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일)
(백) 부활 제5주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종교철학ㅣ사상

동양고전산책: 동양의 덕목으로 풀어 본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3)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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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5-16 ㅣ No.283

[최성준 신부와 함께하는 동양고전산책] “평화가 너희와 함께!”

- 동양의 덕목으로 풀어 본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 ③ 평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 제일 먼저 하신 인사는 “평화가 너희와 함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진정한 평화를 누리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는 매일 미사 가운데서도 서로 평화의 인사를 나눕니다. 신약성경에 ‘평화’라는 단어가 88번이나 나오는 것만 봐도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지 알 수 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성령의 열매로서의 참평화는 세상의 숱한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유지되는 참된 평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습니다. 수많은 걱정과 근심, 집착과 상처 등으로 마음의 평화를 잃어버린 지 오래되었습니다. 사실 내 마음의 평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지금 내 마음이 평화롭다면 누가 나에게 상처를 주거나 무례하게 굴고, 나에게 잘못을 해도 쉽게 받아 주고 용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 마음이 평화롭지 못하고 화가 잔뜩 나 있다면 누가 나에게 잘해 주고 사랑과 관심을 베풀어도 짜증이 나고 고맙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니 마음의 평화는 우리 삶에 참으로 소중한 가치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의 평화란 어떤 상태일까요? 선불교(禪佛敎)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보리 달마(菩提達磨) 대사가 중국에 들어와 소림사 토굴에서 거처할 때, 혜가(慧可)라는 제자와 나눈 대화는 마음의 평화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합니다.

 

“혜가가 달마에게 물었다. ‘제 마음이 평안을 찾지 못했습니다. 청컨대 제 마음을 안정시켜 주십시오.’ 이에 달마가 말했다. ‘어디 자네 마음이라는 것을 내놓아 보게. 그러면 내 그것을 안정시켜 주겠네.’ 한참 동안 침묵이 흐른 끝에 혜가는 스승에게 오랫동안 마음을 찾았으나 발견할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그러자 달마는 대답하였다. ‘자, 내가 이미 자네 마음에 평화를 주었네.’”1)

 

우리는 마음의 평화를 찾으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늘 심란하고 고뇌에 가득 찬 마음이 잠시라도 평화로울 수 있도록 명상을 하기도 하고 요가나 단전호흡을 배우기도 합니다. 심리학자나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을 받기도 하지요. 참된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고 종교에 귀의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마음의 평화를 내 밖에서부터 찾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은 정작 내 안에 있는데 우리는 그 마음의 평화를 밖에서 찾고 있다는 것이지요. 마음은 원래 평화롭습니다. 이런 평화로운 마음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오히려 숱한 생각들이 원래 평화로운 내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욕망, 나와 내 가족만 챙기고 싶은 이기심, 원하고 얻고자 하는 것에 대한 집착 같은 것들로 인해 깨끗한 마음이 흐려집니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하고 싶은 일이 뜻대로 잘 되지 않아 속상해하다가 마음의 평화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마음은 원래 평화로운 하느님의 선물이며 하느님과 소통할 수 있는 통로입니다. 고요히 주님 앞에 머물러 내 마음을 흐리게 만드는 숱한 상념들을 가라앉히면 맑고 평화로운 마음이 보일 것입니다. 물이 바람에 일렁여 혼탁해지듯이 많은 생각들은 오히려 내 마음의 평화를 깨뜨립니다. 바람이 멈추면 물이 잔잔해지고 맑아져 푸른 하늘이 그대로 비치듯, 내 마음도 온갖 상념들의 바람을 고요히 잠재우면 원래의 평화로운 마음의 상태를 마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흔들리지 않으며 평화를 유지하는 마음의 상태는 모든 성현들이 추구하는 경지였습니다. 공손추와 맹자의 대화를 살펴봅시다.

 

“공손추가 물었다. ‘선생님께서 제나라의 경상 지위에 오르시어 도를 행할 수 있게 된다면, 비록 이로 말미암아 패업을 이루거나 왕업을 이룬다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다면 마음이 동요되시겠습니까? 동요되지 않으시겠습니까?’ 맹자가 말하였다. ‘아니다. 나는 마흔에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다.’”2)

 

제나라는 당시 최고의 강대국이자 선진국이었습니다. ‘그 제나라의 제상이 되어 평소 소신 있게 생각해 오던 이상, 즉 도(道)를 이룰 수 있게 된다면, 아무리 스승님이시지만 마음이 동요되시겠지요?’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사실 공자도 그렇고 맹자도 자신의 뜻을 알아주는 군주를 만나 도를 이루기 위해 평생을 노력했지만 아무도 등용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평생의 꿈을 이루게 되었으니 마음이 얼마나 요동칠까요? 하지만 맹자는 담담합니다. 그는 마흔에 “부동심(不動心)”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공자도 마흔의 나이에 “불혹(不惑)”했다고 했지요. 그래서 예전에 저는 마흔쯤 되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크게 미혹되지 않는 경지에 이를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지요. 오히려 중년의 나이가 되면 유혹거리도 더 많고, 마음이 교만해지거나 소심해지는 등 흔들리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을 압니다. 마음의 평화를 찾고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수행하고 노력해야만 “불혹(不惑)”이나 “부동심(不動心)”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이가 든다고 저절로 평화가 찾아오지는 않습니다. 맹자는 항상 인간의 마음과 본성에 대해서 공부하고 생각하며 마음의 수행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어떤 유혹과 고통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으며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대장부(大丈夫)”의 경지에 이르고자 했습니다.

 

“부유한 재산과 존귀한 자리가 그의 마음을 방탕하게 하지 못하고, 가난과 비천함이 그의 절개를 변하게 하지 못하며, 위협과 무력이 그를 굴복시키지 못한다. 이런 이를 일컬어 대장부라 하는 것이다.”3)

 

우리의 마음은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바뀌는지 모릅니다. 조그마한 고통이나 상처에도 아파하고, 작은 유혹에도 쉽게 흔들리며, 기쁨이나 분노, 슬픔이나 즐거움에 요동을 칩니다. 성령의 열매인 평화를 구합시다. 주님의 참된 평화는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원래 평화로 가득 차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마음의 평화를 느껴 봅시다.

 

1) 『지월(指月)』 권4. “可曰, 我心未寧, 乞師與安. 祖曰, 將心來, 與汝安. 可良久, 曰, 覓心了不得. 祖曰, 我與汝安心竟.”

2)『맹자(孟子)』, 「공손추상(公孫丑上)」, 2. 公孫丑問曰,“夫子加齊之卿相,得行道焉,雖由此覇王,不異矣。如此,則動心否乎。” 孟子曰,“否,我四十不動心。”

3) 『맹자(孟子)』, 「등문공하(膝文公下)」, 2. “富貴不能淫,貧賤不能移,威武不能屈,此之謂大丈夫。”

禪佛敎

 

* 최성준 신부는 북경대학에서 중국철학을 전공하고 현재 대구대교구 문화홍보실장 겸 월간 <빛> 편집주간으로 있습니다.

 

[월간빛, 2016년 5월호, 최성준 이냐시오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실장 겸 월간 <빛>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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