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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46: 12세기의 청빈운동 - 영적 목마름 자구책에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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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1-04 ㅣ No.237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46) 12세기의 청빈운동 - 영적 목마름 자구책에서 시작

 

 

- 프랑스 알비시 : 카타리파 활동의 중심지였던 프랑스 랑그도크 지방 알비시 전경. 가운데 주교좌 성당이 위압적인 모습으로 서있다.

 

 

프랑스 남부 알비시를 찾은 것은 어스름한 저녁 무렵이었다. 십자군 운동 이후 열병처럼 일어난 청빈운동들의 대명사격인 카타리파의 중심지를 찾아 온 길이었다. 시내 초입부터 시야를 사로잡은 것은 언덕 위에 자리한 주교좌 대성당이었다. 종탑 높이 78m 건물 높이 40m로 800년의 세월을 넘어 지금도 알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성 체칠리아 주교좌 성당의 첫 인상은 길게 늘어진 그림자와 함께 어우러져 위압적인 풍모를 뿜어내고 있었다. 마치 도시의 군주처럼 보였다. 주변의 지세와도 전혀 어울리지 않고 창문마저 지상에서 20m 높이에 좁고 길게 나있어 철옹성 같은 인상을 풍기는 성당. 뛰어난 예술적 감각을 지닌 프랑스에서 어떻게 이런 건축물이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문화의 가치는 역사를 곱했을 때 제대로 평가된다고 했던가. 해답은 역시 역사 속에 있었다. 알비 주교좌 성당의 주춧돌이 놓인 것은 1289년 8월 15일. 카타리 이단에 맞서 알비 십자군이 조직되어 피비린내 나는 20년간의 살육전쟁이 끝난 지 60년 뒤였지만 여전히 이단의 위험이 남아있었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건축을 시작한 사람은 알비의 주교요 영주였으며 프랑스 종교재판소의 부의장이었던 카스타넷의 베르나르도였다. 그는 성당의 위용을 통해 카타리 이단에 직면한 정통신앙을 수호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장엄함과 하느님의 위용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문닫을 시간이었지만 멀리 동양에서 온 순례자를 위해 특별히 시간을 허락해준 성당 측의 배려로 내부에 들어가보니 이러한 생각은 더욱 일치했다. 무뚝뚝한 겉모습과 달리 장엄하면서도 화려한 내부의 조각과 그림들은 한마디로 정통 교리서 자체였다. 12세기 신자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발단과 특징

 

그레고리오 개혁은 여러 면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종교적 열정은 넘쳐 났고 교회 내에서 평신도의 자각이 일어나 세속화된 성직자의 지도에 순순히 따르지 않았다. 여기에 더욱 불을 붙인 것은 십자군 운동이었다. 예루살렘 성지에서의 가난한 삶에 대한 체험은 사람들에게 복음서에 나타난 가난한 그리스도를 본받자는 정신이 넘쳐 났다. 이리하여 평신도들은 직접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생활을 알기 위해 성서를 읽기 시작했다. 또한 십자군을 통한 동방문화와의 접촉은 사상적 자유와 발전을 불러왔다.

 

오랜 시간 지속된 개혁의 과도한 긴장 상태와 평신도 사이에 고조된 복음적 삶에 대한 열정에 비해 이에 관심을 가지지 않은 제도교회에 대한 불만은 또 다른 개혁의 목소리, 새로운 신심운동을 가져오게 했다. 12세기에 일종의 붐을 이룬 이러한 새로운 요구는 도미니코회나 프란치스코회처럼 대탁발수도회의 탄생을 가져오는 긍정적인 면으로 발전하기도 했지만 이단적이고 반 교회적 사상과 결부되어 이단화 하기도 했다.

 

결국 12세기 민중적 이단의 출현은 교회제도의 개혁과 번성에도 불구하고 교회 내부에 뚜렷한 결핍과 결함이 있었음을 입증해주고 있다. 이전까지의 이단이 신학과 교리에 관련된 새로운 주장이었던데 반해 주로 성직자들의 실천내용을 비판대상으로 반 성직자주의의 공통점을 보인다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세속화된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그들의 직분을 도외시했고 더 이상 주민들이 필요한 영적 지적 목마름을 해소시켜주지 못했다. 한마디로 12세기의 청빈운동은 성직자 수도자에게서 영적 목마름을 채우지 못한 신자들이 직접 복음서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생활에로 돌아가려는 운동이었다.

 

 

발두스와 카타리

 

가난과 적극적 설교, 참회의 실천, 자선적 행동으로 성격 지워 지는 12세기 청빈운동의 대표적인 것이 발두스파와 카타리파이다.

 

발두스 이단은 부유한 상인이었던 발두스가 1173년경 자신의 모든 재산을 나눠주고 청빈과 속죄에 대해 설교하며 자국어로 된 성서를 읽기 시작함으로써 시작됐다. 그들은 스스로를 「리옹의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리옹의 주교가 그들이 평신도이며 라틴어 성서를 이용하지 않는다고 그들의 설교를 금지하자 발두스는 1179년 제3차 라테란 공의회에 참석하여 교회 인준을 받고자 했다. 그러나 교황 알렉산델 3세가 청빈서원만 인정하고 성직자를 초청하지 않는 한 설교를 할 수 없다고 하자 이에 불복해 계속 설교를 하자 1184년 이단으로 규정돼 파문에 처해졌다. 이에 발두스파는 보편적 사제직만을 인정하면서 스스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완전한 청빈생활을 하는 자만이 그리스도를 전할 권리가 있다며 점차 교회로부터 분리 이탈했다. 그들은 랑그도크와 프로방스 지방 및 북이탈리아 지방으로 흩어져 또다른 개혁세력들과 만나 연합해 오늘날까지 잔존하고 있다.

 

12세기의 청빈운동들이 대부분 그리스도교적 기초 위에서 파생된데 반해 카타리파는 비그리스도교적이고 마니교적 이원론적 뿌리에서 발생했다. 이들은 프랑스 알비를 중심으로 활동했으므로 알비파(Albigenses)라고도 불린다. 상인들과 귀향하는 십자군에 의해 전해진 마니교적 사상이 기초를 이루고 있다. 이들에 따르면 세상은 악한 신에 의해 창조돼 지배받고 있는데 신약의 선한 신은 사람들을 물질세계로부터 해방시키고자 천사 중의 하나인 그리스도를 「순수한 사람」(카타리)으로 파견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방법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받기 위해서는 철저한 금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물질세계는 악한 것이었으므로 그리스도의 강생을 부정했고 결혼을 거부하는 등 극단적인 이단사상을 주장했다. 그들은 철저한 금욕생활을 하는 자신들을 완전한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며 부유하고 세속적 권력을 탐하는 가톨릭교회를 사탄의 회당, 가난한 백성을 돌보지 않는 성직자들을 위선자로 몰아붙이며 성사를 거부했다. 이러한 사상은 카타리파 교역자들의 철저한 금욕 청빈 생활의 모범과 함께 고단한 삶을 영위하며 부유한 교회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던많은 이들로부터 폭발적인 호응을 받아 급속히 퍼져나갔다.

 

이에 교회는 10여년간 꾸준히 재개종 운동을 펼쳤으나 실패하고 결국 1208년 이들을 무력으로 진압하기 위한 알비 십자군이 결성되어 20년간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렀다.

 

민중 이단의 이러한 위험은 결국 종교재판이라 불리는 이단심문제도를 출현시키게 된다.

 

[가톨릭신문, 2002년 4월 14일, 김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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