년 10월호, 배봉한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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