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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문화영성 산책: 진정한 자기노출을 위한 고해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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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8-10 ㅣ No.866

[문화영성 산책] 진정한 자기노출을 위한 고해성사


고해성사는 쌍방향 커뮤니케이션



1. 고민과 괴로움을 털어놓아야 편하다

어느 늦은 밤 사제관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주임신부는 귀찮게 하는 전화가 많아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화를 받았다. 자살하려는 신자가 마지막 희망을 걸고 한 전화였다. 설득 끝에 자살을 멈추게 할 수 있었다. 만약 그 신부가 귀찮다고 전화를 받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자살했을 것이다.

종교사회학적 조사 결과에 따르면, 자살을 생각하는 개신교 신자들의 대부분은 목회자를 찾아 상담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고 혼자 고민하며 괴로워하다가 자살을 결행하는 특징을 지닌다고 한다. 이런 결과를 두고 모 개신교 신학자는 “가톨릭의 고해성사는 자살예방에도 큰 효과가 있다.”고 말하며 “자신이 겪는 고민과 갈등, 시련과 아픔을 함께 나누는 ‘자기노출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자기노출 커뮤니케이션’이란 자기 자신의 신상에 관한 기술이나 감정 혹은 생각을 남에게 전달하는 커뮤니케이션을 일컫는다. 자신의 경험이나 정서를 말이나 글로 표현하여 상대방에게 자신에 대해 알게 하거나 보여 주기 때문에 심리적 · 신체적 건강 모두를 증진시키는 긍정적인 효과를 낸다. 이런 면에서 가톨릭의 7성사 중 하나인 고해성사는 일종의 자기노출 커뮤니케이션인 셈이다.


2. 영혼의 치유이며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하는 고해성사

고해성사는 죄를 지은 신자가 밀폐된 고백소에 들어가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사제에게 자신의 죄를 숨김없이 고백하여 상처 입은 영혼을 치유 받고,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체험하는 화해의 성사다. 이러한 죄의 고백은 심리적으로나 영적으로 큰 도움이 된다. 고해할 때 비밀스런 짐을 덜어내어 내적 해방감을 얻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에게 은총과 사랑을 받고 있음을 깨닫는다. 많은 이들이 고해성사 때 눈물을 흘리는 것은 하느님이 자기를 받아들이고 용서해 주셨다는 기쁨과 위안 때문이다.

그러나 고해성사를 보는 신자는 자기노출 정도에 따라 심리적 해방감과 내적 치유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다시 말해, 고해성사 자체로서 사효성(事效性)은 인정되지만 인효성(人效性)에 차이가 존재할 수 있다. 사제에게 죄 고백을 부끄러워하여 솔직하지 못하거나 양심성찰 없이 그대로 고백소에 들어와 의무적으로 고백하고 나서, “이 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에 대해서도 통회하오니”라는 구절에 자신의 죄를 감추어 버린다면 고해성사를 통한 하느님의 은총은 반쪽짜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자기노출은 고백자 편에서만이 아닌 고해사제의 태도 여부에 따라 노출 정도가 좌우되기에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기도 하다. 고백 중에 신자가 고해사제에게 큰 소리로 야단을 맞고 냉담했다는 이야기도 들리는데, 자기노출을 기피하게 만든 극단적인 사례라고 하겠다. 대부분의 고해사제는 고백자가 진실하고 솔직하게 자기노출을 완전히 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주려고 애쓴다. 이때 고려하게 되는 중요한 사항은, 고백자 개개인의 상황, 즉 나이, 성, 교육정도, 사회적 위상, 건강상태, 지역, 시간, 결혼 여부 등의 너무나 다양한 변수가 있으며, 이 상황을 순간적으로 간파하여 그에 적절한 소통의 환경을 조성하는 매우 세밀한 작업이다.

예를 들어, 연세가 많으신 어르신들은 고백소에 들어와 무릎을 꿇을 때까지 기다려 주는 시간이 필요하고, 심한 고통과 절망 속에 있는 고백자에게는 스스로 고해를 할 수 있는 잠깐 동안 침묵의 시간을 허락해 준다. 만약 고해사제가 이를 참지 못해 빨리 고백하라고 윽박지른다면 고백자는 자기노출은커녕 실망 속에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릴 수도 있다. 아르스의 성자 비안네 신부나 오상의 비오 신부에게 엄청난 신자들이 고해성사를 하러 끊임없이 몰려들었던 이유는 진실성 있는 자기노출의 가능성을 그 성인들에게 보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고해성사로 자기노출을 하게끔 이끈 원동력은 바로 하느님과 일치된 성인들의 삶에 있다.


3. 자기노출로서의 고백

자기노출에는 수준이 있다. 처음 만났을 때 서로 나이와 같은 피상적 사항을, 그다음에는 종교관과 같은 개인적 가치관을, 그다음에는 함께 지내는 사람들에 대한 느낌이나 감정을, 마지막 단계에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느낌과 감정을 노출시킨다고 한다. 이런 수준을 따른다면 고해성사는 바로 마지막 단계에 해당된다. 결코 피상적이거나 남의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마음 상태를 드러내는 작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가장 흔한 고백은 주일미사를 빠졌다는 것이다. 외적이고 피상적이며 의무방어적 고백이다. 물론 주일미사를 하지 않은 것을 죄로 고백해야 하지만 대체로 자기 마음과 영혼에서 일어나는 죄스런 상태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그래서인지 요즘 신앙생활의 패턴이 내적인 삶에 관심을 두기보다 형식적 신앙행태에 만족하는 쪽으로 기울어지는 듯하다.

