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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수도자에게 기도와 가난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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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6-16 ㅣ No.526

[증언, 한국교회의 과제] 수도자에게 기도와 가난이란 무엇인가



기도와 가난, 이 두 개의 단어가 수도자의 삶을 대변한다. 기도는 예수님과의 만남을 내면화하고, 하느님께서 우리 자신을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마음으로 깨달아가는 행복한 걸음걸이다.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의 삶 안에서 놀라운 일을 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기도이다. 그리고 이런 행복한 깨달음을 철저히 사는 삶의 양식이 바로 가난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방한 중에 수도 공동체와 만났을 때의 메시지와 지난해 ‘봉헌생활의 해’를 시작하면서 발표하신 메시지를 되새기며, 한국교회에서 수도자의 참모습을 찾아보고자 기도와 가난에 대하여 정리해 본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모든 교회에 “변방으로 나아가십시오.”라고 힘차게 외치셨다. 교황님은 방한 중 수도 공동체와의 만남에서 “우리 자신에게서 벗어나고” 또 “우리 자신에게서 나가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게다가 “여러분 자신만을 위하여 봉헌생활을 간직하지 말고 사랑받는 이 나라 곳곳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가서 봉헌생활을 나누십시오.”라고 강력히 권고하셨다.

이런 교황님의 말씀을 삶에서 실천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쇄신해야 한다. 쇄신은 익숙한 모든 것에서 벗어나, 오직 하느님만 믿고 차가운 들판으로 나아가는 삶을 의미한다.


수도자가 있는 곳에 기쁨이 있어야

기도의 형식은 다양하다. 하지만 아무리 그 형식이 다양할지라도, 기도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느님께서 우리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애절한 마음으로 깨달아야 한다. 기도는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이가 나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깨닫고, 하느님의 사랑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기도를 통해 지금까지 자신의 삶 속에 하느님께서 어떻게 생생히 살아계시는지 하느님 사랑의 흔적을 느끼는 것이다. 수도 공동체는 하느님께서 공동체 구성원 각자에게 살아 움직이신다는 것을 분별 있게 알아차려 이 시대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올바르게 파악하는 것이다.

이런 하느님의 역동성을 깨닫고 그 뜻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 스스로 불확실성과 새로운 모험에 내맡기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 앞에 보여주신 모험과 불확실성은, 안주하려는 우리의 모습에서 벗어나라는 계속된 초대이다. 익숙한 옛 사람, 눕고 싶은 자신을 벗어던지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이며 우리가 나아갈 지금의 현실이다.

진정 우리 수도자들은 애절한 기도를 드리며 결단하고 있는가? 정해진 기도 시간에 습관적으로 시간을 채우듯, 의무감 때문에 기도서를 손에 드는 것은 아닌가? 하느님의 새로운 부르심에 합당한 응답과 기도를 드리고 있는가? 이런저런 이유로 자신을 합리화하는 기도를 드리고 제 방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은 것은 아닌가? 내 안에 너무 큰 내가 있게 되면 어떤 일이 생길지 우리는 잘 안다.

때때로 나 자신마저 사랑하지 못하고, 공동체의 동료를 사랑하기보다 그들을 경쟁 상대로 삼아 스스로 미움을 불러일으킨다. 내 안에 하느님께서 머무르실 곳이 없게 된다.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의 다름과 차이를 받아들이고 인정하기보다 비판과 험담의 소용돌이 속에 자신을 그냥 버려둔다. 공동체도, 그런 비난하는 구성원들이 많아지게 되면, 자신의 공동체를 다른 공동체와 경쟁 상대로 이해하고, 세속적 승리에 현혹되어 경쟁에서 이기려고 다른 이들을 내쳐버리고 짓밟는다. 그러면 수도자들은 이제 시무룩하고, 불평과 불만족에 익숙해져 더욱더 골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게 된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봉헌생활의 해 메시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도자가 있는 곳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행복으로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보여주도록 요청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복을 어떤 다른 것에서 찾지 말아야 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진정한 형제애를 발견하면 우리의 기쁨은 증가할 것이고, 교회와 가정, 젊은이와 노인, 그리고 가난한 사람을 향해 우리의 사랑과 전적인 자기희생을 평생 전해드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기도는 형식과 습관화가 아니라, 이웃에 대한 애절함과 간절함이 있어야 한다. 애절함은 하느님의 관점에서 자신과 공동체를 바라볼 수 있는 통찰력을 말한다. 개인과 공동체가 이런 모습으로 쇄신되어 기도의 힘을 발휘한다면 놀라운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자비 체험은 우리를 나의 것, 우리 공동체의 것에 집중된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게 하고, 낯설지만 희망이 넘치는 새로운 삶의 양식으로 나아가게 한다. 이것이 바로 가난의 실천이다.


가난한 마음으로 이웃과 세상에 손을 내미는 수도자

수도자는 청빈서원을 통해서 평생 가난하게 살겠다고 약속한 이들이다. 수도자의 가난은 두 가지 영역으로 볼 때, 첫째는 물질적으로 가난하게 사는 것이다. 둘째는 영적으로 가난하게 사는 것이다. 영적인 가난이란 바로 겸손이다.

