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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과학과 신앙: 공학기술자를 위한 시편 2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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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5-18 ㅣ No.285

[과학과 신앙] 공학기술자를 위한 시편 23편

 

 

융합 또는 통섭의 시대

 

영국의 물리학자이자 소설가였던 스노우(아래 사진)는 일찍이 과학기술과 인문사회학을, 이른바 ‘두 문화’로 분류한 적이 있습니다.

 

과학기술이 발달할수록 두 문화의 간격은 날로 넓어집니다. 근세 이후 과학기술의 비약적인 발전과 더불어, 지식이 세분화되며 전문화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학기술자들이 인문학에 대해 문외한인 만큼, 인문학도들도 과학기술에 대한 지식이 턱없이 부족한 것도 사실입니다. 이것은 세계사의 발전은 물론이고 어느 한 국가의 균형적 발전에도 분명히 작은 문제는 아닙니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인문사회학 출신자들이 국가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과학기술자들의 목소리는 턱없이 작습니다. 그런 탓에 과학기술 관련 국가정책을 결정할 때도 올바르지 못한 정책적 판단과 집행이 이루어진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고대 그리스와 르네상스 시대 철학가나 예술가 가운데 과학기술과 인문학, 심지어 예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융합적 지식인들이 간혹 역사에 이름을 남기곤 했습니다. 이를테면 아르키메데스와 레오나르도 다빈치, 파스칼, 데카르트 등입니다. 반면에 현대사회에서 이런 융합적 지식을 갖춘 인재를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최근 들어 과학기술이 발달할수록 더욱 물질화되는 세상에 대한 반발이 적지 않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정신적으로는 인문사회학, 특히 인문학을 더욱 갈구하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물질적 풍요만이 결코 행복을 보장해 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사람이 빵만으로 살”(루카 4,4)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요즈음 새삼스럽게, 예전처럼 두 문화 간의 융합이 다시 요구되고 있습니다. 융합적 사고, 융합적 정책 결정, 융합적 생활방식 등의 필요성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셈입니다.

 

이런 점에서 최근 통섭이란 용어도 사람들한테 많이 회자되고 있지요. 본디 ‘서로 다른 것을 묶어 새로운 것을 잡는다.’는 의미의 말입니다.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을 통합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범학문적 연구를 일컫습니다.

 

영국의 자연철학자 윌리엄 휴얼이 19세기 중엽에 처음 만든 말이지만, 1998년 사회생물학의 창시자인 에드워드 윌슨에 의해서 세계적으로 유행하게 된 용어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화여자대학교 최재천 교수가 윌슨(아래 사진)의 책을 번역하면서 통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통섭이든 융합이든, 오늘날의 세계를 보면 점점 융합적 지식을 가진 인재를 요구합니다. 특히 공학기술자들에게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인문학적 지식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다변화된 사회에 유능한 융합적 지식을 갖춘 공학기술자를 만나기가 쉽지 않은 것을 늘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융합이 부족한 공학기술자

 

인류 문명의 발전에 이바지한 과학기술자 가운데서 특히 공학기술자의 공헌은 결코 소홀히 다루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물질적 풍요의 대부분이 19세기 후반 산업혁명 이후 과학기술의 발전을 이끌어온 공학기술자의 노력에 힘입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정치와 경제, 문화, 예술 등 모든 면에서 공학기술자들의 기여는 역사책 한구석에서만 언급되었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특히 한국사회에서의 공학기술자의 위치를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많이 듭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30여 년 간 공과대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늘 간직해 온 느낌입니다. 이 학생들은 일반적으로 인문학적인 소양이 많이 부족하다는 것과 그래서 어딘지 모르게 좀 메마르다는 느낌이 그것입니다. 곧, 융합적 지식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느낌입니다. 일반인이 과학기술에 대해 어려움을 느끼는 것보다 공학기술자들이 인문학에 대해 훨씬 더 거리감을 많이 느낀다는 것을,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알게 됩니다.

 

벌써 오래전, 미국의 한 공학기술자가 다음과 같은 시를 발표하였는데, 아마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나 봅니다. 1930년대에 미국 렌슬러공과대학의 학생 잡지에 실린 시입니다. 제목은 ‘공학기술자를 위한 시편 23편’입니다. 1979년 한국과학원, 곧 지금의 한국과학기술원(KAIST) 학생회지 「석림(碩林)」 제2호에 게재된 것을 옮깁니다.

 

 

‘공학기술자를 위한 시편 23편’

 

진실로 내 너에게 이르노니

기술자와 결혼하지 말지어다.

기술자는 기이한 존재이거늘 악취로 가득 차 있느니라.

그러하노라. 기술자는 오로지 공식으로 부르는 이유만으로 이야기하고

계산자라고 부르는 막대기를 휘두르도다.

기술자는 오직 편람이라 부르는 성서만을 지니고 있느니라.

기술자는 변형과 응력만으로 생각하고

끊임없는 열역학을 사유하도다.

기술자는 차 안의 용수철과 자리를 같이할 뿐

소녀와 같이 자리를 나눌 줄 모르느니라.

항상 기술자는

책을 들고 다니며 연인을 수증기 도표로 대접하려 하도다.

기술자는 마력(馬力)을 모르고는 폭포를 모르고

불을 켜야 한다는 사실을 빼놓고는 낙조(落照)를 이해하지 못하며

연인의 살아있는 체중 이외는 그녀를 알지 못하느니라.

진실로, 기술자와 만날 때 그 연인은 초콜릿을 기대하건만

그는 그의 가방에서 오직 철광석의 견본만을 발견할지어다.

그러하노라. 기술자는 연인의 손을 잡으매

거기서 발생하는 마찰력만을 측정할 뿐이며

기술자는 연인과 입맞춤을 하면서

그녀 입술의 점성만을 시험할 뿐이니라.