요즘에는 카카오톡이나 밴드과 같은 SNS가 일상화되어 있다. 개인 간 혹은 개인과 집단 간에 쉽게 연결과 소통이 되니 많은 사람들이 자기노출 수단으로 필수적으로 사용한다. 지인들과 언제 어디서든 쉽게 소통이 가능하고 필요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으며, 관계가 깊어지고 친밀해진다. SNS에 중독될 만큼 많은 사람들의 삶이 되어 버린 문화적 현상은 서로 간 소외되어 있고 감정적인 유대가 파괴되어 있는 개인주의적 사회에서 사람들은 더욱 타인에게서 자기 관심의 욕망을 극대화하려는 의도가 자리한다. 그러한 욕망이 SNS의 특성과 맞아떨어지면서 많은 이들이 적극적으로 자기노출을 시도한다. 하지만 너무 빈번한 메시지 세례로 자기 시간을 빼앗기게 되고 결과적으로 피로 후유증에 시달린다. 더 큰 문제는 개인 정보가 공개됨에 따라 사생활 침해라는 피해를 자신도 모르게 겪게 되는 폐단이 있다. 따라서 자기노출을 꺼리는 사람들은 SNS 사용을 자제하거나 아예 삭제하여 일상생활에서 멀리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자기노출의 대표적인 형태는 고백이다. ‘전통적 고백’은 자신의 비밀을 언어화하는 작업으로써 자신을 대상으로 하는 일기장, 아주 친한 소수 사람이나 종교 권위자와 함께 공유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의 고백’은 상상적 다수 독자에게 고백하는 형식을 띤다. 예를 들면, 자기 고백적 블로그를 만들기가 대중적 인기를 끄는 현상은 자기노출을 통해 고백하고 싶어 발버둥치는 대중의 심리를 드러낸다. 더군다나 사회 관계망이 더욱 촘촘히 역어질수록 인맥도 넓어져 빈번한 접속과 연결이 발생하지만 그럴수록 소외현상이 심화되는 것은 매우 역설적이다. 온라인이 매개가 된 고백에는 직접적 대면을 통한 고백의 진정성과 현장성을 찾을 수 없다. 아무리 디지털 시대지만 ‘아날로그적 고백’이 주는 묘미와 여백이 있다.


4. 아날로그적 자기노출로서의 고해성사

진정한 자기노출 종교 커뮤니케이션의 일종인 고해성사는 아날로그적 고백의 형태를 취한다. 가톨릭교회는 전화나 인터넷 등 미디어가 매개된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고해성사를 성사로 인정하지 않는다. 고해성사는 현장성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고백자는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고해신부를 직접 만나 고백을 하고 그 자리에서 사죄를 받는다. 고백하는 도중에 눈물과 애절함, 죄책감과 수치심, 평화와 안도, 기쁨과 감사 등의 느낌과 감정이 교차된다. 디지털 미디어에서 체험할 수 없는 자기노출이 직접적인 대면에서 다양하게 표출된다.

최근에 고해성사를 보는 신자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염려스런 소식이 들린다. 2014년 교세 통계조사를 보면 고해성사를 본 신자가 전년에 비하여 2.3% 줄어들었다고 한다. 매년 조금씩 줄어드는 추세다. 본당 신자들 중에는 고해성사가 부담스러워 기피하거나 냉담한다는 이야기도 자주 들린다. 반면 소외현상이 심화되면서 SNS에 의존도가 더욱 커지고, 심리상담이나 정신과 상담이 늘어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신자들이 고해성사를 많이 보게 해야 한다는 양적 관심사에만 초점을 맞추기보다 “어떻게 하면 신자들이 고해성사를 통해 자기노출을 잘 할 수 있게 해 줄까?”를 고민해야 한다.

교회는 성사생활이나 신앙심의 객관적 지표 중 하나로 고해성사 보는 신자 수에 의존해 왔다. 양적 지표에 따른 판단은 시대 변화에 따른 신자들의 의식과 태도 변화를 고려하지 않는 허점이 있다. 요즘 길거리나 시위현장, 또는 건물 안이나 쇼핑몰 등 언제 어디서나 CCTV라는 감시카메라에 노출되어 있고, 인터넷이나 휴대전화 역시 늘 감시의 대상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사생활을 침해당하는 ‘감사사회’에 살고 있고, ‘감시의 내면화’가 곧 권력행사의 수단이 되기 때문에 개인 정보 노출에 매우 민감하다. 교회는 왜 고해성사를 보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지를 개인적이고 내면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자기 정보 노출이 쉽지 않은 시대에 지금처럼 짧은 시간에 이루어지는 형식적인 고해성사는 신자들에게 진정한 역할을 할 수 없다. 최근 이를 보완하여 ‘상설 고해소’를 여러 군데 설치한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렇지만 본당에서도 자기노출을 꺼리는 신자들에게는 타 본당이나 특수사목 사제를 정기적으로 고해사제로 초청하거나 자기노출을 기꺼이 할 수 있는 분위기(예: 여유 있는 시간, 딱딱한 고해 형식보다는 면담식 고해 등)를 연출하는 방식도 필요하다. 이런 시도는 어떨까? 어느 날 하루 종일 시간을 내어 신자들에게 면담식 고해성사가 필요한 사람은 언제든지 오라고….

[평신도, 2015년 여름호(VOL.48), 김민수 이냐시오(서울대교구 불광동 성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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