수도자는 개인적으로든 공동체로든 가난하게 살도록 초대된 사람이다. ‘기쁜 마음으로 가난하게 살아가는가? 아니면 의무로 살아가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

의무로 마지못해 살아가는 가난은 가식적인 모습을 지닐 수밖에 없다. 물질에 대한 갈망, 더 좋은 것을 갖고자 하는 열망 등이 언제나 내면에 똬리를 틀고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다른 이들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게 한다. 더 심하게 되면, 도움을 청하는 처지인데도, 아주 당연하게 요구하는 경우도 생기게 된다.

가난하게 사는 수도자가 의식하지 못하고 쉽게 실수하는 모습 하나가 바로 받는 것에 너무 익숙해진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보다는 오히려 그들에게도 우리에게 있는 무언가 나눌 수 있다는 여유와 아량이 필요하다. 이 나눔은 물질적인 나눔일 수도 있고, 자신들의 시간과 열정을 나누는 것일 수도 있다.

수도회 공동체의 가난도 살펴본다. 수도회라는 울타리를 만들어 자신들의 안정과 안전을 위해, 안락함을 우선으로 삶의 양식을 택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봐야 한다. 이런 안락한 삶의 양식이 세상 사람들에게 예언자의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방해될 만큼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숙고할 필요가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수도자들에게 “세상을 잠에서 깨우기”를 요청하셨다. 이 요청은 수도자들의 삶이 예언자의 모습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매력을 느끼게 하라는 의미이다. 수도자의 존재 자체가 세상에 메시지를 던지는, 사랑의 매력 덩어리가 되기를 원하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수도자들이 살아가는 삶의 양식을 용기 있게 검토하고, 변방에 있는 세상의 가난에 동참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어떤 삶의 양식을 택하고 살아가셨는지,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다. 이런저런 해석은 하지 말자. 예수님의 삶의 양식으로 우리가 살아가기에는 두려움과 한계를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예언자 역할을 하려면 다른 길은 없다.

수도자의 영적인 가난은 무엇일까? 영성이 빈약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 반대로 영성으로 충만하여 우리 이웃과 세상에 겸손한 마음으로 손을 내미는 수도자가 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사제들에게 성직자 계급에 머물지 말고, 사목자가 되어 가난한 이를 위로하는 사람이 되라고 하신 이유를 알 것 같다. 수도자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라고 본다. 특히 한국교회에서 수도자는 어떤 위계에 속한 사람처럼 특권의식을 가지고 있다. 만일 그런 수도자가 한국교회 안에서 힘없는 이들에게 위안과 위로를 주는 예언자나 봉사자로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면, 한국사회에서 수도생활은 그 생명의 빛을 잃어버릴 것이다.

수도회 또한 세속적 기준에서 보는 성공이나 양과 수로 표시되는 효율성에 의존하고 있는 면이 많다. 이런 태도는 경쟁과 이기심에 휩싸인 기관으로 이 세상에 비칠 수 있다. 수도회의 성공적인 모습을 위해 다른 이들과 다른 수도회와 협업을 하지 않고 자신의 것만을 내세우는 모습이, 드물기는 하지만 사도직 현장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자기 수도회만 살아남으려고, 목적보다는 수단을 우선으로 하거나, 자신의 수도회가 우월하다는 자만심에 빠지는 실수를 볼 때도 있다.


기도와 가난은 사랑을 실천하는 행동이다

기도와 가난이 절실히 필요하다. 기도와 가난은 이념이 아니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이념의 노예가 되어, 그것이 목적이 되는 경우가 있다. 기도와 가난은 사랑을 실천하는 행동이다. 이는 세상의 누룩이 되어 세상을 풍성하게 만드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수도자가 이런 모습으로 변화될 때, 수도자는 세상과 수도자가 되려는 젊은이에게 빛을 발할 수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봉헌생활의 해 메시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봉헌생활은 훌륭한 성소 프로그램의 결과로 번창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만나는 젊은이들이 먼저 우리에게서 매력을 발견해야 하고 그들이 우리가 행복한 사람이라고 이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의 수도자는 진솔한 기도와 가난으로 예언자의 삶을 살도록 부름 받고 있다. 수도자들은 사회현실에 민감하게 대응하고, 현실을 분별 있게 해석하여 행동으로 그리스도를 증언해야 한다. 늘 기도하고 가난한 수도자가 되도록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일깨우고 계신다.

이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애절한 기도와 겸손한 모습이다. 세상이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 큰 것과 위대한 계획 같은 ? 새장 안에 갇혀서는 안 된다. 아주 작은 것, 미소한 것 안에서 하느님의 무한한 지평을 볼 수 있는 사랑의 위대함이 필요하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복음에 따라 살아가고,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여러분들의 모범적인 삶에” 봉헌생활의 사도직 효과가 달려있다고 강조하셨다. 수도자 각자가 이런 모습으로 쇄신할 수 있도록, 우리가 모두 용기를 가지고 봄날 햇볕 가득한 변방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새장에서 나오기를 희망한다.

* 제병영 가브리엘 - 예수회 신부. 1994년 사제품을 받고 서강대학교 상임이사, 캄보디아 예수회 미션 한국관구장 대리를 지냈으며, 현재 서강대학교 국제문화교육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 「쿵짝짝! 세 박자 왈츠의 명수, J」, 번역서로 「교황 프란치스코 어록 303」, 「교황 프란치스코 그는 누구인가」, 「세상의 매듭을 푸는 교황 프란치스코」를 냈다.

[경향잡지, 2015년 6월호, 제병영 가브리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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