기술자의 눈이 꿈꾸듯 반짝이듯 보여도

이는 사랑도 동경(憧憬)도 아니며

다만 공식을 기억해 내려는 헛된 기도(企圖)일 뿐이니라.

기술자의 마음을 여는 열쇠는 단 한 가지 우등(優等)이어라.

그의 연인이 사랑에 대해 쓰고 성호를 긋더라도

기술자는 이를 입맞춤의 기호가 아닌

미지의 양에 대한 기호로만 받아들이노라.

소년 시절 기술자는 소녀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탄성을 시험하였노라.

성인이 되어 기술자는 또 다른 기구를 발견하여 연인의 심금의 진동을 헤아릴 뿐이어라.

기술자는 그의 과학적 탐구만을 영원히 구하오니

자신의 심장의 고동을 아름다움에 대한 상상력으로 계산하고

자신의 정열을 공식으로 표현하려 애쓰도다.

기술자는 자신의 결혼을

여러 가지의 결과가 나올 수 있는 2개의 미지수를 가진 연립방정식으로 간주하도다.

진실로 내 너에게 이르노니 기술자와 결혼하지 말지어다.

 

위 시를 읽으면서 입가에 저절로 떠오르는 미소를 느낄 독자가 많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이 시에 등장하는 몇 가지 용어들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우뚱 할 이도 있을 것입니다. 수증기 도표와 마찰, 점성, 탄성, 열역학, 변형, 응력, 진동, 편람, 마력, 연립방정식 등의 딱딱한 공학적 용어들 때문입니다. 제 학생 시절만 해도 전자계산기 대신 계산자(slide rule, 아래 사진)라는 것을 사용하여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더라도, 또한 그 공학 용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공학기술자들의 무미건조함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시이기에, 어느 정도는 공감하리라 생각합니다. 공학기술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 시를 읽는 저는, 왠지 모르게 씁쓸한 기분이 듭니다.

 

공학기술자들이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세상사의 변두리에 머물게 된 데는, 물론 사회 구조 자체가 문제이기도 하겠지만, 공학기술자들의 책임이기도 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위 시를 읽으면서, 공학기술자들이 모두, 인문사회학도보다 더 따뜻한 심장을 가지고 자신의 분야에서 인류를 위한 봉사의 길에 매진하면 좋겠다는 바람을 조심스럽게 피력해 봅니다.

 

‘공학기술자를 위한 시편 23편’에 나오는 표현과 달리, 연인이 사랑에 대해 쓰고 성호를 그을 때, 이를 미지의 양에 대한 기호 대신 입맞춤의 기호로 받아들였으면 좋겠습니다. 최소한의 인문학적 소양은 갖춘 다음, 편람에 나오는 각종 기본자료에 의존하며 과학기술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새로 쓴 ‘공학기술자를 위한 시편 23편’

 

그래서 시인은 아니지만, 없는 솜씨를 짜내어 위의 시를 다음과 같이 모작해 보았습니다. 공학기술자의 어설프기 짝이 없는 모방시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평가가 두렵지만 너그러운 이해를 바랍니다.

 

공학기술자들이 인간적인 매력은 부족할지 모르나 정말 순수한 부류의 사람들이란 것을 강조하려는 이유에서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연구현장이나 산업현장에서 묵묵히 땀 흘리며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공학기술자를 격려해 주었으면 하는 소박한 소망 때문입니다.

 

진실로 내 너에게 이르노니 기술자와 결혼할지어다.

기술자는 참으로 인간적인 존재이거늘

순수한 향기로 가득 차 있느니라.

그러하노라. 기술자는 오로지 공식이라 부르는 비유만으로 이야기하고

오직 편람이라 부르는 성서만을 지닌 듯 비칠지라도

계산적이나 이해 타산적이지 않고 오직 연인만을

사랑하는 진실한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느니라.

기술자는 변형과 응력 그리고 끊임없는 열역학을

사유하면서 인류의 발전을 위해 말없이 노력하노라.

소녀와 같이 자리를 나누면서 소녀가 알지 못하는 사이,

소녀의 안전을 위해 차 안의 용수철의 강성을 점검하는 따뜻함이 아름답지 않으냐.

기술자는 열의 따뜻함과 아름다운 빛깔을 연인에게 제공해 준다.

낙조를 보면서 때 묻지 않은 시어(詩語)로 즉흥시를 읊는 데 그치지 않고,

연인을 위해 그 낙조의 영원한 아름다움을 지키려 애쓴다.

그러하노라. 기술자는 연인의 손을 잡으면서 연인에게

따뜻한 겨울을 날 수 있는 열효율 높은 장갑과 목도리를 선물할 생각을 할 뿐이며

연인과 입맞춤을 하면서 그 입술의 점성을 시험하며

연인에게 꼭 맞는 립스틱을 개발하고자 하는 마음씀이 곱디곱지 않은가?

기술자의 눈은 그 영민함으로 꿈꾸듯 반짝이며

사랑에 대한 동경으로 연인에게 다가가노라.

그의 연인이 사랑에 대해 쓰고 성호를 긋는 동안

기술자는 그의 과학적 탐구를 통해 이웃과 사회의

발전을 위해 애쓰며 기도하는

거룩한 아름다움을 연인에게 보여주노라.

진실로 내 너에게 이르노니 기술자와 결혼할지어다.

행복이 진정 너의 것이 되리라.

 

* 하창식 프란치스코 - 부산대학교 고분자공학과 교수. 부산가톨릭문인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호주 퀸즐랜드대학교 명예교수, 한국접착 및 계면학회 회장, 부산교구 평신도사도직협의회 회장 등을 지냈다.

 

[경향잡지, 2016년 5월호, 하창식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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