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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현대의 봉헌생활6: 복음적 권고의 삶을 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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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6-15 ㅣ No.525

현대의 봉헌생활 (6) 복음적 권고의 삶을 산다는 것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오는 ‘기쁨’, 삶으로 드러내야



“저는 여러분에게 한마디 하고 싶습니다. 그 말은 기쁨입니다. 수도자들이 있는 곳 거기에 항상 기쁨이 있습니다. 그것은 생생한 기쁨이고, 예수님을 따르는 기쁨이며,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기쁨이지, 세상이 주는 기쁨이 아닙니다.… 그 기쁨은 예수님과 만남으로부터 태어납니다… 우울하고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수도자를 보면 마치 그들 인생이 푹 젖은 담요, 무거운 담요를 뒤집어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발, ‘식초에 절인 고추’같은 얼굴 하지 마세요… 기쁨은 예수님에게서 나옵니다… 수도자들은 사랑을 예수님께 봉헌합니다. 커다란 사랑이지요. 그래서 정결 서원하게 되지요. 그 서원은 서원 때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됩니다. 이것은 하나의 여정으로 계속 성숙해 가면서 부성애와 모성애로 나아갑니다. 수도자가 이렇게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닐 때 슬퍼집니다… 슬픔의 근원은 바로 그 부족에 있습니다. 이는 많은 결실을 가져다주는 봉헌을 잘못 살아가는 데서 나옵니다. 이것이 축성(봉헌)의 아름다움입니다. 그것은 기쁨, 기쁨입니다.”(2013년 7월 6일, 신앙의 해를 맞아 로마에 온 전 세계 신학생들과 남녀 젊은 수도자들에게 전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메시지 중)

 

2013년 신앙의 해를 지내면서 교종 프란치스코께서 하신 이 말씀은 빠르게 변화되어 가는 사회의 현실과 수도회, 수도자들이 직면한 내·외적인 많은 도전들 앞에서, 축성생활의 해를 지내는 수도자들과 신자들에게 여전히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사실, 시대의 변화 안에서 성소 감소, 회원들의 고령화, 각 수도회의 다양한 사도직(본당, 사회복지시설, 교육, 의료 등) 분야에서 변화 요구들, 세대 차이에서 오는 형제적 삶의 어려움 등이 수도회 내부적인 어려움이요 도전으로 있다지만, 수도자의 정체성과 직접 관련된 ‘가난과 정결과 순명’의 서원의 삶에 있어서도 많은 수도자들이 상당한 혼란과 도전들 앞에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신자유주의의 논리 안에서 양극화가 심화되어 가고, 정보, 통신, 기술 문화의 발달 안에서 소통과 관계의 중요성 등이 더욱 확장된 반면, 편리함 추구와 소비주의 물질문화의 확산 안에서 개인적, 공동체적인 ‘가난’은 재조명과 함께 지속적인 문제의식을 느낄 정도의 도전이 되고 있다. 또한 다양한 인간 관련 학문의 발달과 함께 인간에 대한 통합적 차원의 재인식과 대중매체들의 영향력 아래 감각적인 성 개방 문화의 확산, 독신자 증가의 현실 앞에서 ‘성’에 대한 재발견과 함께, ‘독신과 정결’의 의미에 대해 숙고하게 되었고,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와 전문화의 시대 안에서 ‘개인’에 대한 재발견과 개인주의 확산의 흐름 앞에서 ‘순명’에 대한 재인식과 도전들은 많은 수도자들에게 이 시대에 ‘복음적 권고를 서약하는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하게 하고 있다. 우리 시대의 변화와 세속적 흐름 앞에서 분명, “정결과 가난과 순명”의 복음적 권고의 서약의 삶이 하나의 치료약이 되고, 예언적 외침으로 제시되기도 하지만, 현실은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다. 실제로 ‘복음적 권고’의 서약의 삶은 공동체 생활과 다양한 사도직 활동 안에서 구체적으로 수도자의 얼굴을 통해서 드러나는데, 봉헌의 기쁨이 반사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그렇지 못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수도자들에게는 이 복음적 권고의 서원의 삶이 단순한 하나의 금욕적 차원의 의미로 축소되어 하나의 무거운 짐으로 여기지 않도록 그 참된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는 것이 필요하다.

교회는 올해 축성생활의 해를 지내고 있지만, 수도자들만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인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세례를 통해 자기 나름의 신원들 안에서 축성(봉헌)의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교회는 수도자를 특별히 ‘복음의 권고의 서원을 통해 축성(봉헌)의 삶을 사는 이들’이라고 정의 하면서, 축성(봉헌) 생활의 신원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수도자가 축성(봉헌)의 아름다움과 기쁨을 살아간다고 할 때에는 일반적으로 ‘복음적 권고 서원’을 살아가는 기쁨과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파견된 ‘도유되신 분’(메시아-축성되신 분)으로서 사셨고 아버지와 인류를 위한 사랑과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평생 봉헌의 삶을 사셨다. 그분이 지상에서 사셨던 이러한 축성(봉헌)의 삶은 일반적으로 ‘가난과 정결과 순명의 삶’으로 요약되며 우리는 이를 ‘복음적 권고’라고 말한다. 그리고 수도자들은 주님께서 사셨던 이런 실존적인 삶을 살겠다고 서약함으로써 축성(봉헌)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사실 복음적 권고라고 하면, 흔히 세 가지(가난, 정결, 순명)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복음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보여주신 모든 것이 ‘복음의 권고’이다. 주님께서 당신 곁에 있는 이들,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말씀하시고 보여주신 모든 것이 벗들에게 행한 ‘권고’이기에, 수도자들이 복음적 권고를 살아간다고 할 때에는 실제로는 ‘복음 전체’를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복음적 권고’의 삶은 수도자들만의 몫이 아니다. 복음에서 주님께서 권고하실 때, 당신을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말씀하셨기에, 모든 신자들은 각자의 신원에 따라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이 권고를 살도록 초대된다. 일반 평신도들은 자신의 가정과 직장 등 삶의 공간에서, 그리고 사제들은 사제의 직무와 삶을 통해서 이 권고를 살도록 초대되는 것이다.

그런데, 수도자들은 ‘서약’을 통해서 이 삶을 보다 근본적이고 보다 철저하게 살겠다고 약속한 사람들이다. 주님께서 지상에서 사셨던 그 실존적인 삶의 모습인 가난과 정결과 순명의 삶을 이 시대의 현실에 맞게 투신하면서 살겠다고 서약한 이들이다. 그래서 수도자들은 자기 자신의 가난, 정결, 순명의 삶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난, 정결, 순명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고, 그것에 집중해야 한다. 이 때문에 수도자의 서약의 삶은 가난하시고 정결하시며 순명 안에 사셨던 예수님을 다시금 드러내는 성사적 표지가 된다. 그래서 수도자는 ‘자기’에게서 나와 그리스도의 가난, 그리스도의 정결, 그리스도의 순명의 삶의 의미와 가치들로 넘어가야 하며 그럴 때 축성(봉헌)의 기쁨과 아름다움이 반사될 수 있다. 이는 단순한 금욕적 차원을 넘어서서 보다 적극적으로 하느님만으로 만족하고, 하느님의 뜻을 최우선으로 여기고 하느님의 사랑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교종 프란치스코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당신의 삶과 가르침 안에서 보여주셨던 그 사랑의 모습, 부성애와 모성애의 모습으로 변화되어갈 때, ‘복음적 권고의 삶’을 온전히 살아간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질 못할 때, 우리의 서원의 삶은 축소되고 교종 프란치스코가 말한대로 자기 자신에게도 그리고 수도자들을 바라보는 이들에게도 “식초에 절인 고추”처럼 근근이 삶을 이어가는 모습으로 남게 된다.

사실 수도 서원의 삶이, 말 그대로 “복음적 권고”의 삶이기에 예수님과 밀접한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삶이다. 그분과의 깊은 관계 안에서만이 그분의 가난과 정결과 순명의 삶이 의미와 가치로 충만한 깊은 맛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되며, 자신의 일생을 통한 봉헌의 삶을 통해 그 맛의 향기로 드러낼 수 있다. 그래서 그분과의 내밀하고 지속적인 관계야말로 서약의 삶을 기쁨으로 이끄는 힘이기에, 원천인 예수님과 각 수도회의 창설자에게 집중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축성생활의 해’를 수도자들과 함께 보내는 모든 신자들 역시, ‘복음의 권고’를 각자의 삶의 환경에서 살도록 초대되었기에, 복음적 권고의 깊은 의미와 가치들을 기억하면서 가정과 직장 그리고 각 단체들과 모임들 안에서 구체적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노력이 요구된다. 실제로 ‘가난의 복음적 권고’는, “하느님과 맘몬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는 주님의 권고를 기억하면서, 인간성 파괴와 생태계 파괴를 가져오는 돈의 우상화 앞에서, 나와 우리 가정에서 하느님의 자리를 끊임없이 질문하게 하고,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25-37)를 기억하면서, 교종 프란치스코께서 말씀하신 “자기 자신과 주님과의 관계에만 집중하는 이기적인 가짜 그리스도인”의 의미를 함께 생각하게 하며, ‘개인주의와 쾌락주의의 흐름 앞에서 정결의 복음적 권고는 그리스도인 부부와 가정의 의미를 생각하고 자기 가정만이 아닌 이웃들을 돌아볼 수 있는 ‘사랑의 확장’을 요구하며, 순명의 복음적 권고는 ‘개인’이 존중되지만, 개인주의화 되어가는 현실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는 노력 가운데, 소공동체, 지역 공동체, 교회 공동체, 인류 공동체를 바라보면서, 희생과 봉헌, 연대와 협력, 나눔과 포용의 의미를 생각하고 행동하게 한다.

이렇게 교회의 각 지체들은 자기 나름대로 ‘복음적 권고’를 살아감으로써 복음의 기쁨을 나누고 선포하는 가운데, 안티오키아에서 처음으로 일반 사람들이 신자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던 것처럼(사도 11,26 참조),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지닌 그 의미를 되새기면서 축성생활의 해를 지낸다면 좀 더 의미있는 해가 되리라 본다.

[가톨릭신문, 2015년 6월 14일,
우영성 신부(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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